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대안]이 진짜로 희망과 대안이 되는 길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장)


대선, 총선, 지방선거 같은 큰 선거가 다가오면 정치판이 크게 요동친다. 정치인과 정치조직들의 이합집산, 간판 바꿔달기, 리모델링, 새로운 인물 및 정치세력(조직)의 등장 등이 그 대표적인 현상이다. 한국은 그 어떤 나라보다 국민들의 비판적 안목이 높다. 기대, 요구 수준도 높다. 경제, 사회 환경은 급변한다. 반면에 환경의 변화에 조응하여 제도와 리더십을 변화시킬 책임이 있는 정치는 둔감하고 무능하다. 그러다 보니 현실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다. 당연히 큰 선거가 다가오면 새로운 인물과 정치세력에 대한 기대가 분출한다.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역시나’ 하는 실망으로 바뀌는 경험을 수십 년째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열망이 식지 않는다. 국민들의 고통, 불만과 기대, 요구가 잦아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열망을 배경으로 1987년 이후 20여 년에 걸쳐 범 진보 인사; 재야.민주화 운동 출신 인사, 민중운동(노동.농민.빈민운동 등) 출신 인사, 시민운동 출신 인사들이 수혈이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등을 통하여 끊임없이 현실 정치권으로 들어왔다. 거의 실패하긴 했지만 종교(주로 기독교)에 기반을 둔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최근 20년 동안 범진보(재야, 민중, 시민운동) 세력에 의해 이루어진 현실 정치 진출 시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조직적인 시도는 민주노동당과 개혁당 실험 일 것이다. 그리고 현실 정치에 진출해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은 노무현, 이해찬, 유시민, 손학규, 송영길, 김문수, 오세훈, 이재오, 원희룡 등이 아닐까? 범 진보의 정치사회적 위신이 전반적으로 실추된 가운데 상대적으로 그 위신이 덜 실추된 존재가 바로 [희망과 대안]에 이름을 올린 시민운동 지도자들 일 것이다.

 

비어있는 거대한 정치공간


한편 2007년을 전후해서는 범 진보 운동과는 거리가 있는, 기업인 및 수도권 화이트 칼라(사무, 관리, 기술, 전문직, 예비 화이트 칼라=청년세대)의 사고와 정서가 이명박, 문국현, 손학규 등을 통해서 정치적으로 분출되었다. 이 민심은 2002년에는 노무현으로 크게 쏠린 흐름이었다. 2009년 현재는 이명박, 문국현 등의 실망스런 행보로 인해 어디론지 증발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정치적 대홍수를 일으킬 수 있는 거대한 먹장 구름이 되어 한국 상공을 떠돌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지에 빗대어 얘기하면, 바로 이 계층이 촉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형주와 익주(서촉)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 땅은 위나라에 비유할 수 있는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진정한 중도실용을 실천하여도 차지할 수도 있고, 오나라에 비유할 수 있는 민주당이나 이른바 친노세력이 환골탈태하여도 차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확률은 지극히 낮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도자의 립서비스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겠지만, 역사와 전통에 빛나고(?), 관성도 강하고 정치적 기득권도 큰 세력의 변신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권력의 향배를 결정하는 Swing Voter(벤처중소기업가, 지식근로자)를 촉나라에 비유하다 보니 그 계층이 적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은 한국 사회의 물질적 문화적 생산력-여기에는 공정 경쟁(기회), 공평 보상, 투명 사회, 경제사회적 활력, 생산적 복지, 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 등이 포함된다-을 선도하기에 사회의 압도적 다수인 3비층(취약계층)의 이해와 요구도 가장 잘 대변한다. 요컨대 앞에서 말한 Swing Voter는 캐스팅 보트(Casting Voter)여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압도적 다수의 표심 그 자체이기에 중요한 것이다.

