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퍼는 정신분석이 반증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The most characteristic element in this situation seemed to me the incessant stream of confirmations, of observations which ‘verified’ the theories in question; and this point was constantly emphasize by their adherents. A Marxist could not open a newspaper without finding on every page confirming evidence for his interpretation of history; not only in the news, but also in its presentation—which revealed the class bias of the paper—and especially of course in what the paper did not say. The Freudian analysts emphasized that their theories were constantly verified by their ‘clinical observations’. As for Adler, I was much impressed by a personal experience. Once, in 1919, I reported to him a case which to me did not seem particularly Adlerian, but which he found no difficulty in analyzing in terms of his theory of inferiority feelings, although he had not even seen the child. Slightly shocked, I asked him how he could be so sure. ‘Because of my thousandfold experience’, he replied; whereupon I could not help saying: ‘And with this new case, I suppose, your experience has become thousand-and-one-fold.’

 

What I had in mind was that his previous observations may not have been much sounder than this new one; that each in its turn had been interpreted in the light of ‘previous experience’, and at the same time counted as additional confirmation. What, I asked myself, did it confirm? No more than that a case could be interpreted in the light of a theory. But this meant very little, I reflected, since every conceivable case could be interpreted in the light Adler’s theory, or equally of Freud’s. I may illustrate this by two very different examples of human behavior: that of a man who pushes a child into the water with the intention of drowning it; and that of a man who sacrifices his life in an attempt to save the child. Each of these two cases can be explained with equal ease in Freudian and Adlerian terms. According to Freud the first man suffered from repression (say, of some component of his Oedipus complex), while the second man had achieved sublimation. According to Adler the first man suffered from feelings of inferiority (producing perhaps the need to prove to himself that he dared to commit some crime), and so did the second man (whose need was to prove to himself that he dared to rescue the child). I could not think of any human behavior which could not be interpreted in terms of either theory. It was precisely this fact—that they always fitted, that they were always confirmed—which in the eyes of their admirers constituted the strongest argument in favor of these theories. It began to dawn on me that this apparent strength was in fact their weakness.

(Conjectures and Refutations, 46~47)

 

내가 보기에,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문제의 이론들을 <검증>하는 관찰 결과인 끊임없는 입증 사례에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점이 그 이론의 지지자들에 의해 항상 강조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신문의 지면을 넘길 때마다 그의 역사 해석을 입증해 주는 증거를 발견했다. 뉴스에서뿐만 아니라, 그 신문의 계급적 편향을 드러내는 보도자료에서도, 그리고 특히 그 신문이 말하지 않은 것에도. 또 프로이트의 이론을 신봉하는 정신분석학자는 <임상 실험>에 의해 그들의 이론이 항상 검증되었다는 것을 역설했다. 아들러와 관련해서 나는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는 19190년에 아들러의 이론에 특히 들어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를 그에게 보고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아들러는 그 아이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열등감에 관한 자신의 이론으로 그 사례를 분석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나는 약간 충격을 받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천 번이나 경험했기 때문에>가 그의 대답이었다. 그 대답을 듣고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이번까지 합쳐서, 당신의 경험은 천 하고도 한번째가 되겠군요.>

 

