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학도지만, 공학도 주제에 인문학 책을 한권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미쉘 뚜르니에의 생각의 거울(Le Miroir Des Idees). 이 책에는 비인문학도인 나에게 인문학적 사유를 이끌어내게 한다. 에세이 같이 짧지만 압축적으로 소재를 다룬 글들은 바쁜 일상사에서 잠시 '그런가?'와 '그렇구나'라는........ 짧은 시간에 긴 정신적 휴식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의 책에서 아직도 기억에 뚜렷히 남는 것은 두가지이다. 첫번째는 '묙욕은 우파, 샤워는 좌파'라는 개념인데 자세한 설명은 되어 있지 않아서 나름대로 사유는 했는데 이해하지를 못했다. 다행히, 민주노동당원분들의 짧지만 명쾌한 해석 때문에 최소한 대충은 이해를 했었다...고 생각한다. 목욕은 고인물..... 샤워는 흐르는 물.....


이런 맥락에서 해석한다면 예수는 좌파가 된다. 왜냐하면 요한이 예수에게 준 세례는 흐르는 물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스스로 호수에 담겨(맞지 아마도?) 우파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우파와 좌파의 접점이라고나 할까?


두번째로 기억에 남는 것은 '개와 고양이'에 대한 사유이다. 두가지의 '명제(?)'가 생각이 난다.


'개는 일차원 동물, 고양이는 이차원 동물'

'개는 주인을 섬기고 고양이는 스스로가 주인이다'



개는 일차원 동물이고 고양이는 이차원 동물이라는 명제는 내가 스스로 터득한 것인지 아니면 책에 써있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이 책은 어떤 것은 친절하게 상세한 설명, 어떤 것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설명이 생략이 되어 있다) 개는 새끼를 자신이 서식하는 '집안'에서 낳는다. 그러나 고양이는 새끼를 결코 '자신이 서식하는 집안'에서 낳지를 않는다. 밖에서 새끼를 낳아 자기가 서식하는 집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고양이와 개는 호랑이를 조상으로 하고 있지만 개의 직속조상이라는 이리라는 동물의 사회성을 배우면서 야성을 거세 당한듯 하다. 이리는 동물 중에서는 드물게 사회적 규칙을 지키는 동물이다. 고양이는 홀로 외롭게 자연과 싸우며 호랑이의 당당함의 유전자를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개는 발달된 사회성으로 계급을 안다. 그리고 이 영리하고 귀여운 동물은 사람이 자신보다 '높은 등급'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인간에게 복종하고 찰갑게 대한다. 그러나 개와 고양이에 대한 인간의 의식은 정반대이다. 이집트 시절에는 고양이는 성수(聖獸)로 대접받아서 고양이를 죽이는 사람은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민족의 전설에서 고양이는 영물이며 그래서 자신을 해하는 사람에게는 복수한다는 내용의 전설이 내려져 온다. 개는 그가 주인으로 섬기는 인간으로부터 다양한 종류로 변신하게 되는 선물을 받았다. 개의 입장에서는 선물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개의 품종은 인간이 오랫동안 노력 끝에 분화시킨 결과이다. 그리고 일부 개는 고양이와 비슷한 대접을 받는다. 지금은 멸족한 시베리아의 처키족이 만들어낸 허스키종은 썰매를 끄는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하는데 시베리아의 살벌한 자연환경 속세어 때때로 허스키는 멸종의 위기에 처했었고 그런 경우에 허스키는 여성들이 모유로 키워 종을 지켜냈다고 한다.


인간에게 고양이와 개, 개와 고양이는 1,2위를 다투는 애완동물이지만 개와 고양이는 그렇게 친하지 않다. 오히려 원수지간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텔레비젼의 '애완동물' 프로그램에서도 보듯, 고양이가 앞발 한쪽을 든다, 그러면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고양이에게 다가간다, 그런 강아지를 고양이가 앞발로 할퀸다, 둘은 서로 싸운다.......의 순서로 개와 고양이는 원수가 되어버린다.


이는 개와 고양이의 습성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어쩌면 이렇게 정반대로 해놓았을까? 우리는 개가 기분이 좋으면 앞발의 한쪽을 드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고양이가 앞발의 한쪽을 드는 이유는 상당히 무엇인가가 기분이 안좋아서라는 것을 잘 모른다. 우리는 개가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흔드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고양이가 꼬리를 가랑이 속으로 넣는 경우는 개처럼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 기분이 좋은 상태임을 나타내는 것임을 잘 모른다.


개가 목덜미 쪽의 털을 세우면 누군가와 싸우겠다는 전투 의지의 표현이지만 고양이가 목덜미 쪽의 털을 세우면 기분이 좋아서라는 것을 잘 모른다.


아마도 이렇게 정반대인 개와 고양이의 습성 때문에 개와 고양이를 같이 키우는 사람들은 상당히 헷갈릴 것이며 아마도 개와 고양이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내 마음도 잘 몰라주는 주인... 또는 인간'이라는 핀잔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양이는 스스로 왕이기 때문에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개는 생존 때문에 자신의 자취를 숨겨야할 필요가 있었다. 고양이에게 자신의 똥은 스스로의 존재를 나타내는 '자랑스러운 배설물'이지만 개에게 자신의 똥은 포식자에게 자신을 드러내게 하는 '위험한 증거'이다. 개가 똥을 먹는 이유이다.


그런데 개가 똥을 먹는 것은 어미가 자식에게 가르쳐 주기도 하고 새끼가 스스로 터득하기도 한다고 한다. 개는 인간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똥을 먹는 것은 왜일까? 이제 최소한 자신이 포식자로부터 먹힐 위험은 사라졌는데 말이다. 그 것은 어쩌면 수천년 동안의 세월로 유전자나 습성이 바뀌기에는 너무 짧은 세월이기도 하지만 고양이는 인간의 식용이 된 적이 없지만 개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식용이 된 적이 많았는데 어쩌면 개가 아직도 자신의 똥을 먹는 이유는 언젠가 인간의 곁을 떠날 그 날을 위하여 생존의 방법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가 똥을 먹는 이유 중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주인'과 '서열'이다. 그 극명한 예가 바로 춘추전국시대에 구천과 부차의 이야기다. '와신상담'의 주인공인 이 두 사람. 구천은 부차에게 패해서 전쟁의 포로가 되었고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부차의 똥을 맛보고 충성심을 내보였고 그렇게 구천은 귀국을 하여 결국 부차에게 승리를 거둔다.


개가 군집생활을 할 때, 개가 다른 개의 똥을 먹는다면 그 개는 똥의 주인인 개보다 서열이 낮다고 보면 된다. 이리로부터 시작된 사회성, 인간으로부터 거세된 사회성의 부활이다. 개가 똥을 먹는 것은 '자신의 존재 확인'과 같은 의식이다. 그러니 우리 속담은 개에게 있어 얼마나 잔인한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


똥 묻은 개는 '자신의 존재를' 똥을 먹음으로서 확인을 한, 개로서는 정당한 것이다. 반면에 겨 묻은 개는 감히, 비록 개가 인간과 함께 생활을 하고 있지만 명백히 구분된 영역의 침범, 즉 그의 주인의 영역에 침범한 하극상을 한 것이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겨 묻은 개보다 똥 묻은 개가 더 '나쁘다'라고 할 수 없다.


언젠가 내가 포스팅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은 당연지사'라는 그 포스팅은 바로 이 미쉘 뚜르니에의 생각의 거울(Le Miroir Des Idees)에서 던져준 인문학적 과제의 사유의 결과물 중 하나이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