정치 지형이 이렇기에, 이 땅의 임자가 될 가능성을 비교적 많이 갖추고 있는 시민운동 지도자들의 정치 관여 시도가 주목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범 진보 친화적 국민들은 [희망과 대안]을 기대 섞인 눈으로, 범 보수 친화적 국민들은 우려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후자의 우려는 창립 총회장에서 벌어진 극우 몰상식 노인들의 난동과 동아일보 등 극우 언론의 비난으로 표출되었다. 이는 최근에 출범한 범 진보 정치조직 혹은 준정치조직 창립식에는 없던 일이다. 시민운동의 새로운 시도가 그 객관적인 능력, 의도와 상관없이 정치판을 크게 요동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hope and alternative.jpg

 

그런데 시민운동의 오래된 관성과 [희망과 대안]의 창립취지문 및 운영원칙(안)을 보면 과연 범 진보가 기대하는 정치적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점이 좀 있다. 본론에 앞서 내 개인 얘기를 좀 하면, 사실 나는 삼십 대 후반까지만 해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직업적으로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사십 대 초에 또 한번 경계를 넘었다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의 경계선을 넘나들다 보니 경계선의 이쪽과 저쪽 세계에 대해서 약간은 객관적으로, 상대화시켜 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넘나드는 세계는 대충 이렇다. 이공계-인문사회계, 블루칼라-화이트칼라, 엔지니어-사무관리직/CEO, Specialist-Generalist, 실천가-이론가, 현실정치-시민운동, 기독교-불교 등. 내 이념적 정체성도 형용모순적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좌파신자유주의, 우파사민주의, 전투적 중도주의 등.

 

협소한 관심 영역과 이상주의


시민운동과 현실 정치 사이에는 건너기 쉽지 않은 큰 강이 놓여 있다. 단적으로 시민운동은 자신이 중시하는 가치 한 두 개만 배타적으로 추구한다. 하지만 정치는 수많은 가치의 우선순위를 매기고, 모순된 가치들의 타협, 절충을 도모한다. 그래서 정치를 ‘서로 상충하는 수많은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권위적으로 조정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 아닌가? 이는 정치에 관여하려고 하는 시민운동 지도자들로 하여금 관심.학습 영역의 대폭적인 확장을 요구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단적으로 한국 민주노조운동이 역사가 오래 됐고, 정책역량도 좀 있지만 그 기업의 경쟁력의 핵심을 쥐고 있는 화이트 칼라에 대한 이해는 일천하기 짝이 없다. 기업 경영에 대한 이해도, 금융 시장에 대한 이해도, 전후방 가치생산 사슬(협력업체)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좀 알았다면 쌍용차 노조가 그렇게 과격한 투쟁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비참하게 깨지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노동 내부의 엄청난 분화와 격차에 대한 이해도, 노동을 넘어 3비층에 대한 이해도 일천하기 짝이 없다. 나는 관심의 폭과 깊이에서 노조운동과 시민운동이 그렇게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시민운동은 상대적으로 다양한 계층을 만나고, 물질적 기득권도 별로 없기에 변신이 쉬울 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시민운동이 이상주의적 잣대를 가지고 최선을 추구한다면, 정치는 차선 혹은 차악을 추구해왔다. 헌법개정에 대한 태도로 말하면, 정치는 주요 대권주자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나 정치세력간의 정치적 역관계 등을 고려하여 원포인트 개헌 혹은 권력구조에 국한된 개헌을 현실적인 최선으로 여긴다. 하지만 시민운동은 대체로 ‘충분한 국민적 숙의’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배제한 이상적인 개헌을 요구한다. 선언적 의미 이상이 없는 헌법상의 기본권 강화에 집착하고, 개헌이 필요한 조항을 한꺼번에 다 개정하자고 한다. 정치적 역관계상 불가능한 진보적 색채가 짙은 헌법을 만들라는 요구도 빼놓지 않는다. 이는 선거법, 정치자금법, 정당법, 복지관련 법.제도 등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물론 이것이 시민운동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명분을 중시해 온 한국인의 성정을 많이 빼 박은 한국 시민운동은 더 완강하게 명분과 원칙에 집착해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좋게 말하면 빛과 소금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현실의 실질적인 변화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한국 최고의 정치인으로 알려진 김대중 전대통령이 ‘정치인은 선비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결합/조화가 정치적 승패의 관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인은 현실적이고, 계산적이고, 세속적이고, 약삭빠르고, 때론 교활한 존재이다. 오죽했으면 선비의 나라인 조선이 직업의 귀천을 士農工商 순으로 정했겠는가? 오랜 시민운동가처럼 선비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체질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20대 초 중반에 보았던 그 많은 훌륭한 선배, 동료들이 현실 정치판에 거의 없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한다.

