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다니 참 허무하기 짝이 없죠. 하지만 그 완벽한 무를 확신하는 사람들조차도 허무에 빠져서 손놓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과학에 정진하고 있어요. 이렇듯 신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도 우리가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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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에서 '허무하기 짝이 없다'가 진심을 말한 것이면 윗글은 앞뒤가 안맞습니다.. '허무하기 짝이 없다'와 '사는데 아무 문제 없다'가 어떻게 양립가능할까요? '짝이 없을정도의 허무'란 그 말의 의미상 빠져나올 수 없는 허무입니다. '무엇인가에 정진해서 극복할 수 있는 허무하기 짝이 없음'이란 '둥그런 네모'와 같습니다. 사실, 죽으면 끝이다라고 믿는 이들 중 과학에 정진하는 이가 몇명 있든 그 몇명 모두는 짝이 없을 정도로는 허무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에 정진하는 것입니다.


허무는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 어떤 구체적 상황들 속에서의 감정입니다.. 죽으면 끝이다라는 생각에서 허무라는 생각은 나올 수 있어도 허무해지지는 않습니다. 허무해지려면 죽으면 끝이다라는 생각에 상응하는 어떤 한계경험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 경험은 죽음이 끝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해주는 경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이 끝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강렬한 열망을 폭발시킬 수'도' 있는 경험입니다. 말기암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님의 부모님 앞에서 '죽으면 끝이에요'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끝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되는거에요'라고 말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저는 죽음이 끝이어도 얼마든지 괜찮을듯한 이들이 아니라 죽음이 끝이라면 너무나 억울한, 아무 죄 없이 고통과 억압만 가득한 생을 살다간 '무수한' 사람들, 더 나아가서는 온갖 중생들에 공감하기 때문에 죽음은 끝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본성상 누릴 잠재력이 있는 것을 타의로 인해 조금도 누리지 못하고 생을, 그것도 짧은 생을 마감한 생명체가 단 하나라도 있는 한, 죽음은 끝이어서는 안됩니다. 단 한 번의 생을신따위에는 기대지 않고 나름대로 의미있고 가치있고 목적있게 살 수 있는 자유를 누렸던/누릴 수 있는 적잖은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구속받은 삶을 살았고 살고 있는 한, 감히 죽음이 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중 적잖은 이들이 행복도 어느 정도 누린다면, 그 행복의 일부는 과거인들이든 동시대인들이든 거의 희생당하기만 했던 이들이 누렸어야 할 행복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다시는 그런 희생자가 생기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그 희생자들한테는 아무런 위안이나 보상도 되지 못합니다. 다시는 홀로코스트같은게 안일어나게 되었다해도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의 한과 분노와 절망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그들에게 의미와 목적과 가치를 지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만 그들은, 그리고 잠재적인 그들일 수도있는 우리는 불쌍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이 없으면 존재의 목적이 없다는 생각은 별게 아닙니다. 그 생각은 그저 신이 없다면 우리가, 실로 생명체들 전체가 너무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우연히 이러저러한본성과 능력을 가지게 된 생명체들이 실현되고 발휘되면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에 그 본성과 능력들을 실현하고 발휘하려 노력하지만 그 노력들이 서로 충돌하기에 수많은 생명체들이 필연적으로 불행해지고 고통당하고 억압당하는 이 불합리하고 불완전한 세계가 유일한 세계라면 그 생명체들 전체가 너무 불쌍하다는 것, 그것들의 존재가 거의 무의미해 보인 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생명체들이 유토피아 사회를 건설하고 자연과화해를 이룩하더라도 그 불쌍함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들은 스스로나 남들이 불쌍하다고느끼겠지만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나는 내 삶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며 다른 사람들이 불쌍한지 여부에 관심가질 만큼 한가하지 않다. 나는 내 삶에 집중할 것이다.' 어쩌면 아직 납득할 수 없는 커다란 고통을 안당해봐서 그리 자신만만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수많은 다른 생명체들이 불쌍한 세계에서 나 혼자만 안 불쌍할 수는 없다는 자명한 진리를깨닫지 못했기에 그리 자신만만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온갖 생명체들이 바래왔던 행복한 삶과 멀지 않으면서도 무수한 생명체들에게 그 삶을 거의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이 세계의 우발성과 불합리함과 부정성은 각인되어 있지 않은 삶을 기독교의 신은 약속합니다. 이 세계에서 자기가바라는 삶을 살려는 노력을 게을리만 하지 않으면, 애초 이 세계 자체를 완전한 세계로 창조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무식하고 건방지게 묻지 않기만 하면 , 육체를 부활시켜주고 영원한 지복의 삶을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저는 그 약속을 믿지도 안믿지도 않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그 약속의 내러티브의 숭고함에 다소간 압도되어 왔습니다. 기독교를 아예 안믿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보다는 기독교를 제대로 믿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이 훨씬 더 바람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하는 영향력을 기독교는 제게 행사했습니다. 


물론 온갖 생명체들의 고통과 불행에 공감하면서도, 나 역시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기독교가 제시하는 구원의 약속에 손을 내밀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합니다. 결코 그 구원과 유다를 수 없는 구원을 약속해 주는 다른 유일신 종교[들]도 있고 불교같은,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약속해주는 종교도 있습니다. 사실 제가 이 세계의 불합리성이나 부정성을 이해하는 방식은 불교의 일체개고(一切皆苦)?와 한 통속입니다. 제가 자꾸 기독교를 존중하자는 말들을 하니까 저를 기독교 신자로 몰고가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가장점잖은 글들을 쓸때의 닉네임을 '아난'으로 할 정도로 부처님을 예수님만큼이나 좋아합니다. 모두들 대단하기 짝이 없는 세계종교들, 진리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어도 우리에게 대단히 합리적인 호소력을 발휘하는 세계종교들, 이 세계와 우리 자신의 부인할 수없는 모습과 그 모습 앞에서의 우리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절망과 욕망에 바탕을 둔 세계종교들, 우리와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과 평가를 갖춘듯 보이는 세계종교들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러니는 세계종교들 역시 이 불합리하고 불완전한 세계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그 불합리하고 불완전한 세계를 넘게 해주겠다는 약속의 체계가 오히려 그 세계와 야햡해서 그 불합리성과 불완전성이 더 굳건해지는데 일조할 수도 있고 이미 벌써 일조해 온역사도 있습니다. 유난히 기독교가 많은 비판을 받지만 다른 세계종교들이라고 유다른것은 아닙니다.그렇지만 저는 특히 기독교의 경우에서의 그 일조의 가능성과 현실성을저보다 높이 보는 이들을 이해합니다. 다만, 유난히 기독교를 미신과 동일시하는 이들한테는 '무식하다'거나'소박하다'는 말 외에는 별로 해줄 말이 없습니다. 세계종교들은, 따라서 기독교도 내재적 비판이 아닌 다른 어떤 방식의 비판도 우리 모두에게 득보다는 실을 많이 주는, 인간해방을 위한 최고의 자원들 중 하나라고 믿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