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과학 게시판
과학의 발달 그리고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 포스트 모더니즘등으로 시작한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바람에 휩쓸려 많은 일반인들은 물론 기독교인들조차도 무신론자들의 논리에 설득을 당하거나 아니면 그럴듯한 타협책을 가지고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담론의 한 귀퉁이라도 차지하려는 몸부림이 처량하다
그러나 나는 말로는 과학이 절대적이라고 하지 않으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인간 이성과 과학의 절대성을 믿으면서 그리고 과학은 종교를 공격하지 않는다면서 두 가지를 대립의 관계로 보고 종교를 미신과 어리석음 그리고 비과학적인 시대의 뒤떨어진 산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널려있는 이 시대에서 과학과 관계없이 하나님은 존재하고 섭리하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과학의 발전이나 발견이 나의 신앙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심지어 우주인이 나타난다고해도 나의 신앙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잘 잊어먹는다
이미 1차 2차 세계 대전으로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는 무참하게 무너졌는데도 아직도 인간이성과 과학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으려는 도킨스 같은 우물안 개구리와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볼 때 실로 안스럽기 짝이 없지만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그들의 공격에 무너져 아부하며 굴복하여 추종하면서 하나님을 타자화 시키고 객관화 시키려는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이다
하나님이 타자화되고 객관화 될 수 있는 존재인가?
하나님체험은 객관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문제인가?
타자화된 하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그런 하나님의 존재는 있으나 마나이며 믿을 필요도 없다.
그래서 유럽의 교회가 저모양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곳의 진보적 무신론자나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사람들의 신앙을 열린 사고요 진보적이요 깨어있는 기독교인들 앞서가는 기독교인들로 칭찬을 하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는 소치에서 나오는 현상이다
신앙은 키엘케고르의 말 처럼 고독한 단독자로서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이다
이미 과학이나 이성이 발달하기 오래전 기독교 포교 초기에도 많은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기독교 신앙을 공격해왔다
그러면 기독교가 2천년을 이어온 그 힘이 그 공격에 논리적으로 정합성을 갖추고 설득력을 지녔기에 있다고 보시는가?
아니다
이미 기독교는 옛날에도 지금에도 허점투성이다
성경 자체에 과거에도 지금도 수용하기 어려운 도덕적 문제와 기적의 문제가 산적해있다
과거 사람들이 과학적 지식이 부족해서 권력으로 눌러서 무지해서 신앙을 가졌다고 본다면 아직 더 배워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나타나며 나의 인생 나의 선택 나의 존재와 연관되어 내 영혼에 존재한다
하나님은 초월하시는 하나님으로 과학과 시대와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초월하신 분이다
이 초월의 세계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들이 신앙을 운운하는 것은 서울 가보지도 않은 사람이 남대문 문턱이 있다 없다라고 떠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근본적으로 신앙자체에 대한 공격은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한 것을 공격하는 사람은 풍차를 향해 로시난테를 타고 돌진하는 돈키호테인 것이다
다만 그들이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인들에 국한할 뿐이고 그들의 행동이 그 시대의 도덕에 어긋날때 한해서일 뿐이다
"타자화된 신을 통해 이성과 신앙을 억지로 조화시키려는 노력"이 안스럽고 딱하다는데는 동의하지만 그들의 그런 노력마저 무시하고 까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흐강님이 바라는 보수적인 신앙으로 복귀되기보다는 아예 대놓고 무신론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으로 보이네요... ^^
이 글, 이제야 읽었는데, 저는 기독교신자는 아니지만, 이 말,
"기본적으로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나타나며 나의 인생 나의 선택 나의 존재와 연관되어 내 영혼에 존재한다"
이게 무척 감동적으로 들리네요.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 제가 기독교 신자인 친구들에게 하는 농담이 그건데, "너야 하나님 빽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늘 생각하는건데, 좀 다른 거 같아요. 살아가는 힘이. 어떤 경우에는 부정적으로, 어떤 경우에는 긍정적으로.. "상식"을 넘어서는 생활을 하는 힘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이 "만남"을 하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경우는,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기어이 하는 경우이고, 긍정적인 경우는,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노력이 정말 최선을 넘어서는 최선을 하는 힘이 나는 경우..)
우울증 환자들을 이 "신앙"으로 고칠 수는 없는건지 궁금해지던데.. 우울증 환자들을 치료할 때, 약물과 병행해서 세라피를 대개 하는데, 이 때 기독교로 세라피하는 방법..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무슨 방법은 없는지..
하킴님
세상 모든 것이 그렇지만 ( 돈 ,지식 명예등등) 신앙 역시 양날의 칼이 될 수 있지요
신앙이 우울증에 도움이 되는가? 라는 물음역시 기본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독이 되기도 하지요
특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주 도움이 됩니다
반면 이미 신앙이 있는 사람이 우을증에 걸릴때 효과는 반감이 됩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신앙을 통해서 의미를 발견하거나 신을 신뢰하고 섭리를 믿고 희망을 가지면 우을증을 극복할 수 있지만
당사자가 신이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하거나 신에게 실망하거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상처를 받으면 ( 하나님께 상처 받은 사람들이 너무 많지요, 어쩌면 도킨스도 과거에 받은 상처가 있을수도 ㅎㅎㅎㅎㅎ)
더 절망하게 됩니다.
