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지도 제작에 바쳤다는 김정호가 지도 제작을 위하여 전국을 답사했다는데 실제 그랬을까?"에 대하여는 학자들 간에 논란이 되어온지 오래였던 모양이다. 나는 이 사실을 minue622님의 쪽글을 보고서야 예전에 한번 그런 주장을 접했던 기억이 났는데 독도 논쟁이 아닌, 전혀 다른 논쟁이었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당시에는 그냥 넘어갔다가 minue622님 쪽글을 보고서야 검색을 해보았다. 그리고 김정호의 지도 제작 여부에 대한 논란의 주요 내용을 참조 1*에 올린다.


그리고 지도를 검색해 보았다. 참조 2*의 지도 중 왼쪽은 성호 이익의 제자이며 실학자인 정상기의 지도이고 오른쪽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이다. 그 지도 두 개에서 각각 울릉도 부군을 발췌하고 비교하기 위하여 대동여지도의 남해안을 따로 발췌하여 올린다.



지도 비교2.gif

<위의 그림 중 상단 왼쪽은 정상기의 지도에서 울릉도 부근의 지도를 발췌한 것이고 상단 오른쪽은 대동여지도 중 울릉도 부근을 발췌한 것이다.
위의 그림 중 하단은 대동여지도의 남해안을 발췌한 것이다. 제작 연도는 정상기가 1750년, 대동여지도가 1850년.... 100년 차이로 대동여지도가 백년 뒤에 제작되었다>

 

1) 정상기의 지도에는 울릉도 옆에 섬 하나가 있다.

이 것을 일단 죽도라고 하자. 죽도는 울릉도에서 2KM 밖에 안떨어져 있으니까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도로는 특별한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정상기는 지도 작성을 위하여 김정호처럼 전국을 다니지 않았다. 죽도라고 해도, 내가 이미 설명한, 과거의 울릉도 지도가 180도 바뀌어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 의문만이 남을 뿐이다.(이 글에서 축척, 방위 등의 개념은 뺀다. 논점은 김정호가 울릉도를 갔을까?의 여부이니 말이다.)


 

만일, 울릉도 옆의 섬이 죽도가 아니라 독도라고 하면 의문은 다소 풀린다. 왜냐하면, 비록 정책에 의하여 사람은 살지 않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군인들은 없었을 것이고 고기잡는 어부들은 더욱 더 자유롭게 울릉도와 독도를 돌아다녔기 때문에 위치에 대한 정보는 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 국민들을 탄압하려는 의도로 경찰이 많았다가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경찰 숫자가 적어지면서 오히려 범죄는 급증한 이유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지리에 대한 개념은 여전히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인용한 발해1300호의 실험에서 그렇고 현대에서 외국인들이 '한국 사람들은 길안내를 엉터리로 한다'라는 불평과 맞닿아 있다. 물론, 그렇다고 저 섬이 독도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거리에 관한 한, 지도 제작기술과 함께 별로 신뢰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특히, 저 시대에는 말이다.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독도는 역사 논쟁이 아니다. 문화 논쟁이다. 현시대의 시점으로, 그 때의 일을 들여다보면 안된다. 내가 임진왜란에서 한양을 점령한 왜구들이 전쟁 중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꽤 오랜 기간 동안 머물러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조선과 왜구의 전쟁문화의 차이(비록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는 부분이지만)에서 온 것이라는 설명을 한 이유이다.


 

과거에, 현대에 비하여 확실히 뒤떨어진 측량, 항해술, 이동수단, 지도 제작 등의 기술이 떨어진 시점에 기록된 것을(고지도에서 오죽하면 울릉도가 180도 바뀌어 제작되었을까?) 현대 시점을 가지고 해석한다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나마 좀 정성을 들여서 해석한 것이라면 쳐다는 보아주겠는데 말이다.



 

가독성(readibility)을 위해 위의 그림을  아래에 다시 복사하여 넣는다. 

지도 비교2.gif
 

 

1) 상단 왼쪽 정상기의 지도에서 울릉도의 왼쪽에 있는 섬이 죽도라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상단 오른쪽의 대동여지도에서는 울릉도 옆에 섬이 없다. 단지, (원본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탓에) 빨간 원 부분에 섬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을 뿐이다.
 

2) 대동여지도의 빨간 원부분이 섬이 아닌 경우 : 2KM밖에 안떨어져 있는, 정상기조차 그린 죽도를 왜 김정호는 그리지 못했을까?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보아 울릉도 지도를 제작하려면 며칠은 섬에 있었을 것이고 망망대해의 울릉도의 기상변화가 무쌍하다고 가정해도 최소한 한번쯤은 죽도를 보았을 것이다. 이는 김정호가 울릉도를 방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논란의 한 증거물이다. (물론, 이 지도를 제작하기 위한 상세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 상으로는 검색이 되지 않고 원본은 동경대학에 가있다고 한다.)

