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박이 심해서 그림을 여러장 올리는 것이 쉽지 않고 그림을 올려도 표시가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작성중)이라고 글머리에 쓰는데 이미 보신 분들이 '변경사항 있나?'라고 다시 클릭하시지 않도록 변경되는 경우, (작성중 1...2...3... )등으로 숫자를 매깁니다. 그리고 좀 바빠서 죽도와 울릉도의 위치가 바뀐 이유는 두가지로 나뉘어지는데 1. 바뀐 이유와 2.바뀐 이유에 대한 결과의 타당성 중 두가지로 나뉘에 설명이 필요한데 1. 바뀐 이유를 묘사하려면 상당히 많은 자료 작성이 요구되므로 시간이 허락하면 이 포스팅에 함께 올리고 그렇지 않으면 다음 포스팅에 올리겠습니다.)


 

일단 질문 하나, 여러분이 전쟁 중의 적과 대치해 있는 부대의 지휘자라면 님은 어떤 것부터 준비할까요? 바로 적군에의 침투로 확보 및 적군의 진지 배치도부터 먼저 작성할 것입니다. 팔도총도에 얽힌 비밀은, 바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중요한 준비물의 하나였다는 것으로 저 역시 확실히 고증이 안되어서 '그렇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의심이 가는 부분이라 따로 기록합니다.


 

 

한반도를 그린 지도 중에서 '팔도총도'라고 이름 붙여진 것은 두 개가 존재합니다. 첫번째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첫머리에 나오는 '팔도총도'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조선침략을 위해 제작한 '팔도총도' 두가지입니다. 아래 [그림1]에 두 개의 팔도총도를 나란히 올려놓습니다.


팔도총도-조선판과 일본판.gif


 그런데 일본판 팔도총도는 원본은 존재하지 않고 1872년에 다시 제작된 것입니다. 일본판 팔도총도는 대마도가 우리 땅임을 (또는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로 활용되는데 독도분쟁과 관련되어 이슈가 되면 반드시 거론되는 지도입니다. 일본판 팔도총도가 조선판 팔도총도와 다른 점은 대마도를 그렸다는 것입니다. 대마도는 논의 사항이 아니므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마도를 조선의 땅으로 인식했건 일본의 땅으로 인식했건 바다로 나뉘어진 본진과 침략경로에서 전쟁 초반 병참기지로 활용하고자  지도에 그린 것일겁니다.


 

그런데 전쟁능력이 뛰어나 오랜 내전을 극복하고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침투로를 일본본토 --> 대마도 --> 조선 부산진 이렇게 하나만 판단했을까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의 팔도총도를 제작하기 위하여 수군으로서 활약한 명장,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이순신 장군에게 안골포 해전에서 대패한 장수가 바로 이 장수입니다.)에게 지시를 내린 것은 당연한 것이고 팔도총도는 전쟁을 하기 위하여 선택할 침입경로지 및 침략지에서 거점을 확보했을 경우에 다음 침략목적지를 결정하기 위한 관점에서 제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육로를 통해 침략지로 가는 것보다 병참, 배멀미 등 군인들의 건강 등 변수가 많은 해상을 통한 침략에서 단 하나만의 침투지를 판단했을까요? 아래 그림은 해상침투로로 두가지가 있음을 그린 것입니다. 거리로는 독도-->울릉도-->조선동해안이 훨씬 멀지만 당시 조선의 병력 배치와 조선과 일본의 전쟁 문화를 고려하면 독도를 경유지로 하는 침략경로가 타당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제 침략 결로가 어떻게 되었건 지도 제작을 지시받은 구키 요시타카 입장에서는 침투로를 다양화 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부 기록들에서는 구키 요시타카가 히데요시의 친구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실제 구키 요시타카가 친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 위키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織田信長や豊臣秀吉のお抱え水軍として活躍し、3万5,000石の禄を得た....................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용병수군으로서 활약해서...)
(출처 : http://ja.wikipedia.org/wiki/%E4%B9%9D%E9%AC%BC%E5%98%89%E9%9A%86)


 

친구는 물론 최측근인 경우에도 전쟁에서 패한 경우 추궁을 받는데 하물며 용병수군이었던 구키 요시타카는 침투로를 다각도로 할 필요가 있었겠죠. 최종 침투로는 히데요시가 결정할 것이지만 말입니다.



왜군의 해상침투로.gif




 

독도를 경유하는 침략 경로는 크게 두가지 첫번째는 당시 조선 부산진에 배치된 전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단지, 왜군의 모습을 본 경상좌수사 박홍은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른 뒤 도망쳤고 경상우수사 원균도 부하에게 우수영을 맡겨 놓고 도망쳤다.(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B%B6%80%EC%82%B0%EC%A7%84_%EC%A0%84%ED%88%AC)"는 어처구니 없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그 후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지만 말입니다.





독도를 경유지로 하는 침략지를 예상하는 두번째 이유는 바로 전쟁문화의 차이입니다. 한중일의 역사를 보면 한국과 중국은 적국의 임금을 잡아 죽이는 것으로 전쟁의 승리를 가늠합니다. 반면에 일본은 각 영주의 생사여부와 괸계없이 성을 점령하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간주했습니다. 실제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신의주로 몽진을 하고 왜구가 조선의 수도 한양을 점령한 후 한참을 움직이지 않은 이유가 (비록 국내 역사학자 간들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바로 당시 왜군의 장수들이 일본에서의 전쟁의 승리와 같은 개념인 '도성 함락'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독도를 경유하여 조선의 수도 한양을 함락하는 것은 비록 해상의 이동 거리가 길지만 부산진을 통해 침략하는 것보더 전쟁을 초기에 끝낼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선택 가능한 침력 경로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독도와 울릉도의 정확한 위치를 기록하는 것이 요시타카가 당연히 했을 것입니다.