결국은 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냐가 관건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고 신앙을 가르치는 목사의 신앙이 굉장히 중요하겠지요
즉 하나님에 대한 관념 이미지가 어떤가에 따라서 달라지고 뿐만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 역시 전달하는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안의 상처나 경험등을 통해 재해석하거나 왜곡해서 받아들이지요
따라서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결국 일반적으로 말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을증은 정신과적 치료과 효과가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다 치료받거나 효과가 다 좋은것은 아니지요
신앙으로 우을증을 극복하는 것도 같이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을증이 단순히 세레토닌이 부족하게 분비되는 것만이 이유는 아니고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왜 세레토닌이 그 사람에게 그 시기에 적게 분비될까라는 문제는 남는 것이지요
빅터 프랑클은 아우스비츠 수용소에 수용되고 살아남았던 사람인데 의사로서 관찰을 하고나서 로고테라피라는 심리요법을 창조하지요
결국 인간은 살 의미와 희망이 있을 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가족을 만나야 한다는 소망이 있거나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신을 원망하거나 나찌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절망하거나 가족이 다 죽은 사람보다 오래 살고 살아 남더라는 것이지요
우을증에 도움이 되는 신앙의 자세는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 죄를 지을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일종의 자기 긍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인간의 본질이 불완전하고 부족하고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러한 자신을 용서하고 힘을 주시고 받아주신다는 이야기지요
일반 윤리차원에서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실제로 많은 아버지나 어머니들은 돌아온 탕자를 받아줍니다
하물며 신은 더 말 할 것이 없다는 것이고 여기에서 인간은 위로와 평안 그리고 죄에서 해방을 얻게 되며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존재 용서받은 존재로 다른사람을 용서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지요
다음에 생활고나 일이 풀리지 않아서 그런 경우에는 희망이지요
하나님께 모든것을 맡기고 심지어 노숙을 하더라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지요
이경우 자신을 버리는 것이 필수적이지요
버릴것을 버리지 못한다면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신의 구원에 대한 희망도 버리고 맡기는 것이지요
바닥으로 빨리 내려갈수록 빨리 올라올수가 있지요
절망이 깊을수록 희망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삶의 여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찾고 발견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냥 예수믿고 교회 다니는 것이 신앙은 아니지요
그리고 신앙은 완성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완성이 없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죽는날 까지 의심하고 절망하고 다시 희망을 바라보고 넘어지고 일어서고 하는 존재로 기독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멈추는 순간 죽은 신앙이 되고 맙니다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신앙을 고정된 틀로 파악하는데서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시작됩니다
인생이 단순하지 않듯이 신앙 역시 명쾌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요
겉으로는 단순하게 신앙을 강조하는 근본주의자라 할 지라도 그 실제 생활과 내면은 그렇지 않고 끝없는 갈등과 고민이 있지만 그것을 더 강경하게 외부로 발산하는것으로 자신의 내면을 감추려하고 자신의 불신앙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신앙은 자신의 신앙이 완전하지도 그리고 자신안에 의심이 있고 절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온전해 집니다
내가 부족하고 불완전해야 신이 들어설 자리가 있고 신이 내밀수 있지 않겠습니까?
숨바님
논문쓰는것 잘 되가시는지요
참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것 같습니다
오늘 티브에서 삵이 두루미를 잡았는데 분명 승자인데도 불구하고 그 큰 두루미를 끌고 갈대숲으로 옮기느라 헉헉대더군요
그리고 다시와서 먹을때도 누가 오지 않나 살펴보고
희생된 두루미도 불쌍하지만 승리자인 삵도 참 살기 힘들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인간이 움직이고 욕망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데 그 생존을 위한 욕구와 욕망때문에 힘들어진다는 아이러니
이게 인간의 본질이지요
결국 줄타기를 아주 잘해야 할 듯 싶습니다
균형을 잃으면 떨어지니까요
'하나님'이란 관념의 세계.
그 주관적 관념이, 과학에서 이야기되듯 일반적인 경험으로 타자화될 때, 그 때 그것은 종교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기독교를 신앙을 가지면 얻을 수 있는 혹은 체험할 수 있는 경험세계가 될 테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과의 만남'의 과정이 진정한 만남이 되려면, 아마도 지금 기독교에서 따르고 있는 만남의 방법들로는 불가능할 텐데...
믿고, 고백하고, 열렬히 희망한다고 하나님을 영접할 수 있을까요?
