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댓글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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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저는 한국에게 유리한 얘기를 한 게 아닙니다. 일본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수용했을 때, 그게 앞뒤가 안맞다는 지적을 한 거죠. 이건 구체적으로 사료를 더 살펴본다고 생각이 바뀔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일본이 앞뒤가 맞는 소리를 해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근데 일본이 앞뒤가 맞는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독도가 일본땅인 근거가 전무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제 그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앞서 적었지만 ICJ의 판사가 영토분쟁 사안에서 보는 것이 1)고유영토인 것의 입증 2)실효적 지배를 했다는 사실의 입증, 이 두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준을 음미해 보세요. 고유영토이고, 동시에 실효적 지배를 했다는 말이 뭡니까? 그땅에 자국민들이 살았고, 동시에 그 땅이 그 나라의 행정권의 영향 안에 편입되어 있었다..는 말이죠. 다시말해 a)자기 나라 백성이 그땅에 단순히 살았다는 사실을 넘어, b)그 땅에 그 나라의 통치권이 실질적으로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입증해야 한다는 거죠. 

자, 근데 일본의 역사서에 보면, a)의 사실은 기록이 있습니다. 님이 말씀하셨듯, 일본인 선조들이 독도에서 강치도 잡았고, 울릉도에서 어업과 벌목도 했거든요. 한때는 울릉도에 눌러앉아 주거까지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 역사서의 그 어디에도, b)의 사실은 단한줄도 나와 있지를 않습니다. 일본인 영주가 울릉도나 독도에 대해, 그것을 자기네 도나 현(행정구역)으로 인식했거나, 혹은 막부나 번에서 울릉도나 독도를 두고 어떤 유의미한 통치행위를 했다는 기록같은 게 단한줄도 없습니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요? 일본이 17세기 고지도를 들고와서 독도를 인지하고 있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아예 세기를 훌쩍 뛰어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우산국의 존재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게 무려 512년의 기록입니다. 이후 우산국이 신라에 복속되고, 고려시대 때도 고려사 세가와 열전에 고려에서 우산국에 농기구를 내려주고 어쩌고..등의 기록이 막 나옵니다. 그리고 바야흐로 조선의 기록으로 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일단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우산국에 대한 조선의 "정책"(=통치행위를 했다는 표징입니다)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403년(태종 3년) 8월 11일 이방원이 울릉도에 왜구의 침입이 있다는 사실을 걱정하던 차에, 강원도 감사가 그러지 말고 걍 울릉도 주민들을 모두 육지로 이주시키자는 건의를 합니다. 이방원이 이것을 받아들여 울릉도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라고 명합니다. 이게 소위 공도정책(=쇄출정책=섬을 비우는 것)의 시작입니다. 이 정책과 관련하여 대신들이 주고 받는 얘기가 실록의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 대신들이 공도정책 보다는, 걍 오곡과 농기를 내려주어서 걔들이 거기서 안정적으로 먹고 살게 해주자고 하니까 황희정승이 그건 안될 말! 저 인간들이 군역을 피해서 편히 살아왔는데 다 끌고나와야 한다며 태클거는 장면도 나옵니다. 게다가 어떤 대신은, 군역을 피해서 도망간 인간들이 울릉도에 자꾸 모여들면 왜구의 침략이 잦아질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왜놈들이 울릉도 털고 이후에는 곧바로 강원도 본진을 털로 온다고 걱정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결국 태종 이방원이 황희정승의 손을 들어주면서 김인우를 무릉등처접무사로 명하여 울릉도 주민들을 설득해서 데려나오도록 명하는 장면까지 나옵니다. 그리고 태종실록에는, 울릉도 주민들에게 농사짓고 세금 꼬박 내도록 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줘 봤자, 어짜피 따로 떨어진 섬에서 군대싫어하는 놈들 끼리 제대로 군복무 할리도 없고, 걍 그래서 데려나오도록 명했다고 이방원의 내심을 설명한 기록도 나옵니다.

