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반에 모스크바 북한식당에 잠시 들러 식사한 기억이 있는데 당시에는 장소도 비좁고 분위기도 어두침침해서 특별한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이번 여행에서 북한식당에 들른 것은 예정에 없던 깜짝행사였다. 내 일정이 상당부분 바뀌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남게

되었는데 잠시 묵던 민박집 주인여자가  나를 대접한다고 북한식당으로 나를 안내한 것이다.

나는 물론 그 제안을 아주 기꺼이 고맙게 받아들였다. 식당은 내가 묵던 장소에서 차로 불과 십여분 거리에 있었다.

간판에는 K0RE 라고 적혀 있는데 아마 <고려>를 러시아식으로 표기한 것 같다.

 첫날엔 입구까지 찾아갔다가 허탕을 쳤다. 수십명의 러시아 사람들이 홀을 온통 차지하고 풍악을 울리며 거기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

기 때문이다. 결혼식 피로연을 이 북한식당을 통째로 빌려서 하는 거라고 민박집 사장인 조선족 여성이 말했다.

 

   며칠 뒤 금요일에 맟춰 그곳을 다시 찾았다. 금요일엔 손님이 많을 때 특별공연도 베푼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홀은 지하 일층에 있는데

수십명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을만큼 규모가 넓었다. 하늘색 원피스를 맵시있게 입은 십여명 여성 봉사자들이 분주히 홀 안을 왕래하며

손님 시중을 들고 있는데 예상대로 모두가 일정 수준의 미모를 갗춘 여성들이었다.

 나는 이 여성봉사자들이 미모 뿐 아니라 민간외교관 수준의 예능 실력과 지적? 능력을 갗춘 여성들이라는 걸 지난번 방북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해외에 나올 정도라면 그 선발기준은 더욱 까다로울 게 분명하다.

 이 날은 날씨가 추운 탓인지 손님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고 그때문인지 좋은 볼거리라고 민박집 사장이 내게 자랑하던 특별공연은 제공

되지 않았다. 춤과 노래로 이루어지는 공연이 그 숙련도로 미뤄볼 때 상당히 흥겹고 멋드러진 공연일 것은 틀림 없겠지만 나는 사실

그 공연 자체를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미 화면이나 실제를 통해 유사한 공연을 본바가 있고 그런 민속류의 공연에 남다른 취향을

갖고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내가 북한식당 방문을 크게 기대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여기서 맛보게 될 음식맛이다.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쓰는 첫째 이유도 바로 그곳에서 맛본 음식의 맛에 있다. 식당이니까 당연히 음식의 맛과 그 품질이 그 식당의

존재이유를 말해줄 것이다. 나는 미식가도 아니고 전통 한식(韓式)요리에 관해 일가견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미군이 들어오

고 우리 식생활이 다분히 서양풍으로 바뀌기 전, 육이오 전, 혹은 해방 전의 식탁의 기억을 아련히 갖고 있기 때문에 어쩌다 그런 식탁

을 만나면 마치 잊혀진 조상 얼굴과 마주친 것처럼 각별한 감회를 느끼게 된다. 한마디로 우리 미각을 마비시킨 각종 조미료와 외래 향

신료가 제거된 음식을 그곳에서 또 다시 만났다.

 

 메뉴책자에 나와있는 음식 가짓수가  아마 백여종 가깝지 않을까 싶다. 모두가 군침이 도는 그림이라 뭘 시켜야 할지 한참 망설였다.

저녁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밥과 국과 김치를 기본으로 시켰는데 거기에  물김치와 콩나물요리가 따라 나왔다. 국으로는 된장국을 시

켰는데 그 내용이 남쪽에서 장국이라 지칭되는 국과 맛이 유사했다. 여기에 추가로 통오징어 찜과 김치를 넣은 돼지고기 볶음, 두부

요리 등이 나왔다.

 

 제일 맛있게 먹은 것은 장국이다. 애호박과 조개류, 기타 등등이 들어간 장국의 맛은 천하일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뚝배기에 국물

이 가득 찬 장국을 가져왔는데 나는 한숫갈도 남기지 않고 바닥까지 죄다 먹었다. 평소 소식이라 집에서는 국을 한두숫갈 떠먹던 것

에 비하면 놀랄만한 일이었다. 두번째는 콩나물요리인데 콩나물이 너무나 부드럽고 저작이 잘 될 뿐더러 그 향도 아주 오래 잊혀졌

던 콩나물 본래의 향을 다시 되살려주었다. 남쪽에서 잘 알려진 식품회사 제품의 콩나물이 백화점 같은데서 특별가격으로 팔리는데

사실 이 자본주의 콩나물은 제아무리 유명상표라 해도 고래심줄처럼 질기고 질기다. 아마 대량속성 생산을 위해 모종의 화학약품을

사용하지 않나 의심되기도 하는 것이다.

김치 역시 내가 어릴적에 먹던 순박한  시골김치의 맛, 물김치 역시 남쪽의 그것과는 뭔가 다른 ,자극성이 전혀 없는 순박한 맛을 전

해준다.

통오징어찜과 돼지고기 볶음도 그나름의 개성?을 지닌 맛있는 음식이다, 많은 음식을 시키진 않았지만 식탁에 오른 모든 음식이

저마다 존재의 이유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식사를 한다기 보다 젓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한가지 한가지 맛을 음미하는 기분으로

식사를 했다. 오죽하면 지나가던 봉사원과 이런 문답을 교환했을까.

"선생님, 음식이 어떻습네까? 맛이 있습네까?"

눈이 유난히 큰 한 봉사원이 내 옆으로 다가와 내게 조심스레 묻는다.

"나 자꾸 말 시키지 마시요. 식사에 방해가 되니까."

"그렇습네까? 그럼 말씀 안 묻겠습네다."

봉사원은 내 농담의 진의를 금방 알아차리고 웃으며 지나갔다.

 

 모스크바에는 남쪽 교민이 운영하는 한식당도 여러곳 있다. 아를료녹 호텔 지하에 있는 남쪽 식당에도 가봤는데 서울의 맛과

대동소이해서 별 특징은 없었다. 시간여유가 있고 여건이 허용된다면 며칠이고 계속 북한식당에 들러 메뉴판에 나온 모든 음

식들을 하나하나 음미해보고 싶기도 했으나 그런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만약 한식전문가라면 만사 제쳐놓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서구사회에는 중국식당,일본식당이 동양 음식을

알리는 주류창구로 인식되어 왔고 한국식당이 후발주자로 뛰어든 셈인데 아직은 미약한 존재이다. 나는 북에서 잘 보존되고

가꾸어진 순도 높고 품격있는 전통음식이 한국음식의 강점을 알리는데 크게 기여할 거라고 믿고있다.

 북의 많은 대중들이 기아에 허덕인다는데 웬 북한음식찬양이냐고 핀잔주는 분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두 사안은 별개의 문제

라고 본다. 식량부족은 북도 노력해야겠지만 무엇보다 남에서 우선 정부차원의 북한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