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역사 속에서 패권국가가 자기부정을 한 사례가 없다는 사실, 그래서 지금 패권을 유지하고 있는 미국이 자기부정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미국이 샌프란시스코 조약 중 독도 관련 부분은 원천무효라는 주장을 받아드리지 못할 것이겠지만 법리적으로는 원천무효이다. 강자의 논리가 주입된 것이 샌프란시스코 조약 특히 독도 관련 부분이다.

아래는 2년 전에 세종독도종합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인 한국귀화 일본인 호사카 유지 교수의 인터뷰 내용 중 샌프란시스코 조약 부분만 발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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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미국은 독도가 일본 관할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얘기로 미국이 일본과의 평화 조약 작성 과정에서 일본 편을 들어준 것이다. 이 러스크 서한은 독도 문제의 진정한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은 지금까지 이에 대해 명료한 반박을 내놓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그래서 세계 사람들은 "독도가 역사적으로는 한국 것일지 몰라도 국제 조약이라는 측면에서는 일본 것이 맞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현재 상황이다. 여기에 대해 확고한 대응책을 세우지 않으면 세계의 논리는 계속 일본 편으로 갈 것이다. 논리라는 것이 무서워서 무력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완벽히 극복하여야 한다. 그렇게 때문에 더욱더 이 책을 쓴 것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초안 작성 과정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이 연합국을 대표해 평화 조약 초안을 작성하는데 1차부터 5차 초안까지는 독도가 한국 영토로 명시되었다. 하지만, 6차 초안에서는 독도가 갑자기 정반대로 일본 영토로 기재됐다가 7차에서는 다른 연합국의 반발로 다시 한국 영토로, 8~9차에서는 다시 일본 영토가 되는 등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국은 미국에게만 평화 조약 초안 작성을 맡길 수 없다고 하여 독자적인 영국 초안을 작성해 1951년 4월에 그 초안을 공개했는데 이 영국 초안에는 독도가 명백히 한국의 영토로 기재되어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51년 6월 14일 '2차 영미 합동 초안'이 마련되는데 한국 영토 조항은 이것으로 최종 확정된다.


 

그 내용은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權原), 그리고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것으로 독도는 포함되지 못했다. 그러나 독도가 한국 영토 초안에 포함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영미 양국은 '너무 명료하게 해버리면 일본인에 심리적인 압박을 주기 때문'이라고 연합국 회의에서 설명했다.


 

즉, 독도가 일본영토가 되었다는 말은 영국이나 미국 측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때까지의 흐름으로 볼 때 연합국은 압도적으로 독도는 한국 영토로 주장했고 미국만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결국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의견이 세계의 대세였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줄곧 한국 영토로 인정받았던 독도가 대일 평화 조약 6차 초안부터 일본 영토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미국 정부의 일본 정치고문관이었던 '윌리엄 제이 시볼드'라는 사람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지일파로 일본 여성과 결혼도 했다. 그 후 제이 시볼드는 독도가 일본 영토로 기재되도록 미국 정부에 대해 끈질기게 요구했다. 결국, 일본 편에 선 제이 시볼드로 인해 독도 영유권 문제는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한편, 평화 조약 당사자가 아니었던 한국은 초안 작성 과정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초 한국 영토로 명기되었던 독도가 최종안에서 빠진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한국 정부는 당시 주미 한국 대사였던 양유찬 대사를 통해 1951년 7월 19일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평화 조약 초안에 명시해 달라고 미국 국무성에 요청하도록 했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 대사관에서 독도의 위치도 제대로 몰랐다는 것이다.


 

미국 국무성 고문이었던 덜레스 대사가 "독도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위치를 물었을 때 한국 대사관의 서기관은 "울릉도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애매하게 답했다. 당시 주미 한국 대사관은 다케시마가 독도의 일본 이름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미국이나 연합국 입장에서는 독도라는 이름 자체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독도가 다케시마라는 것도 알 길이 없었다. 한국 대사관의 서투른 조치가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정확한 위치도 모르는 섬에 대해 무슨 조치를 취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평화 조약에 관한 연합국 극동위원회 회의가 열린 1951년 8월 7일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은 덜레스 대사에게 보낸 서한에서 "지리학자뿐만 아니라 한국 대사관에서도 독도의 위치를 확인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섬에 대한 한국 주권을 확실히 해달라는 한국의 요구를 고려하기 어렵다"고 밝혔고, 사흘 뒤인 8월 10일 러스크 서한이 한국 정부에 전달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에 독도 조항이 포함되지 않은 반면, 미국 정부의 고위 관리가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취지의 서한을 한국 정부에 보냈다, 이것이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결정적 무기가 된 셈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이 그토록 맹신하는 '러스크 서한'에도 치명적 결함이 있다.


 

이 서한의 내용은 미국 한 나라만의 의견으로 국제적 합의나 공인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합국들의 토론은 1951년 6월 1일자로 끝났고, 그 결과 '2차 영미 합동 초안'은 6월 14일 작성됐다. 독도를 한국 영토 조항에 포함시켜달라는 한국의 요구가 제기된 7월 19일 이후 연합국들이 모여 이 문제를 논의했다는 흔적은 없다. 결국 '러스크 서한'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한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일 뿐, 연합국 모두가 합의한 사항도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국제법적 효력이 있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게다가 미국은 이 서한을 한국 정부에만 비밀리에 전달했다. 즉, 당시에는 국제 사회가 미국 정부의 이러한 입장을 알지도 못했으며, 유일하게 알고 있는 한국 정부가 이러한 미국 정부의 입장을 수용했다는 증거도 없다.


 

예컨대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특사로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를 순방한 밴 플리트 대사는 귀국 보고서에서 "이 섬(독도)에 대한 합중국의 입장은 대한민국에 비밀리에 통보되었지만 우리의 입장은 아직 공표된 바가 없다"고 밝혔다. 또 이보다 앞서 1953년 7월 22일 작성된 미국 국무부 문서(버매스터 각서)에는 "이 입장(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미국 입장)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전달된 적이 없다"면서 만일 독도 문제로 한일 양국이 분쟁에 돌입했을 때 "합중국은 최대한 이 분쟁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며 일본이 미국 정부에 대해 중재를 요청할 경우 "이를 거절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결론적으로 '러스크 서한'은 독도가 일본 땅임을 다른 연합국과 합의한 문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평화 조약상 국제적으로 공인된 문서로 볼 수는 없다는 얘기다. 한편, 당시 미국은 독도 문제가 영토 분쟁으로 비화할 경우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한국 정부에 비공식적으로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기사 전문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01015174424&section=05


 


 

이 논란과 관계없이, 독도는 한국 애국심의 표상이다. 그런 애국심에 금을 가게한 것이 바로 미국이다. 물론, 반미나 척미 등을 외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독도에 관하여 입에 거품을 무는 사람들 중 다수가 미국에게는 길들여진 똥개 꼴이 되버리니 독도는 이중인격장애를 겪고 있는 한국인의 상징이라고 하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