계속 이런 식입니다. 이 공도정책이 지속되는 동안, 중간중간에 정책을 바꿔야 한다, 아니다는 갑론을박이 있고, 또 이 공도정책이 지속되는 동안, 왜놈들이 울릉도에서 불법어업을 한다, 불법으로 벌목을 하고 있다는 보고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1697년 숙종 때에 이르러, 울릉도의 관리정책이 변하게 됩니다. 공도정책에서 수토정책으로 바뀐 거죠.(=이 정책변화의 계기가 안용복 사건입니다.) 그때부터 수토사들을 울릉도로 보내어 더이상 왜구가 침입을 못하도록 순시를 명하는 기록이 나오고(=공식적으로 확인된 기록만 20회랍니다), 실제로 순시를 하도록 명을 받고 내려간 수토사가 (공도정책이 계속되는 동안)울릉도에 눌러앉아 살던 왜놈들에게 먹거리 등의 뇌물을 받고, 어업권과 벌목권을 부여해줬다는 기록같은 것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조선 시대 내도록 울릉도를 어떻게 운영할까는 정책적 고민이 무수하게 기록되어 있고, 일본은 언제나 우리의 통치권역을 침범한 배제되어야 할 타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동시에 일본의 기록에는, 단한줄도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그들이 통치권을 행사한 기록같은 게 없습니다)    

자, 근데 울릉도라고 했습니다. 그럼 독도는? 조선시대의 기록들에는, 울릉도만 나오는 것이 있고(=가장 많습니다), 독도까지 함께 언급되어 나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무튼 울릉도 부근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울릉도나, 올릉도와 독도 둘 다를 언급하면서, 우리 역사의 기록에는, 우산도, 울릉도, 가지도, 무릉도, 삼봉도, 저릉도, 자산도, 석도, 독도..라는 말을 모두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이렇게 지명통일이 안되고 있을까요?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남한 전역의 그 어디도 하루만에 갈 수 있고, 그래서 실질적인 일일 생활권 내에 있는 오늘날과 평생을 자기가 나고 자란 곳에 살다가 거기서 뼈를 묻는, 그래서 좁디 좁은 지역 공동체, 더 좁게는 마을공동체에 생활반경이 묶여있는, 그 조선시대를 한번 구분해 봅시다. 이게 무슨 말이냐구요? 언어도 그 생활반경안에 묶여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얘기지요. 지금 우리가 한 대상을 지칭하는 언어를 하나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은, 국정교과서를 통해 동일한 내용의 교육을 "전국 단위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생활속에서 소비하는 모든 재화와 서비스 역시 대량생산체제의 "규격화된 형태로", "전국민이 다함께" 소비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대상을 지칭하는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의미에 너무나도 익숙합니다. 

하지만 조선시대는 그렇지가 않았죠. 팔도의 사투리만 떠올려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한 대상을 지칭하는 팔도의 방언을 듣고 있노라면, 각기 대체 무슨 대상을 지칭하는 것인지가 헷갈릴 지경이죠. 그러니 이 언어의 혼돈이 조선시대에는 얼마나 더 심했을까요? 물론 국가의 공식적인 언어가 있죠. 그 언어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양반이고, 이 양반계급이 국가권력을 손에 쥐고 그들만의 언어로 조선을 통치하고 있었죠. 이 지배자의 언어는, 전국 곳곳을 대상으로, 백성의 언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광범위한 규정력으로 실제 통치현실을 구성하고 있었죠. 울릉도와 독도도, 이 백성의 언어와 국가권력의 언어가 중첩하면서 지명의 분화를 낳았겠는데, 울릉도와 독도의 지리적 위치가 1)통치권력의 영향이 미치기 힘든 섬이었다는 점, 2)공도정책이 사실상 500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행정공백 현상이 장기화 되었다는 점 때문에, 울릉도와 독도는 (다른 곳과는 달리)행정지명의 의미가 강하게 고착되지를 못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나온 연안가 지역주민들의 입과 입을 통해 그 지명이 각기 혼잡하게 퍼져있었던 게 아닌가 싶구요.