그 말을 하면서 내가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은, 그의 이전의 관찰들이 이 새로운 관찰보다 더 낫다고는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매번의 경험은 그때마다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서 해석되었으며, 동시에 추가적인 입증 사례로 간주되었다. 나는 관찰이 무엇을 입증해주는가 자문해 보았다. 결론은 하나의 사례가 그 이론에 의해 해석될 수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있을 법한 모든 사례가 아들러의 이론이나 프로이트의 이론에 의해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점을 인간 행위의 상반된 두 가지 예를 통해 보여줄 수 있다. 하나는 아이를 익사시키기 위해 물 속에 밀어넣는 사람의 행위이며, 다른 하나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사람의 행위이다. 이 두 경우는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이론에 의해 똑같이 쉽게 해석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면, 첫 번째 사람은 (말하자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억압에 의해 고통을 받고 있으며, 반면에 두 번째 사람은 그 승화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러의 이론에 따르면, 첫 번째 사람은 (자신도 감히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입증해 보이고자 하는 욕구를 일으키는) 열등감에 의해 고통받고 있으며, 두번째 사람도 (자신도 감히 아이를 구출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입증해 보이려고 하는)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두 이론에 의해 해석되지 못할 인간의 행위는 하나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이것은 그들의 이론이 항상 적합하며 항상 입증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 사실이 그 이론들의 신봉자들의 눈에는 그 이론들을 위한 가장 강력한 논증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외견상 강력해 보이는 이 점이 사실은 그들의 약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추측과 논박 1, 78~80)

 

 

 

“정신분석은 과학인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정신분석가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를 비롯하여 많은 정신분석가들이 정신분석은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신분석이 과학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정신분석가들도 만만치 않게 많은 것 같다.

 

정신분석이 과학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정신분석가들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었다.

 

자크 라캉과 유리 겔라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3fZ/132

 

프로이트는 증상, , 실수, 환자의 연상과 자신의 개념 및 이론을 짬뽕해서 상당히 그럴 듯한 이야기가 만들어질 때 그것이 자신의 이론에 대한 입증이라고 우겼다. 프로이트의 이런 주장의 문제점에서는 다음 글의 “3. 꿈의 해석에서 다루었다.

 

나는 왜 프로이트주의자가 아닌가 (version 0.2)

http://cafe.daum.net/Psychoanalyse/GoAb/3

 

포퍼의 주장대로 프로이트의 해석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다. 따라서 그것을 제대로 된 입증이라고 볼 수는 없다. 포퍼가 “No more than that a case could be interpreted in the light of a theory”라고 썼듯이 그것은 어떤 사례가 그럴 듯하게 해석될 수 있음을 뜻할 뿐이다. 문제의 핵심은 그 해석이 옳으냐 여부인데 프로이트는 그것을 검증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것이 내가 정신분석을 사이비과학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그런데 포퍼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아예 검증(또는 반증)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자신의 이론을 제대로 검증하지 못했다”라는 명제와는 독립적인 문제다. 프로이트(또는 다른 정신분석가들)가 프로이트의 이론들(또는 온갖 정신분석 이론들)을 제대로 검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제대로 검증했을 수도 있으며, 지금까지 아무로 검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미래에 누군가 할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상당히 명료하기 때문에 충분히 검증 또는 반증이 가능한 이론들을 많이 제시했다.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 따르면 남아 아이는 어렸을 때 엄마에게 강렬한 성욕을 품는다. 그리고 거세 공포 등 때문에 엄마에 대한 그런 성욕은 크면서 억압되어 무의식 속에 들어가게 된다.

 

 

 

성인에게 “당신은 엄마에게 강렬한 성욕을 품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거의) 모두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거짓말 탐지기를 써 봐도 “아니오”라는 답이 정직한 답변이라고 나올 것이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 대한 반증일까?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욕망이 무의식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의식에서는 쉽게 접근할 수 없다고 프로이트가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포퍼는 이런 점 때문에 프로이트의 이론이 반증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검증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성인의 뇌 회로를 몽땅 분석해서 어딘가에 “엄마에 대한 성욕 회로”가 있는지 살펴볼 수가 있다. 만약 어디에도 그런 회로가 없다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은 반증된 것이다. 현재의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물리학자가 어떤 이론을 제시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지구만큼이나 커다란 입자 가속기가 필요하다고 하자. 그렇게 큰 입자 가속기를 만드는 것은 현재로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일이며 따라서 그 물리학자의 이론은 이론적으로는 검증이 가능한 것이다.

 

포퍼도 당장 검증할 수 있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포퍼의 말을 보아도 명백하다.