3) 대동여지도의 빨간 원부분이 섬인 경우에는 죽도 또는 울릉도 부근의 다른 섬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내가 고지도의 울릉도가 180도 바뀐 것을 설명하면서 말했던 당시 방위 기준점을 삼을만한 곳이 울릉도에서는 없었다, 그래서 방위를 헷갈린 탓이다...라고 한 설명과 같은 방위의 착각을 김정호도 지도를 제작하면서 방위 착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남해안 지도와 비교해보면 울릉도 부근의 '무늬'가 '섬'이라고 판단될만한 흔적들이 여러군데 있다.


 

대동여지도의 울릉도 부근의 빨간색 점이 섬인 경우에는 방위에 대한 혼선을, 그리고 섬이 아닌 경우에는 고지도의 우산도가 독도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가진다. 어느 쪽이든 대동여지도가 당시 기술로는 참 잘 만들어진 지도이지만 그가 실제 전국을 답사하지는 않았을 것(일부 필요한 경우는 부분적으로 답사를 했을 경우도 있다)이라는 것과 대동여지도로 고지도의 우산도가 독도인지 아닌지를 논증하는 근거로는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논쟁을, 그 것도 불확실한 것들을 가지고 논쟁할 때는 제한적이나마 철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런데 김정호 위인전의 내용을 언급하자 상대방 논자가 그 위인전의 내용에 신빙성이 의심간다고 하니까 이제는 조상을 모독한다....... 뭐, 이런 헛소리를 하는 측은 언급의 가치도 없으니까 제외하겠다.


 

내가 오히려 탓하고자 하는 것은 그 일고의 가치도 없는 논자의 상대방 논자이다. 이 '상대방 논자'는 논리력에 있어 최소한 나보다는 낫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일본어를 독해할 수 있고 제한적이지만 한문도 독해가 가능하다.


 

그런데 지도만 실제로 검토해보았으면 내가 위에서 설명한 논리 이상으로 더 잘 설명했을 것이다. 내가 '문자에 매달려서는 독도 논쟁은 끝이 없다'고 몇 번 충고했는데 반복.... 이 '상대방 논자'는 최소한 내가 보기에 아크로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독도논쟁에 참여할 자격의 '최소한의 여건'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혹여 다음에 독도 논쟁에 참여할 기회가 있으면 진실이 어느 쪽이든 인터넷에 널리 알려진 헛소리들(우리 편을 들건, 일본편을 들건)을 타파하는데 기여를 해달라는 부탁을 감히 해본다.

 

因亂果難獨島論爭.. 어지러워서 어려워진 독도 논쟁......에서 그 '상대방 논자'가 亂을 좀 줄이는데 기여하라는 의미로 한자문장을 남기면서 글을 마친다.

 


 

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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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여지학을좋아하여깊이고찰하고널리수집하여……『( 이향견문록』)


b) 김정호는 어려서부터 지도와 지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오랜 세월 동안 찾고 살펴 여러 도법에상세히알아매번조용한시간에간편한비람식을확실히얻어……「( 청구도제문」)


 

c)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비변사나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나 옛날 집에 좀먹다 남은 지도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증거로 삼고 여러 지도를 서로 대조하고 여러 지리지 등을 참고하여 하나의 완벽한 지도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나는이작업을김백원(金百源)에게위촉하여완성하였다. 「( 대동방여도서문」)

 

가)는 유재건이, 나)는 최한기가, 다)는 신헌이 쓴 기록들이다. 이 세 사람은 김정호와는 같은 시기에 활약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김정호가 전국을 두루 답사하였다고 지적한 사람은 없다. 세 사람 모두 오로지 기존의 지도들을 두루 모아 좋은 점을 따서 집대성시켰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이 김정호는 유재건이 지적한 것처럼“깊이 고찰하고 널리 자료를 수집”했거나, 최한기가 말한 것처럼“오랜 세월 동안 자료를 찾고 수집 열람”했으며, 신헌이 말한 대로“광범위하게수집하여증거로삼거나”,“ 여러지도들을상호비교”하여,『 청구도』나『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의심나는 곳은 직접 답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방동인의 지적처럼 단빌은 프랑스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지만 당시로는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방동인, 1985).


⑥ 김정호의 옥사설

 

김정호 옥사설(獄死說)은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이 옥사설을 강력히 부인한 이병도는 그 근거로 여러 가지를 들었다. 김정호가 만든 지도나 지지 어느 것 하나 몰수당하거나 압수당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이병도, 1971). 필자도 옥사설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고종실록』·『승정원일기』·『추국안』등을 검토해 보았지만 그러한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김정호의 옥사설이 허위라는 근거를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김정호가 만든 지도나 편찬한 지지가 하나도 손상당하지 않은 채 고스란히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는 점이다(京城帝大, 1925).

 

둘째, 국가기밀을 누설할 가능성이 있으므로『대동여지도』의 판목을 압수하여 소각했다고 했는데 현재에도『대동여지도』판목 1매가 숭실대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또 1931년의 경성대『고도서전관목록』에 의하면 판목 2매가 당시 전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출품을 꺼리는 일본인이 수십 매를 비장하고 있다고 하였다. 김양선도『대동여지도』판목을 소유하고 있었으며(김양선,1960), 최성환 후손들의 증언에도『대동여지도』판목들이 남아있었다13)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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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2)



 


정상기의 지도.gif
김정호의 지도.gif
(아래는 대동여지도)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