근데 여기서도 재밌는 점이 있습니다.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에도, 백성들의 언어속에서도, 울릉도와 독도를 지칭하는 말은 많지만, 어떤 지명으로 표시하든 울릉도와 독도는 거의 두가지 지명의 나열로 표현됩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울릉도 근처에 독도와 같은 섬이 몇개나 있을까요? 놀라지 마세요. (저도 검색 찍어보고 깜놀했는데) 울릉도의 부속섬이 44개랍니다.(유인도 4, 무인도 40)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22668&mobile&categoryId=200000993

근데 이렇게나 많은 부속도서가 있다면, 각 섬마다 고유한 이름이 하나씩 있을 법도 한데, 울릉도와 독도를 언급하는 역사의 기록에는, 가령, (울릉도 부근을 언급하면서) 울릉도-우산도-가지도, 뭐 이렇게 3개의 지명으로 언급하는 경우도 잘 없습니다. 울릉도-우산도의 짝이든, 무릉도-가지도의 짝이든, 우산도-삼봉도의 짝이든, 대개 2개의 짝으로만 언급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런 경향성은 일본의 기록에서는 더더욱 뚜렷합니다. 일본에서는 울릉도와 독도를 언급할 때, 마쓰시마-다께시마, 혹은 죽도-송도 뭐 이런식으로 늘 두개의 짝으로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재밌는 건, 울릉도 부속도서 중 가장 끝에 있는 게 (아마도)독도라는 점입니다.(=울릉도에서 87.4Km 떨어져있습니다) 그럼 이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 당대의 사람들, 근까 조선인도 일본인도 울릉도를 일컫을 때, 울릉도에서 가장 떨어져 있는 독도와, 그 나머지 울릉도 전부의 짝으로 울릉도를 이해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렇게 구분한 것은, 말그대로 독도가 울릉도에서 가장 떨어져 있고, 나머지 부속도서들은 울릉도 가까이에 붙어 있기 때문에, 거리 차가 가장 심한 독도를 울릉도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독자적인 섬으로 취급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이겠죠. 저는, 지명의 혼잡에도 불구하고, 울릉도와 독도만 나란히 언급되는 것이 그런 이유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그럼에도 조선의 중앙정부가, 울릉도의 현실에 대해서 굉장히 깜깜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안그래도 저 바닷가에 동떨어져 있는 섬인데다, 공도정책 까지 지속되면서, 그런 무지가 만성화 되버렸죠. 숙종때에 이르러 수토정책으로 전환을 한 후에도, 파견된 수토사 중 독도를 제대로 감찰하고 온 관원이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용복 피랍 사건은 조정에 까지 알려졌고, 부자 3대가 독도지킴이를 했다는 홍재현의 무용담도 민간에는 전승되고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도무지 그 실체파악이 안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독도가 어디있는 섬인지, 그 독도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조정의 기록으로 남아있지를 않다고 합니다.(=오히려 정부가 민간의 얘기를 듣고, 독도의 존재를 인지하고, 독도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려는 식에 가깝습니다, 아무튼..) 그 수토정책이 100년을 넘어서 까지 지속되는 동안 수토사들이 독도에 대한 탐사를 했다는 기록이 전무한데, 처음에는 단순히 기록유실이 아닐까 싶었다가 또다른 기록들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더군요. 조선의 조정에서는 진짜로 독도에 대해 깜깜무지했던 것 같습니다.

가령.. 