 

I may perhaps exemplify this with the help of the various theories so far mentioned. Einstein’s theory of gravitation clearly satisfied the criterion of falsifiability. Even if our measuring instruments at the time did not allow us to pronounce on the results of the tests with complete assurance, there was clearly a possibility of refuting the theory.

(Conjectures and Refutations, 48)

 

지금까지 언급한 여러 이론들의 도움으로 이 점을 구체적으로 예증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은 확실히 반증 가능성의 기준을 만족시켰다. 비록 당시의 측정 도구로는 자신 있게 그 이론에 대한 시험의 결과를 단언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그 이론을 논박할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히 있었다.

(『추측과 논박 1, 82~83)

 

 

 

프로이트에 따르면 아주 어렸을 때에는 엄마에 대한 성욕이 억압되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그런 어린 아이에 대한 관찰을 통해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한다면 “무의식에 들어갔기 때문에 의식에서는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식으로 프로이트가 빠져나갈 수 없다. 즉 검증하기가 어떤 면에서는 더 쉽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 대한 검증을 다른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다. 이 이론은 근친상간 회피에 대한 진화 심리학자들의 이론과 충돌한다. 진화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근친상간은 기형아 등으로 이어질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근친상간 회피 기제가 진화했다. 따라서 아들은 엄마에 대한 성욕을 품지 않도록 진화했다.

 

이 두 경쟁 가설 중 누가 옳은지를 가릴 수 있는 수 많은 방법이 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과 뉴턴의 이론을 가리는 실험처럼 대단히 명확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여러 가지 방법이 있긴 하다.

 

예컨대 인간과 가까운 종들을 연구하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수 많은 연구를 통해 사실상 모든 포유류 종에서 엄마와 아들은 성교를 사실상 하지 않는다는 점이 밝혀졌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기 힘든 종의 경우에는 딸이 사춘기가 되면 다른 무리로 이동하는 방식 등으로 아버지-딸 근친상간을 피한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근친상간 회피 가설에 대한 상당히 그럴 듯한 증거들을 모았다. 그런 증거들이 강력할수록 그만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이 반증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포퍼는 프로이트의 이론과 모순되는 인간 행동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The two psycho-analytic theories were in a different class. They were simply non-testable, irrefutable. There was no conceivable human behaviour which could contradict them. This does not mean that Freud and Adler were not seeing certain things correctly: I personally do not doubt that much of what they say is of considerable importance, and may well play its part one day in a psychological science which is testable. But it does mean that those ‘clinical observations’ which analysts naïvely believe confirm their theory cannot do this anymore than the daily confirmations which astrologers find in their practice. And as for Freud’s epic of the Ego, the Super-ego, and the Id, no substantially stronger claim to scientific status can be made for it than for Homer’s collected stories from Olympus. These theories describe some facts, but in the manner of myths. They contain most interesting psychological suggestions, but not in a testable form.

(Conjectures and Refutations, 49~50)

 

나머지 두 가지의 정신분석 이론은 다른 부류에 속한다. 그것들은 완전히 시험 불가능하며 논박 불가능하다. 그 이론들과 모순될 수 있는 어떠한 인간 행위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이것은 프로이트와 아들러가 어떤 것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그들의 주장 중 많은 부분이 상당한 중요성을 갖고 있으며, 언젠가는 시험 가능한 심리학에서 제구실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분석가들이 소박하게도 자신들의 이론을 입증해 준다고 믿고 있는 <임상 관찰>은 점성가들이 행하는 일상적인 입증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다. 또한 프로이트의 자아, 초자아, 이드에 대한 서사시적인 작품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이 실제로 올림포스 신화에서 수집한 호메로스의 이야기 이상의 어떤 과학적인 지위를 갖는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이 이론들은 어떤 사실들을 기술하고는 있지만, 신화 형식으로 된 기술이다. 또한 매우 흥미로운 심리학적인 제안을 포함하고 있지만, 시험 가능한 형식으로 되어 있지는 않다.

