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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조선해방의 사절로 지난 8일에 인천항에는 미국군의 입항이 시작되자 이날의 반가움을 참지 못하여 미군을 환영키 위하여 인천보안대원과 조선 노동조합원 등이 질서정연하게 행렬을 지어 연합국기를 들고 행진하던 중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일본인 경관대들이 발포하여 노동조합위원장인 권평근(權平根·47)이 가슴과 배에 탄환을 맞아 즉사하였고 보안대원 이석우(李錫雨·26)도 등허리에 탄환을 맞아 즉사하였다. 그리고 중상자와 경상자 14명을 내어 도립의원에 수용하고 응급치료중인데 이 사건의 전말을 미군 CIC에서 조사중이다. 이에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에서도 미군을 통하여 일본관헌에 대하여 엄중 항의중이다'.
 
   1945년 9월 8일 인천항 부근에서 있었던 미군환영행사 중 일본경찰의 발포사건을 보도한 매일신보(1945년 9월 12일자) 기사다. 권평근(1900~1945). 인천지역 항일운동과 노동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던 그는 그렇게 광복의 햇살을 채 한 달도 보지 못하고 일제의 총탄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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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는데 1945년 9월 8일 일본인 경관대들이 발포하여 2명이 죽고 중상자와 경상자 14명이 생겼다? 그 것도 미군을 환영하기 위하여 나선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두고 1945년 9월 11일자 뉴욕타임즈는 사설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일제의 식민정책을 시행한 쓰레기들에게는 부드럽게 대하고 우리가 해방시킨 민중들에게는 강경하게 대해야 하는가"


 

나중에 당시 해방된 조선인들을 총격한 경관대들은 미군정에 의하여 무죄방면되었다....

 


 

맥아더는 해방군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가 625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하면서 장병들을 독려한다면서 했던 말 '서울에 가면 여성은 부지기수'이다.


분함을 느껴야 한다.................... 그래야 당연하다. 왜냐하면 맥아더는 일본원폭 투하를 나고야로 한 것을 '나고야는 유적지가 많은 곳'이라고 하면서 한반도는 미개인으로 이해한 사실에 대하여 말이다. 전쟁을 하려면 그 전장의 사람들의 역사적 배경 쯤은 알아야 하지 않나? 어쩌겠는가? 우리 조상들이 못났던 것을........ 어쨌든,



 

이 긴긴 역사...................를 쓰려면 조히 2~3일은 걸리므로 생략하기로 하고 관심있는 분들은 권평근을 검색어로 하여 역사의 실타래를 추적해보길 바란다.(주: 일부 기록에서는 '민중의 소리'의 기록은 물론 정말 '적나라한' 자주민보의 기록도 있는데 특히 '자주민보'의 기록은 조금 필터링해서 보아야 할 것이다. 감히, 조언드리자면 역사에 대하여 만만찮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자주민보 기록은 접하지 않으시는게 좋을 것이다. 저절로 '역사 왜곡하는 X들'이라는 육두문자가 나오거나 멘붕 둘 중 하나를 겪으실 것이 분명하므로...)


 

나는 좌파가 아니지만 좌파의 거두............. 여운몽 선생....... '몽상가'에 불과했던 김구 선생보다 실제 실천적이었던 여운몽 선생.

해방 후 지체 없이 건국준비위원회가 꾸려지고 전국 각지에 인민위원회가 건설된 것만 봐도 우리 민족이 독립준비를 내실 있게 하였고 미군의 도움 없이도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 보름 만에 전국에 걸쳐 145개의 건준지부가 탄생했고 그 산하에 162개의 지방치안대를 둘 정도였다. 그러다 미군정에 치이고 남한의 극우들과 북한의 극좌들의 공적이 되어 암살된 여운몽..... 여운몽과 둘러싼 미군정의 역사적 기록은 미국이 순수하게 한반도를 해방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음을 거증하는 것이다. (뭐, 당연히 민주/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 자신이 해방시킨 공산/사회주의 건립을 묵인하겠느냐마는.... <-- 이 부분은 다른 기록들이 있는데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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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의 위대함은 해방과 함께 발휘되었다. 1945년 8월15일 그날 지체없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으며, 미군의 인천 상륙에 앞서 9월6일 전격적으로 인공(조선인민공화국)의 창건 부주석이 되었다. 인공의 구상은 우파에 이승만·김구·김성수, 좌파에 이강국·이주하, 그리고 중도파에 김규식과 여운형으로 구성되는 3파 연립정부를 수립한 다음에 미군을 맞이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공은 10월10일 군정장관 아널드의 야비한 성명문의 일격으로 어이없이 와해돼 버렸다. ‘흥행가치조차 없는 꼭두각시 놀음을 벌이면서 정부 고관을 참칭하는 비열한 사기꾼’이라고 몽양 여운형을 매도하는 성명문이었다.



이에 다시 인민당(人民黨)을 결성하여 1946년 5월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며 좌익을 대표하여 중간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좌우합작운동이 우익의 강력한 반탁운동과 공산당의 반대에 부딪혔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됨에 따라 1947년 5월 사회노동당을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으로 개편하고 좌우 중간노선을 모색하였다. 이를 통해 좌우합작 내지 남북통일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선은 미국과 쏘련이라는 좌우의 현실적 힘 앞에서 정치적 입장을 강화시켜주기가 어려웠다.



해방과 더불어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을 조직하였지만 공화국의 꿈은 깨어졌다. 이와 더불어 신탁통치문제는 찬탁이냐 반탁이냐의 단순논리로 좌우 진영은 서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좌우합작과 좌우협상은 결렬되었다. 탄압받는 좌익의 대응은 거칠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고,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으로 나타났다. 이 와중에 한 인간적 사회주의자의 죽음을 가져온 몽양 여운형의 암살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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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 사실만 가지고 미국을 적대시하거나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들 때문에 (민중의 소리나 자주신보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가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났고 지금 번영의 시대를 누리는 것은 확실하다. 단지, 그들이 천사의 마음으로 한반도를 해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고의적(또는 미필적)으로 한반도를 해방한 것이다. 아니, 해방이 아니라 일본 점령에서 미군 점령으로 바꾸었다고나 할까?


 


 

중요한 것은, 애국주의나 국수주의를 고취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해석을 내 입장에서 바라봐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모노세키 조약을 보고 울었다는(실제 울었다는 기록은 없고 야사에만 전해지는 내용이다만) 그래서 그렇게 바라던 조선이 청나라 지배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독립국가를 추구할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한 이완용(이완용은 친일파가 아니라 천박한 실용주의자에 불과했다. 그는 일본어를 잘 못했다. 내가 가카를 경멸하는 것이 가카가 이완용을 능가하는 천박한 실용주의자이기 때문이다. 實用이 아니라 失用주의... , 실제 일본의 노림수는 이해도 못한 채, 그런 순간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애국심을 중요하게 여기건 여기지 않건, 역사에서 식민지의 주민이 지배국가의 국민들만큼 동등한 대우를 받은 적이 없다. 최소한, 독립이란,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그리고 우리 생각을 위하여, 그 생각이 극우건, 우파건, 좌파건, 극좌건, 아주 최소한의 요구조건이다.


 

8.15....... 우연찮케 박종우 사건 때문에 과다한 시간을 들였는데 조금은 한국 현대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최소한, 그런 기록들을 남기는 분들의 수고를 격려하기 위해서라도.........


 


 

위의 기사는 각각 여기를 참조했습니다.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17758

http://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idxno=332143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