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80년 서울의 봄 당시, 김대중의 기자회견 육성이 10여년만에 방송을 타던 날이 있었죠. 과거의 김대중을 기억하고 있는 어른들과는 달리, 떠도는 풍문으로만 접해볼 뿐 김대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저같은 꼬꼬마들에게는 "박정희와 맞장 뜬 강경하기 짝이 없는 민주투사"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의 달인"으로 이미지화되어 있었지요. 반 친구들 대부분 김대중의 실제 목소리에 대한 호기심이 극에 달해서 관심있게 지켜봤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눌한 호남사투리로 "그랑께"로 시작되는 김대중의 육성은 충격(?)이었고, 깔깔대면서 자지러지던 친구들이 꽤 많았죠. 요즘말로 치면 "깬다"는 반응이랄까요?

어제 미뉴에님과 주고받은 댓글을 다시 반복하지만, 제가 아는 어떤 회사의 회장님은 말없이 계실 때는 깔끔한 정장과 단정한 외모 노년의 근엄한 표정등 '회장님의 포스'가 넘치시는 분인데, 지시하실 때 "이래부러라 저래부러라 잉?" 하시는 분입니다. 회장님의 사투리를 목격한 직원들은 김대중의 사투리를 접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구요. 웃기니까 웃는 것 뿐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그 웃음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간단치 않은 것이죠. 그 웃음에 깊은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더 그럴 것 같습니다.

대체 김대중과 회장님의 예측(?)을 벗어난 반전같은 호남사투리에 깔깔대며 자지러지는 웃음에 담겨있는 맥락이 과연 뭘까요? 참고로 전두환이나 노태우 김영삼 노무현, 흔한 영남출신 재벌회장님들의 진한 영남사투리에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들을 본 적은 없었던 거 같습니다.

보통 낯선 사투리를 접했을 때, 호기심어린 반응을 보이는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따라해보기도 하고, 신기하다는 반응도 보이고... 이것은 호남이든 영남이든 모든 사투리구사자들이 겪는 공통적인 경험입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비단 사투리구사자들 뿐만 아니라 지방에 내려간 서울의 표준어구사자도 겪는 것 같습니다. "이햐.. 서울에서 온 점마 말투가 참말로 얄굿데이..."아따 서울말씨 겁나 희안해부러... " 아마도 당사자들은 기분이 나쁘고 상처를 받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낯선 억양"에 대한 그런 반응은 "인격에 대한 멸시"와는 전혀 다른,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에 더 가깝기에 그런가부다 라고 넘어갈 수도 있을겁니다.

그런데, 유독 호남사투리만은 다르죠. 김대중이나 회장님처럼 사회적지위가 높아서 카리스마를 보유한 사람처럼 "호남사투리를 쓸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런 사람들이 호남사투리를 썼을 때 '웃음이 터져나오는 상황'이 연출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히려 허름한 차림새의 동네아저씨들이나 아줌마들이 호남사투리를 쓰면 당연한 일상으로 취급되는 것이 사실이구요. 

보통 '어울리지 않는 상황'을 목격했을 때 웃음이 터진다는게 학자들의 정설인 것 같습니다. 잘 차려입은 새침한 미모의 아가씨가 갑자기 엉덩이춤을 추면 매우 웃긴 것처럼 그런거죠. 지위가 높은 사람의 호남사투리는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상황' 이기 때문에 웃긴겁니다. 그리고 그 웃음에는 "하층직업에 종사하는거에나 어울리는 전라도사람들"이라는 사회적인 맥락이 담겨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근저에는 "감히 전라도주제에" "전라도출신이 출세했네" 혹은 "내가 지금 전라도출신한테 굽신거리고 있던거야?" 라는 멸시어린 감정이 숨어있기도 할테구요.

웃기니까 웃는 분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근엄한 회장님의 호남사투리'는 솔직히 제가 봐도 웃긴거 맞거든요. 그러나 자신들의 가벼운 웃음에 깊은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정도는 생각해줬으면 좋겠고, 그런 상황을 연출하게 만든 사회적 맥락까지 눈 감아버리는 분들을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으로 대접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어제 인터넷 돌아보니까 어떤 네티즌이 이런 댓글을 달았더라구요.
"홍어들은 유독 고향말 버리고 열심히 서울말씨 배워서 서울출신인것처럼 행세한다메? 거짓말 잘치는 야비한 족속이라 그런가? 누가 전라디언 아니랄까봐. 전라도출신이라는게 부끄럽다는걸 알고 그러는거면 양심은 있는 모양일세 "
이 정도면 거의 인간이기를 포기했다고 밖에는 생각이 안들겠죠. 그리고 이런 인간말종들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멀쩡하게 살 수 있는 사회라면 병든 사회가 맞을 거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