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사진 한장과 인터넷 포탈 사이트에서 캡쳐한 댓글 하나를 감상해보자. (댓글에서 댓글 게시자의 이름은 모자이크 처리를 했고 그 댓글이 삭재될 가능성을 고려해 출처가 조작된임이 아님을 거증하기 위해 다른 댓글도 같이 캡쳐해 두었다.-원본과 출처는 내가 따로 보관하고 있다.)

김홍규 피흘리는 장면.png 






컨텍터스 장애인-모자이크본.png 


위의 사진은 금속노조 사무총장 김홍규가 용역업체에게 맞은 뒤 피를 흘리는 장면이다. 그리고 아래 댓글 캡쳐는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용역업체 '컨택터스'의 폭력 때문에 장애가 되었다는 어떤 네티즌의 댓글이다.다섯가지의 짜증스러운 생각이 교차한다.



첫번째 짜증스러운 점은 용역업체 컨택터스가 현 정권의 비호 아래 활약하는, 정말 전근대적이라는 표현조차 사치스러운 작태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두번째 짜증스러운 점은, 김홍규의 건은 결코 메이져 신문인 조중동에 의하여 기사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번째 짜증스러운 점은, 김홍규 건은 비록 마이너 신문이지만 보도가 된 반면 컨택터스에 의하여 장애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철저히 묵살되었다. 물론, 역공작이 심한 곳이 인터넷이다보니 저 댓글의 진위여부가 의심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지난 이랜드사건 당시 전혀 관계가 없는 한 이랜드 직원을 성희롱범으로 몰아 무차별 인격살인을 해놓고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 손석희와 한명숙의 건에서 본다면, 충분히 묵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여, 네번째 짜증스러운 점은 컨택터스의 본질과 그에 따른 직접적인 희생양인 노동자들은 젖혀두고 어떻게 하든 선거쟁점화에만 열을 올리는 민주당의 작태이다. 뭐, 놀놀이님이 거론한 노무현 정권의 혐오스러운 점을 다시 거론하지 않아도 충분히 혐오스러운 것이지만 ㅁㄹ이다.


다섯번째 짜증스러운 점은 이런 용역업체의 활약상은 비록 대기업에서도 용역업체들의 활약이 있기는 하지만 주로 중소기업의 노조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폭압적인 상황과 이중적인 구조,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대한 논란에 앞서는 균열에서 생디칼리즘 또는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이 한국 노동시장에서 얼마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사상적 지주일까? 회의적이다.



생디칼리즘은 우리 말로 생태만능주의라고 번역되면서 민주노동당의 노동운동에 대한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이 생디칼리즘은 현대에서는 쇠퇴되었지만, 그 것은 '총파업으로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노동자들이 경영하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따라서 파업은, 근본적으로 생디칼리즘의 성격을 띄고 있지만 그 것은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노동자들이 경영하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실천적 측면에서는 비정치적 성격을 띄고 있다.


현대 한국에서의 노동자 파업의 주이슈는 '경제적 이유'이고 그런 주이슈는 비록 마이크로적이라서 크게 보일래야 보일 수도 없지만 궁극적으로는 생디칼리즘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놀놀이님이 '모든 노동자의 경제적 요구는 생디칼리즘일 뿐이다'라고 주장한 이유이다.


한국에서의 생디칼리즘을 굳이 대비하자면, 일본 공산당이 '의회를 통한 혁명'을 주창하는 것의 반대지점에 서있다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본다면 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연대는 모순적인 상황이다. 단지,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 용납되는 이유는 한국 노동자들에 대하여 폭압적이라고 표현하기도 부족한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생디칼리즘의 다음 버젼으로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이 등장한다.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은 아나키스트들이 조직하고 벌이는 파업으로 생디칼리즘이 비정치적 범위라면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은 무정부주의에 노동만능에 길드사회주의의 구현을 그 궁극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 물론, 아나키즘이라는 행동철학이 '정치적인가, 아니면 비정치적인가?'라는 최소한 내게는 판단되어질 수 없는 의문이 있기는 하지만 생디칼리즘과 달리 정치적 색채를 띄고 있는 것으로 분류되고 있다.



여기에 살짝 폴라니의 담론이 끼어든다. 분당 전의 민주노동당의 홍기빈이 국내에 최초로 번역, 소개한 책이 의하면 (나는 이 책을 읽지는 않고 이 책의 서평만을 읽었다.) 폴라니의 담론은 국가나 사회가 시장을 지배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인간의 도덕적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 결단? 아마도 스웨덴의 국민대타협이나 독일의 노사정대타협 등을 염두에 둔 주장같은데 만일, 내 추측이 맞다면 아이구야... 스웨덴과 독일의 경우에는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서지 '인간의 도덕적 결단'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 '국가나 사회가 시장을 지배하는 것을 거부하면?' 도대체 실현가능성이 없는 도덕적 결단을 배제한다면 결국 시장만능주의, 즉 신자유주의 하에서 다국적 기업들이 주장과 아주 같지 않은가?




컨택터스 사건은 현 정권의 속성, 그리고 누가 대권을 잡건 간에 다음 정권에서 계속 벌어질 사건임이 명확하다. 그리고 아크로에서만 살펴보자면, 물론 가장 최근에 불거진 정치적 이슈이지만, 안철수가 어떻고 문재인이 어떻고 박근혜가 어떻고 경제민주주의가 어떻고 재벌개혁이 어떻고 하는 논란은 있지만 컨택턱스 사건이 함축하는 '우리 사회의 본질'은 무시되고 있다. 이 것은 마치 노무현 정권에서 참으로 어떤 이런 발언을 처연하게 할 수 있는지조차 의아스러운 '귀족노조'라는 표현을 용인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



컨택터스 사건은 마치, 이미 언급한 것처럼 우리 사회의 노동 운동의 이중의 이중 고리(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대기업 노조와 중소기업 노조의 차별적 구조)를 표면화 시킨 것에 불과하며 실제적인 노동운동은 지금부터이다.


대기업 노조와 경영진이 임금협상에 합의하면서 메이져 언론에서 '노사 극적 타협'이라는 '보도에 '참 잘했어요 짝짝짝'이라는 흐뭇한 미소를 지을 때 우리 사회의 노동운동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갈 것이다. 단병호와 홍세화가 멕시코의 노동 운동을 반추하면서 한국 노동의 앞날을 걱정한 것은 이런 맥락이 아닐까?



최소한 생디칼리즘 그리고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은 그나마 미국처럼 파업 자체는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 나라에서만 통하는 노동운동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나는 컨택터스 사건을 접하면서 확신하게 되었다.



환원하자면, 한국의 노동운동을 둘러싼 환경은 이미(물론 과거에도 그랬지만) 노동 방식의 옳고/그름의 차원을 떠났다. '어떻게 해야 이 형국을 타개할까?'가 진지한 고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꽤나 늦었지만.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