 

후진적 국민층


시민운동이 건너기 힘든 큰 강은 이뿐 아니다. 시민운동이 국민들의 이상과 이성에 호소한다면, 정치는 국민들의 세속적인 욕망과 감성에 호소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시민운동이 호소하는 대상이 매우 이성적이고, 비판적이고, 교양 수준도 높은 선진적인 국민층이라면, 정치가 주요하게 의식해야 할 대상은 1인 1표인 이상, 지역주의(연고주의)나 비이성적인 공포에 현혹되고, 비현실적인 욕망을 가진 후진적인 국민층이다. 시민운동이 이상과 당위를 설파한다면, 정치는 재정적 제약, 유관 법.제도적 제약, 문화적 제약, 정치적 제약, 이른바 民度 등 오만 가지 제약 조건을 고려해서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 정치가 후진적인 국민층을 주요하게 고려하다 보니 선진국 조차도 정치인에 대한 사회적 신뢰 수준이 바닥을 기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물며 선진국에 비해 사회적 신뢰 수준은 더 낮고, (정치에 대한) 언론의 편파, 왜곡, 폄하도 심하고 시민단체와 국민들도 하나같이 명분에 집착해 온 한국 사회에서 정치인의 신뢰 수준이 바닥 중의 바닥인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아무리 독야청정 하려고 해도 박연차 같은 사람이 정치인의 코를 꿰려고 돈 뭉텅이를 들이민다. 정치 자금과 생활 자금을 조달할 길이 지극히 협소한 상황에서 이 유혹은 결코 물리치기가 쉽지 않다. 특히 가족들은! 또한 (문국현 재판에서 보았듯이) 검찰, 법원, 선관위 등도 권한 확대 차원에서 법을 매우 엄격하게 들이댄다.

 

한편 시민운동이 정치판으로 나오면 같이 하게 될 현실 정치인들의 상당수는 대체로 안면몰수, 뒤통수 때리기, 말 번복하기, 약속 뒤집기, 위에 올려 놓고 밑에서 흔들기, 헤게모니에 대한 비이성적 집착 등이 난무하는 현실 정치판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이 많다. 따라서 심리와 행동이 정치 초보자와 같을 수가 없다. 살면서 보니 이런 저런 일로 크게 상처받은 사람의 심리와 행동이 뒤틀리지 않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현실 정치 경험자들을 물리치고, 순결한(?) 사람들끼리 정치하려면 문국현처럼 형편없는 정치를 하기 마련이다.

 

정치 하지마라


이래저래 한국 시민운동 지도자와 한국 정치지도자 사이에는 선진국 보다 훨씬 건너기 힘든 큰 강이 가로 놓여 있다고 보아야 한다. 지난 3월 4일 故노무현 대통령이 쓴 ‘정치 하지 마라’라는 글은 그 큰 강의 존재를 말해 준다.

 

“‘정치, 하지마라.’ 이 말은 제가 요즈음 사람들을 만나면 자주 하는 말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하는 말입니다.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하여 잃어야 하는 것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하는 목적이 권세나 명성을 좇아서 하는 것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성공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성공을 위하여 쏟아야 하는 노력과 감수해야 하는 부담을 생각하면 권세와 명성은 실속이 없고 그나마 너무 짧습니다. 이웃과 공동체, 그리고 역사를 위하여, 가치 있는 뭔가를 이루고자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라면, 한참을 지나고 나서 그가 이룬 결과가 생각보다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중략) 정치를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정치에 바쳐야 합니다. 정치를 위하여 무엇을 바쳐야 하는지를 헤아리는 것보다, 그가 가진 것 중에서 정치에 바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헤아려 보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사생활, 특히 가족들의 사생활을 보호할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는 스스로의 선택이니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정치인이 가는 길에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그리고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난관과 부담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거짓말의 수렁, 정치자금의 수렁, 사생활 검증의 수렁, 이전투구의 수렁, 이런 수렁들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좋은 조건을 가진 정치인이 아니고는 이 길을 회피하기가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수렁에 빠져서 정치 생명을 마감합니다. 살아남은 사람도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 많습니다. 무사히 걸어 나온 사람도 사람들의 비난, 법적인 위험, 양심의 부담, 이런 위험 부담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말년이 가난하고 외롭습니다"

 

한국에서 시민운동 지도자들이 정치를 한다는 것은 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이 시대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만큼 절실히 필요하고도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범 진보의 빈 구석 채우기


다 아는 얘기지만 정치는 망가질 각오를 한다고 해서, 또 열심히 한다고 해서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참여정부, 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 민주노동당 등이 열심히 안 해서, 혹은 까마귀 노는 곳을 백로들이 회피해서 오늘날의 문명역주행 사태가 도래한 것이 아니다. 핵심 패인은 국가경영 실력(컨텐츠, 리더십, 조직) 부족이다.