(『추측과 논박 1, 83~85)

 

 

 

포퍼는 행동의 수준에서만 검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위에서 나는 뇌 회로의 수준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쩌면 근친상간 회피와 관련된 생리적 기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포퍼는 인간의 어떤 행동이라도 프로이트의 개념들과 이론들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 같다. 하지만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이것은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한 검증과는 별개의 문제다. 인간의 어떤 행동이라도 프로이트가 자신의 개념들과 이론들을 들먹이며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프로이트가 그런 해석이 바로 입증이라고 우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만약 프로이트의 이론들 중 적어도 일부가 충분히 명료한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면 그 이론들을 검증할 수 있다.

 

이런 시나리오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들 중 일부는 검증 가능한 명제들이다. 그리고 다른 일부는 어떤 인간 행동도 해석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이론들을 전체적으로 보면 반증이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포퍼는 “much of what they say is of considerable importance, and may well play its part one day in a psychological science which is testable”라고 이야기했다. 만약 프로이트의 이론이 반증이 아예 불가능할 정도로 애매모호하다면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미래 심리학에서 중대한 역할을 차지할 정도로 대단한 통찰일 수 있을까?

 

 

 

포퍼는 정신분석가의 말이 환자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이론이 반증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도 한다.

 

Clinical observations,’ like all other observations, are interpretations in the light of theories(see below, sections iv ff.); and for this reason alone they are apt to seem to support those theories in the light of which they were interpreted. But real support can be obtained only from observations undertaken as tests (by ‘attempted refutations’); and for this purpose criteria of refutation have to be laid down beforehand: it must be agreed which observable situations, if actually observed, mean that the theory is refuted. But what kind of clinical responses would refute to the satisfaction of the analyst not merely a particular analytic diagnosis but psycho-analysis itself? And have such criteria ever been discussed or agreed upon by analysts? Is there not, on the contrary, a whole family of analytic concepts, such as ‘ambivalence’ (I do not suggest that there is no such thing as ambivalence), which would make it difficult, if not impossible, to agree upon such criteria? Moreover, how much headway has been made in investigating the question of the extent to which the (conscious or unconscious) expectations and theories held by the analyst influence the ‘clinical responses’ of the patient? (To say nothing about the conscious attempts to influence the patient by proposing interpretations to him, etc.) Years ago I introduced the term ‘Oedipus effect’ to describe the influence of a theory or expectation or prediction upon the event which it predicts or describes: it will be remembered that the causal chain leading to Oedipus’ parricide was started by the oracle’s prediction of this event. This is a characteristic and recurrent theme of such myths, but one which seems to have failed to attract the interest of the analysts, perhaps not accidentally. (The problem of confirmatory dreams suggested by the analyst is discussed by Freud, for example in Gesammelte Schriften, III, 1925, where he says on p. 314: ‘If anybody asserts that most of the dreams which can be utilized in an analysis ... owe their origin to [the analyst’s] suggestion, then no objection can be made from the point of view of analytic theory. Yet there is nothing in this fact’, he surprisingly adds, ‘which would detract from the reliability of our results.’)

(Conjectures and Refutations, 49~50, 3)

 