동해가운데 요도가 있다. 이런 소문이 민간에서 떠돌고 있으니까, 그 요도가 대체 어디냐? 탐사를 해서 찾아내라. 찾는자에게 포상을 하겠노라..이게 세종때의 기록입니다. 이후 요도에 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만 1475건이나 나온답니다. 울릉도는 존재가 알려져 있는 만큼, 그 울릉도 바닷가의 요도는, 독도를 일컫는 말이겠죠. 그만큼이나 조선의 조정에서는 독도의 정확한 위치파악이 안되고 있었고, 이게 성종때 까지 이어집니다. 성종실록에는 당시 삼봉도로 불렸던 독도의 존재를 찾기 위해 답사 준비와 실행에 관한 기록만 무려 45차례가 나오는데, 이런 식으로 조선왕조 내내 독도에 대한 무지와 관심이 지속되었고, 그게 고종때 까지 이르러 고종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울릉도에 왜놈들이 제멋대로 들어와서 편의를 도모하는 폐단이 있다고 한다, 또 송죽도와 우산도는 울릉도 곁에 있다는데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무슨 물건이 나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이번에 니가 내려가서 각별히 감찰하고 와라, 그리고 앞으로는 읍을 세울 거니까, 지도와 함께 별단에 자세히 적어서 보고해라..이렇게 명하면서 이규원을 울릉도로 보냅니다. 근데 이규원은 명령을 받고서도 답사를 안합니다. 그전에 수검을 받은 사람에게 대략 전해들은 말로, 그대로 고종에게 고해 바치죠.. 

이규원 왈, 상감마마! 우산도는 울릉도이고, 송죽도는 송도와 죽도 두개의 섬이 아니고 하나의 섬으로 알고 있나이다..

이에 고종이(자기도 들은 말이 있어..)아니다, 울릉도와 우산도, 송죽도는 분명히 다른 섬이다. 근데 총칭해서 울릉도라 하는 거다, 니가 더 자세히 검찰하도록 해라!

대강 이런 식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이 되다 보니 일본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길 수 있는 빌미를 준 거겠죠. 아무튼, 조선시대 내내 독도의 존재를 명확하게 입증할 국가의 공식적인 문서가 아직은 발굴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도의 존재를 우리가 몰랐다고 할 수는 없겠죠. 우리의 정책 의지가 독도에 미치지 않았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는 거고.. 역사서를 살펴만 봐도, 우리가 울릉도, 그리고 독도를 포함한 그 부속도서 전체에 대해, 명백하게 통치권을 행사하려는 국가적 의지, 실제로 통치권을 행사했다는 증거들은 널려 있습니다. 반면 일본은 그런 게 하나도 없어요. 걍 불법적으로 울릉도와 독도에 들어갔다가, 현지 주민들과 시비가 붙거나, 쫒겨나거나 뭐 그런 기록들만 있죠. 다시말해 역사기록 속에서 스스로가 약탈자인 모습으로만 등장하는데, 그에 덧붙여 안용복의 사건도 있고, 태정관 문서도 있고, 아무튼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어떤 통치권을 행사한 공식적인 기록이 전무합니다. 당연히 영유권을 주장할 지반 자체가 없는 거죠..

제가 보기에 일본의 전략은 이런 것 같습니다. 어짜피 과거사에서 영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일본에게 없는 만큼, 영유권 주장의 실질적인 근거는 1905년 무주지 선점으로 밀고 가고, 반면 한국이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인 과거사의 기록들에 대해서는, 자신들도 마치 영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있는 것 처럼 물타기를 하면서, 하지만 자신들의 영유권 근거를 직접적으로 입증하는 게 아니라 오직 한국측 사료의 헛점들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그래서 반사적으로 자신들의 근거가 더 타당한 것 처럼 보이게 만드는, 그런 전략인 것 같습니다. 일명 착시효과를 극대화 하는 전략..

그래서 계속 앞뒤가 안맞는 말만 하는 거죠. 그래서 계속 우리 측 사료만 물고 늘어지는 거고..근데도 이게 굉장히 효과가 탁월해서, 길벗님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일본의 영유권 주장 근거가 타당한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방치한 채, 우리측 사료가 얼마나 형편없는가에만 모든 관심이 집중되고 있죠. 저는 이게 일본의 노림수에 넘어간, 굉장히 어리석은 대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질문을 한번 바꿔봅시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행정구역으로 인식한적이 있었나? 일본의 통치권력이 자신의 영향력을 독도에 행사한 적이 있었나? 한마디로 요약해서.. 일본이 단한순간이라 독도를 실효지배했다는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가?

이게 하나도 없었다는 답을 도출했다면, 이제 당당하게 외치는 겁니다.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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