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부터 우울증(melancholy)과 애도(mourning)라는 주제로 글을 쓰려고 했었는데, 마침 한겨례신문에서 <<만들어진 우울증>>이라는 책 소개를 한 기사를 읽었네요. 대략 요약하면, 미국 정신의학자들이 프로이트파를 몰아내기 위해, 이러 저러한 정신 질환들을 만들어내고, 이를 이용해 제약업체들은 항우울제등등을 재미좋게 팔아먹었다는 거네요. 핵심 문장을 인용하면, "‘불안’이라는 주제로 100년 동안 프로이트파와 싸우던 정신의학파는 정신의 역동성 대신 뇌물질의 불균형 상태로 모든 증상을 설명하려 했다. 약물을 통한 치료 가능 여부 또한 중요했다. 이 결과 상황에 따른 ‘반응’은 개별적 ‘증상’으로, ‘증상’은 병적 ‘장애’로 정신과적 격상을 시도한다."라는 문장이 눈에 띄네요. 참고적으로, 저자는 정신의학자 입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84994.html)

우울증(melancholy)은 무엇보다 "무엇인가를 잃어간다"는 어떤 상실감으로 발생합니다. 엄마나 아빠의 죽음과 같은 것들이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되겠죠. 제가 시간 강사를 할 때의 일화인데, 자유롭게 2, 3 쪽의 글을 써오라는 과제에 한 학생이 자신의 아빠의 죽음에 대해 썼습니다. 저는 영화에 대해서든, 만화에 대해서든, 책에 대해서든 자유롭게 소재를 선택하라는 것이었는데, 조금 당황스러웠었죠. 자신의 아빠가 돌아가셨다면서, 자신이 아빠에 대한 기억을 잃어간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고백하는 글이었습니다. 어느 날엔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어떤 남자의 가죽 점퍼를 보고, 자신의 아빠가 즐겨 입던 가죽 점퍼를 떠올리고선 자신이 내려야할 정거장을 지나쳐서 그 남자를 따라내렸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돌아가신 아빠를 잊고 있었다는 자책과 함께 그곳에서 얼마 동안 멍하니 있었다고도 적었죠. 아마도 그 학생은 가죽 점퍼가 전해주는 특유의 냄세에 취해 그 남자를 따라갔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 학생에게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그 학생이 경험했듯이, 인간의 기억이란 인간의 뇌내에 각인되어있는 어떤 무엇이 아니라구요. 즉, 그 학생의 기억은 가죽 점퍼에, 가죽 점퍼가 풍기는 특유의 냄세에 각인되어 있다구요. (이를 들뢰즈는 "비자발적 기억(involuntary memory)"이라고 부릅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비평서에서, 주인공이 마들렌느 과자의 냄세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게 되는 것에 대해 비자발적 기억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빠에 대한 기억을 잃어간다고 해서, 그렇게 슬퍼하지는 말라구요. 불현듯 아빠에 대한 기억이 이런 저런 사물들을 통해 엄습해올 때면, 아빠를 또 한 번 기억해내고, 그 기억 속에서 "애도"를 하라구요. 물론, 그 애도란 자기 자신을 애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울증은 무엇인가를 잃어간다는 상실감으로부터 옵니다. "주부 우울증"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평생을 남편의 욕망을 따라, 자식의 욕망을 따라 살던 우리의 어머니는 어느 순간,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맏닥드리며, 우울증의 나락으로 빠지게 되죠. 이런 질문과 조우하는 순간, 그녀는 '주부 건망증"에 빠지게 됩니다. 순간 멍해지는 거죠. 그래서 주전자를 그렇게나 자주 태워먹게 되죠. 10년 전에 봤던 단편 영화 한 편이 생각나네요. 한 가정 주부가 남편이라는 울타리, 자식이라는 울타리를 박차고 나가 청소부를 하면서 옥탑방에서 선인장과 함께 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 단편 영화를 설명하는 비평가가 인상깊은 한 장면을 소개해 주는데, 그 가정 주부가 장식장에 있는 그릇들을 닦는 장면을 비춰주고, 그 다음 장면에서 장식장에 있는 모든 그릇을 마루에 내려서는 하나 하나 닦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주부 건망증에 걸린 그 가정주부는 장식장 안의 그릇을 닦다가 어느 순간 멍해져서는 어디까지 닦았는지를 잊어버리는 거죠. 그래서, 아예 모든 그릇을 마루에 벌려놓고 하나 하나 닦게된 것이었죠. 이러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 혹은 무엇인가를 잃어가고 있다는 우울증에 대한 치유는 무엇인가를 잃어가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애도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를 잃어가고 있으니까요. 

<<재앙의 글쓰기(The Writing of Disater)>>에서 모리스 블랑쇼는 한 아이가 창문 밖 하늘을 보다가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을 "최초 장면(primal scene)"이라고 말합니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었을까요? 그 아이가 왜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블랑쇼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그렇게 텅 비어 있는 하늘을 보면서, 텅 비어 있는 자신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무엇인가를 잃어가고 있는 자신을 보았을지도 모르죠. 그렇게 그 아이는 자신을 애도할 줄 알게된 것이죠. 그렇게 울음을 터트린 아이는 이제 새로운 기쁨으로 비밀 속에서 살아가겠죠.

김광석은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에서, 그렇게 매일 이별하며 살아가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애도할 줄 알았던 김광석이 자살을 했다는 것을 납득하기는 쉽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