<임상 관찰>이라는 것은, 다른 모든 관찰과 마찬가지로, 이론에 의한 해석이다(본장의 4절 이하 참조). 이 이유만 가지고서는 그러한 관찰이 관찰을 해석하는 이론을 지지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쉽다. 그러나 실질적인 지지는 시험을 통한 관찰(<논박의 시도>)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서는, 논박의 기준을 미리 설정해야 한다. , 어떠한 관찰 가능한 사태를 실제로 관찰했을 때, 이론이 논박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임상 반응 사례가, 정신분석학자가 만족할 수 있도록, 특수한 진단뿐 아니라 정신분석 자체도 논박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와 같은 논박의 기준을 정신분석학자들이 단 한번이라도 논의하거나 의견의 일치를 본 적이 있을까오히려 <반대 감정 병존ambivalence> 같은 일군의 정신분석 용어가 있어(반대 감정 병존이라는 것이 없다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그것이 그런 기준에 대해 합의하는 것을—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을지라도—어렵게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정신분석학자가 지니고 있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기대나 이론이 환자의 <임상 반응>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치는가를 얼마나 문제시해 왔을까? (환자에게 그 반응을 해석게 함으로써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의식적인 시도에 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오래전에 나는 이론이나 기대나 예측 같은 것이 그들이 예측하고 기술하고 있는 사건에 미치는 영향을 표현하기 위해, <오이디푸스 효과>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오이디푸스 왕이 아버지를 살해하게 되는 인과의 사슬이, 신탁에 의한 이 사건의 예언에서 비롯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러한 신화에서 특히 자주 반복되는 주제이지만, 정신분석학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정신분석학자가 말하는 꿈에 의한 확인 문제에 대해서는, 프로이트가 그의 『전집Gesammelte Schriften3(1925), 314쪽에서 논하고 있다. <분석에 도웅을 줄 수 있는 꿈의 대부분이 ......  그 기원을 [분석자의] 암시에 힘입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신분석 이론의 관점에서는 반대할 수 없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 때문에 우리 결과의 신빙성이 줄어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실험을 할 때 실험자의 행동이 실험 결과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경우가 있나? 양자역학의 시대가 되면서 수동적인 관찰 행위로 보였던 것조차도 결과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드러났다.

 

실험자 또는 정신분석가의 행동 또는 말이 결과에 영향을 끼친다고 해서 반증 불가능해진다면 세상의 모든 실험이 무의미할 것이다. 문제는 그런 영향을 어떻게 잘 이해하고 통제하느냐에 달려 있다. 프로이트는 그런 영향을 잘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에 “which would detract from the reliability of our results”라고 말한 것이다. 시비를 걸려면 “프로이트가 과연 그런 영향을 잘 이해하고 통제했는가?”라고 해야지 정신분석가의 말이 환자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반증 불가능해진다고 말하면 안 된다.

 

 

 

정신분석의 경우에도 점성술과 마찬가지로 핵심적인 문제점은 가설이 너무 애매해서 검증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지 않다. 정신분석과 점성술이 사이비과학인 주된 이유는 그들이 검증을 개판으로 하며 반증될 때에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마지막으로 오이디푸스 이론과 관련하여 한 마디만 더 하겠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이에 수반하는 거세 공포 때문에 도덕성이 발달한다. 하지만 진화 심리학자들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만 1세도 안 된 아기들도 상당한 정도의 도덕성을 보인다. 이것은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또 다른 반증이다.

 

To find out, we tested 8-month-olds by first showing them a character who acted as a helper (for instance, helping a puppet trying to open a box) and then presenting a scene in which this helper was the target of a good action by one puppet and a bad action by another puppet. Then we got the babies to choose between these two puppets. That is, they had to choose between a puppet who rewarded a good guy versus a puppet who punished a good guy. Likewise, we showed them a character who acted as a hinderer (for example, keeping a puppet from opening a box) and then had them choose between a puppet who rewarded the bad guy versus one who punished the bad guy.

 

The results were striking. When the target of the action was itself a good guy, babies preferred the puppet who was nice to it. This alone wasn’t very surprising, given that the other studies found an overall preference among babies for those who act nicely. What was more interesting was what happened when they watched the bad guy being rewarded or punished. Here they chose the punisher. Despite their overall preference for good actors over bad, then, babies are drawn to bad actors when those actors are punishing bad behavior.

(The Moral Life of Babies

By PAUL BLOOM

Published: May 5, 2010

http://www.nytimes.com/2010/05/09/magazine/09babies-t.html?pagewanted=all)

 

 

 

이덕하

2012-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