2,000년이상이나 되는 그 오랜 기간이 있었지만, 그냥 종교로써 버텨왔지만, 그동안 하나님을 만난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도 인격적인 신인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겠지만, 신이 어떠어떠하리라고 규정된 그런 신은 진정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각자의 관념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인격화된 신을 만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들 만났다고 하는데,,, 그 방법이 과학적이지도, 검증 가능하지도 않으니까 서로 자기들이 정통이라며 다투고 있는 것이지요. 개개인마다 수많은 우주가 있듯, 수많은 방법으로 그들만의 하나님을 만나고는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마도, 내가 부족하다고, 불완전하다고 생각해서는 절대 만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하고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한다면,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어떻게 만나서 하나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얼음과 숯이 하나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신앙자가 하나남의 상태가 되어야 합치가 되고 하나가 되겠지요. 그렇게 되는 순간 신앙은 완성이 되는 것이겠구요.
만일 기존 기독교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절대자라 절대로 자기와 하나가 될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완벽하게 타자화되는 것이겠지요.
그런 신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결국 기존 기독교가 알고 있는, 전수해주는 방법으로는 결코, 앞으로 2만년이 더 흐른다고 해도 하나님과는 만날 수가 없겠지요.
오래 버틴 것이 진리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지금도 가까이는 회교도도, 유대교도 멀게는 불교도 심지어, 선황당 신도 면면히 수천년을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요. 모든 게 진리이죠.
세가 문제일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냐는 것이 그것이 참이냐 거짓이냐를 가릴 수가 있을까요?
세력 혹은 수에 따라 어떤 것이 진리냐 아니냐 혹은 우월을 가린다면, 70점과 75점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과 아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임의로 선을 그어놓고 싸우는 아이들 소꿉장난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을 모른다면, 결국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 참 하나님인지 모른다면, 정통이니 사이비니 따질 필요없이 각자의 믿음에 따라 믿으면 그만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것은 사이비니, 이단이니 손가락질을 하며 정통성을 주장합니다.
정통이니 사이비니 하는 논쟁은 상대성의 원리를 모르는 것이지요. 한쪽(A)에서 보는 상대(B)는 모두 사이비일 뿐입니다. 어느쪽을 기준으로 보느냐 하는 상대적인 문제일 뿐이지요. 기독교와 불교의 대립이 그럴 것이고, 기독교 내, 장로교와 다른 교파가 그럴 것이구요.
오래된 것이 옳다면, 오래 견딘 것이 진리라면, 무당교나 샤마니즘이 훨씬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므로 어떤 종교가 좋으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남의 젯상에 감놔라 배놔라 하지 말고 말입니다.
진실로 참 신앙인이라면, 영성... 그것을 가꾸거나, 찾아내거나, 성장시키거나 하는 일에 목숨을 걸아야겠지요.
참 신앙인이라면,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에 있어서, 마음의 세계를 잘 모르면 허당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영적이라는 말도 좋고, 정신적인 말이라도 좋고, 마음이라는 용어도 좋습니다. 이들 용어는 문맥과 상황에 따라 달리 사용되는 것일뿐 내내 같은 것을 지칭하는 용어에 불과하니까요?
종교를 얘기하기보다는 육적인 삶을 살 것이냐, 정신적인 삶을 살거냐가 훨씬더 중요한 문제겠지요. 이 세상에 평화가 오고 천국이 오려면...
왜냐하면 예수는 진실로 영적인 삶을 살았던 분이니까요. 아마도 그가 그 바쁜 일과중에도 하루에도 몇시간씩이나 기도를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만나는 시간을 가졌던 것일 겝니다. 일치의 시간을... 하나님의 being이 되는 시간을...
세상에 아무리 종교인이 많고 특히 기독교인 많다고 해도,,,,
자신의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면, 그 얼마나 공허한 일이겠습니까?
2012. 9. 7.
18:28
사랑의 전도사
참사랑
흐르는강물/
신의 언어 관련 글을 타고 들어와서 이제사 읽게 되었는데 공감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려는 것이 마치 암스트롱 이후 달토끼의 자리를 마련하려는 음모론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명상이라든지 심리 테라피를 받는다든지 어떤 식으로든 반대급부를 마련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신앙을 위한 자리는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 두뇌가 뇌간과 구피질 신피질 등등으로 나눠진 것처럼 저는 지식 체계를 넘어선 신념의 세계도 존재한다고 봅니다. 글을 쓰고 논쟁을 할 때, 내용은 지식 체계에서 나오지만 행위 자체의 driving force는 신념인 것 같고. 과학을 절대적으로 옹호하는 분들은 신앙과 양립되기 힘든 다른 신념을 중심으로 지식이 체계화된 게 아닐까 하기도 하고. 일종의 다른 신앙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저는 따로 믿는 종교는 없지만 요즘 사는 걸 돌아보면 신앙이 없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족이지만, 기독교에 관련한 글에 이런 논쟁이 항상 붙는 이유는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신념이 민감하고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이것을 건드리는 것이 불판을 피우는 것 같습니다. 전도를 여러 번 겪어 봤는데 타인이 나와의 거리감을 훅 깨고 들어온다는 느낌도 받았고, 나의 믿음을 무시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고 뭐. 키에르케고르 식의 신앙이라면 거부할 사람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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