 

물론, 저의 침략 경로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없습니다. 제가 판단하여 추리한 것인데 실제 독도와 울릉도가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는 원본이 없는 이상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일반적으로 군사 침략 경로를 기술하는 것이니 당시 일반용 지도보다 특정 부분이 더 강조되었거나 필요없는 부분이 생략이 되었을겁니다. 즉, 침략경로에서 군의 진로를 방해하는 강이나 산들은 더 자세히 그렸을 것이고 또한 특정 지대를 점령했을 때 군량미 등을 현지조달할 수 있는 부분 역시 강조해서 그렸을겁니다.


 

그런데 일본판 팔도총도는 조선판과 비교하여 대마도를 기록했다는 점 이외에 특별히 다른 부분이 없다는 것이 좀 의아합니다. 문제는 울릉도 부분의 지도입니다. 이 부분은 아무리 당시의 지도 제작 기술을 감안해도 독도가 없는 것은 그렇다 쳐도 죽도로 보이는(일단 편의상 그렇게 부릅니다.) 섬과 울릉도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일반인이 제작한 지도보다 더 정확할 특히 해상에서의 지도(당시 일본의 전쟁이 대부분 육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감안해도)가 조선의 지도와 같다는 것은 상당히 의문점입니다. 특히, 불과 7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기록된  은주시청합기(1667년)에서는 거리도 비교적 정확한 기록이 나옵니다.



自子至卯、無可往地、戍亥間行二日一夜有松島、又一日程有竹島 (송도까지는 이틀 반, 거기서 죽도까지는 하루...)
(여행한 후의 기록임)


 

70년 전의 위치마저 바뀐 지도와 70년 후의 거리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적힌 기록............ 저런 기록의 차이는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들이 불과 70년 만에 정확도가 눈에 띄게 좋아졌을까요? 물론, 전쟁은 문화를 발달시키기는 합니다만 지도 제작 기술에 있어서 과연 획기적으로 발전이 있었을까요? 일본의 지도 제작 발달사를 확인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데 과연 70여년 정도로 그 것도 자기네 영토가 아닌(브록 조선에서는 무주지로 분류하였지만) 지역까지 그렇게 상세하게 위치를 알 수 있었을까요?


 

이 부분은 자료가 없어 뭐라하지 못하겠는데 간접적으로 판단할 자료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것은, 임진왜란, 특히 17세기를 기점으로 조선과 일본의 산업문화가 역전되기 시작했다는 통계자료입니다. 당시 산업문화의 발달 정도의 척도가 되는 철광 샌산량에 있어 17세기 들어 일본은 유럽에서 내는 통계에 포함이 되었다는 것으로 미루어(강철구 이대교수 블로그에서 참조) 일본의 산업문화가 임진왜란 후 상당히 발달되었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제가 의심을 하는 부분은 다른데 있습니다. 히데요시가 작성한 팔도총람의 원본은 없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1872년 재제작된 것입니다.


 

1872년................................. 그 전후로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바로 쿠테타로 일본을 점령한 메이지 정권이 정권 초반부터 정한론을 주창했고 1869년에 조사사항으로 지령한 <竹島松島朝鮮附屬二相成候始末>라는 기록입니다.


 

조선이 무주지로 남겨놓은 울릉도와 독도................. 히데요시가 제작한 팔도총람의 원본은 없고 1869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령인 이유를 내사하라'는 기록........... 그리고 3년 후인 1872년 다시 제작된 팔도총람........................... 조선본과 아주 유사한, 침략 경로를 작성하기 위하여 만들었다고는 보기 힘든 지도.........


 

더 이상의 자료를 찾지 못해서 '그렇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호소카 세종대 독도 연구소 소장이 '이 문서와 관련하여 숨긴 문서가 있다'는 주장을 판단해 보면 독도의 진실은 사라진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제작한 '팔도총도'의 역사적 맥락을 추적하면 '어느 쪽일까?'하는, 그러니까 독도의 소유권이 조선이던 과거 일본이던 지금의 논란을 상당부분 불식시킬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입니다.


 

당연히, 제가 다시 시간이 나서 독도 연구를 하게 되면 이 부분을 추적해 나갈 것이고요. 시간이 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지금은 한국현대사 연구에 푹 빠져서.... 나중에 은퇴하면 진행해 보아야지요.


 

덧글)코블렌츠님이 독도가 일본의 것이 맞다고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면?이라는 질문을 남기셨는데요 그렇다면 당연히 돌려줘야지요. 부당하게 남의 나라 것 가지고 있는거...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당연히, 정치역학 상 실제로 돌려줄 수는 없을겁니다. 그러나 민간차원에서는 반환운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양심을 속여서 국민들을 폭주하여 큰 비극을 만들어낸........ 히틀러 시대의 지식인들의 침묵이라는 역사적 비극은 다시 되풀이 되어서는 안되니 말입니다.


 


 

다음 편은 먼저 설명한, 울응도 지도가 180도 바뀌고 그로 인하여 생기는 독도의 위치에 대하여 이 글 초두에 설명한 순서대로 설명드립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