 

지난 몇 년간은 참여정부, 열린우리당,통합민주당,민노당 등 현실 정치권만 떡수를 둔 것이 아니다. 시민단체, 진보 언론, 진보 지식사회 등 범 진보 전체가 이로부터 자유롭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년간 범 진보를 분열과 대립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주요한 정치적 쟁점-지난 대선, 총선 평가, 참여정부,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 등의 행보에 대한 평가 등-에 대한 깊은 성찰도, 튼실한 합의도 없다.

 

담론 측면에서만 봐도 시민운동을 포함한 범 진보가 결여한 담론이 한 둘이 아니다. 예컨대 박정희 패러다임과 김대중 패러다임을 넘어선 새로운 경제사회 패러다임(플랫폼)이 없다. 이렇게 보는 것은 (현실 정합성은 없어도) 나름대로 논리적 정합성을 가지고 있는 북유럽 경제사회 패러다임을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범 진보 특유의 일자리/산업/중소기업 정책도 없다. 일자리 정책은 대체로 복지 정책의 결과로 다뤄진다. 이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고, 부자에게 혜택을 많이 주면 일자리도 많이 생기고, 빈자의 소득도 올라간다는 얘기처럼 헐렁하다. 또한 이명박, 오세훈, 김문수가 재미 보고 있는 국토/수도권/서울을 대상으로 한 공간 디자인 전략도 없다. 진보 특유의 공공부문 개혁 담론도 없다. 증세, 공공부문 확대, 구조조정 반대가 주다.  헌법, 선거법 등 정치관계법 개혁 방안도, 사법개혁 방안도 이렇다 할 것이 없다. 업그레이드 된 균형발전(지방발전) 정책도 나올 때가 됐지만 없다. 단지 세종시 원안 사수가 전부처럼 되었다.


그리고 좋은 정치의 기초인 미래학(인구, 재정, 교육, 산업/기술, 기후.환경.에너지.자원 등)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너무나 취약하다. 교육, 보건 의료, 복지, 노동 등에서는 좌파적 담론은 무성하지만 범 진보의 정책적 컨센서스는 잘 형성되지 않는다. 범 진보가 대체로 공유하는 정책적 컨센서스는 대북 화해협력 정책뿐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듯 시민운동이 의미 있는 정치세력이 되기 위해서 건너야 할 강은 너무나 크고, 넘어야 할 산은 너무나 험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민운동이 이 강을 건너야 하고 이 산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희망과 대안] 창립선언문에서 말했듯이 ‘이 위기의 상황에서 국민이 기대고 의지할 곳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고, 민주당이나 다른 야당들이 국민의 지지를 받을 만한 제대로 된 대안이나 전망을 내놓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절망적 상황은 시민운동으로 하여금 정치의 변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점을 깨닫게 하고 있으며, 단순히 특정 정당 정파에 대한 반대나 지지가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높이고, 더 심화시키기 위한 도전에 나서야 한다는 절박감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적 요구 외에도 기대를 버릴 수 없는 것은, 아무리 약점이 많아도 시민운동과 그에 친화적인 세력들이 비어있는 거대한 정치 공간을 차지할 가능성을 비교적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민운동은 공직에 선출되면 좋고, 설사 선출되지 못해도 공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조직(시민단체)과 마인드가 있기 때문이다. 선출직 공무원 배지를 달지 않으면 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잼병이고, 일상 정치활동이래 봤자 (팬클럽, 정당, 언론사 등) 홈페이지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것 전부인 취미가 ‘정치 관여’인 사람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이는 너무나 소중한 자산이다. 

 

[희망과 대안]이 모든 제약 조건을 극복하고 진짜로 범 진보의 희망과 대안으로 거듭나 주기를 기대한다. 이 관건은 한국 정치, 좁게는 범 진보 정치가 결여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안목과 실력일 것이다. 그 출발은 한국의 열악한 정치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아닐까? 知彼知己아닐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