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퍼는 “falsification”과 “refutation”을 사실상 동의어로 쓰는 것 같다. falsification”은 보통 “반증”으로 번역한다. 이한구는 “refutation”을 “논박”으로 번역했다. 이 글에서 나는 그냥 “반증”이라는 단어를 쓰겠다.

 

But real support can be obtained only from observations undertaken as tests (by ‘attempted refutations’); and for this purpose criteria of refutation have to be laid down beforehand; it must be agreed which observable situations, if actually observed, mean that the theory is refuted.

(Conjectures and Refutations, 49, 3)

 

그러나 실질적인 지지는 시험을 통한 관찰(<논박의 시도>)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서는, 논박의 기준을 미리 설정해야 한다. , 어떠한 관찰 가능한 사태를 실제로 관찰했을 때, 이론이 논박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되어야 한다.

(『추측과 논박 1, 84, 3)

 

 

 

포퍼는 관찰 또는 실험 전에 반증 기준을 미리 정해야 관찰 또는 실험이 증거로서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말은 정말 황당하다.

 

나도 포퍼가 어떤 것을 우려하는지 잘 알고 있다. 관찰 또는 실험이 이론과 잘 들어맞지 않을 때 이론을 수정하거나 가정을 삽입하거나 중간 이론을 삽입하거나 해서 임시방편적으로 땜빵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천동설이 그런 임시방편적 땜빵의 역사를 겪었다. 관찰 결과와 모델이 어긋날 때마다 주전원 같은 원을 추가하는 식이었다.

 

 

 

포퍼가 좋아하는 예를 살펴보자. 에딩턴(Arthur Eddington) 1919년 일식 때 태양 주변의 별자리를 관찰하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검증했다. 이 관찰로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http://en.wikipedia.org/wiki/Solar_eclipse_of_May_29,_1919

 

아인슈타인은 1916년에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으며 에딩턴은 일반 상대성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일식 때 태양 주변 별자리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기 전에 어떤 사진이 나오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뉴턴의 이론을 누르고 승리할지에 대해 물리학자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 포퍼가 보기에 아주 이상적인 검증 과정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반증의 기준을 미리 정하는 것이 결정적이었을까? 아니다.

 

이런 시나리오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916년 이전에 어떤 돈 많은 사람이 일식 때 태양 근처의 별자리 사진을 취미로 찍었다고 하자. 그런데 돈이 매우 많아서 엄청 비싼 장비로 매우 정밀한 사진을 찍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사진을 보니 뉴턴의 이론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더 부합한다고 하자.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증거로 쓰일 수 없나?

 

나는 심지어 아인슈타인이 1916년에 논문을 발표하기 전에 그 별자리 사진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 별자리 사진이 증거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은 에딩턴이 인상 깊게 검증하기 전부터 일반 상대성 이론이 옳다고 거의 100% 확신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 이론이 아인슈타인이 보기에 매우 우아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우아함을 느낀 이유에는 이론의 단순성(simplicity)도 한 몫 한 것 같다.

 

여기서 단순성은 이해하기 쉽다는 뜻이 아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일반인이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과학자들은 훌륭한 과학 이론의 특징 중 하나로 단순성을 꼽는데 이것은 천동설의 복잡성과 대비되는 말이다. 천동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주전원 같은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서 매우 복잡해졌다.

 

 

 

관찰이나 실험이 이론 발표 이전에 이루어졌는지 이후에 이루어졌는지 여부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반증 기준을 언제 설정했는지도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설사 관찰이나 실험이 이론 발표보다 먼저 이루어졌어도, 반증 기준에 대한 논의가 이론이 발표되고 관찰이나 실험이 이루어진 이후에 이루어졌어도 만약 이론이 충분히 단순하고 반증 기준이 충분히 설득력 있다면 그 관찰이나 실험이 증거로 인정될 수 있다.

 

많은 과학 철학자들이 단순성을 중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해당 분야의 전문가라면 어떤 이론이 덕지덕지 군더더기가 붙어서 지저분하게 복잡한지 아니면 단순하고 우아한지 여부에 대해서 관찰이나 실험이 이루어지기 이전에든 이후에든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이덕하

2012-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