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의 기능 개념과 진화 생물학의 기능 개념
 

인간이 도구를 만들 때에는 먼저 목적이 무엇인지 정하고, 그 다음에 설계를 하고, 그 다음에 재료를 이용해서 실제로 만든다. 처음 염두에 둔 목적이 바로 그 도구의 기능이다. 이것이 공학에서 쓰는 기능 개념의 의미다.

 

현대 진화 생물학자들은 신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진화가 일어날 때 누가 미리 어떤 목적을 염두에 두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화는 물리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자연 과정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 개념이 그럴 듯하게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시계의 목적은 시각을 알리는 것이다”라는 명제와 비슷한 형태인 “심장의 목적은 피를 펌프질 하는 것이다”라는 명제는 상당히 그럴 듯해 보인다. 시계가 시각을 알리는 기능을 잘 행하도록 인간이 설계했듯이 심장이 피를 펌프질 하는 기능을 잘 행하도록 누군가 설계한 것만 같다.

 

진화 생물학자들은 흔히 “자연 선택이 심장을 설계했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물론 자연 선택의 신이 따로 있어서 의식적으로 심장을 미리 설계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펌프질을 더 잘해서 더 잘 생존한 개체가 더 잘 번식했기 때문에 심장이 그런 식으로 진화했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심장이라는 기관은 여러 효과를 발휘한다. 심장에는 색깔이 있고, 무게도 나가며, 펌프질을 한다. 이 중에 펌프질이라는 효과가 심장의 자연 선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즉 펌프질을 더 잘 하도록 만들어진 심장이 자연 선택된다. 진화 생물학에서는 펌프질처럼 직접적으로 자연 선택되는 효과를 기능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심장의 색깔처럼 직접적으로 자연 선택되지는 않는 효과를 부작용(side effect)이라고 부른다.

 

엄밀히 말하자면 공학에서도 자연 선택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누군가 어떤 도구를 만들 때 실수를 해서 기존 도구와는 다른 식으로 만들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도구가 기능을 더 잘 수행해서 선택되는 경우도 있다. 공학에서도 의식적 설계 말고도 돌연변이와 선택이라는 메커니즘도 작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이런 점은 잠시 제쳐 두고 의식적 설계는 공학의 기능 개념, 돌연변이와 자연 선택에 의한 ‘설계’는 진화 생물학의 기능 개념과 연결시키겠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어떤 것의 기능이 그것의 구조의 기원을 설명해준다는 점이다. 시계가 시계처럼 생겨먹은 이유는 시각을 알리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인간이 그렇게 설계했기 때문이다. 심장이 심장처럼 생겨먹은 이유는 펌프질이라는 기능을 잘 수행하는 심장이 자연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어떤 것의 부작용은 그것의 구조의 기원을 설명해줄 수 없다.

 

 

 

 

 

생리학의 기능 개념과 신의 죽음
 

수백 년 전부터 생리학자들은 각 기관의 기능을 염두에 두고 연구를 했으며 이것은 생리학의 엄청난 발전으로 이어졌다. 심장, 허파, 간을 앞에 두고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라는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생리학이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까지 생리학자들은 기능 개념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많은 경우 그래도 별로 상관이 없었다. 왜냐하면 인체의 각 기관이 생존과 번식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 직관적으로 너무나 명백해 보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심장은 생존을 위해 필요하고, 자궁은 번식을 위해 필요하다.

 

아마 다윈의 『종의 기원』이 나오기 이전의 생리학자들에게 기능 개념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다면 대다수는 공학적 의미로 해석할 것이다. 즉 누군가가 의식적으로 인체의 각 기관을 설계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물론 그 누군가는 바로 신이다.

 

하지만 두 가지 사태 때문에 생리학자들의 생각은 바뀌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신이 죽어버렸다. 물론 대중 사이에서는 여전히 신이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지만 학계에서는 거의 완전히 죽어버렸다. 그래서 기독교를 믿는 생리학자라 하더라도 생리학에 대해 학계에서 토론을 할 때에는 신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또한 자연 선택 이론이 나오면서 공학적 의미의 기능 개념을 대체할 수 있는 진화 생물학적 기능 개념이 생겼다. 그리하여 생리학자들은 공학적 의미의 기능 개념을 버리고 진화 생물학적 의미의 기능 개념을 채택했다. 즉 인체의 각 기관을 신이 의식적으로 설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 선택이라는 무의식적 과정에 의해 각 기관이 진화했다고 보게 된 것이다.

 

이제 “왜 인체의 각 기관의 기능이 개체의 생존과 번식을 향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 선택의 핵심은 번식 경쟁이며 번식을 하기 위해서는 생존해야 한다. 따라서 더 잘 생존하고 더 잘 번식할 수 있도록 하는 표현형이 자연 선택되는 것이다.

 

또한 진화 생물학 이론을 명시적으로 고려함으로써 이전에는 해명할 수 없었거나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생리적 측면들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 Robert Trivers의 「Parent-offspring conflict(1974)」를 본 생리학자들은 태아와 어머니 사이에서도 이해 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자원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나며 이 때문에 여러 생리적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을 어느 정도 밝혀낼 수 있었다.

 

 

 

 

 

기능론적 사회학의 기능 개념 – 공학적 의미인가?
 

기능론적 사회학에서는 한 사회 전체를 유기체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사회의 여러 측면 또는 여러 부분이 사회가 유지되도록 하는 기능을 행한다고 주장한다.

 

이 때 기능론자들이 쓰는 기능 개념은 공학적 의미인가? 만약 공학적 의미라면 세 가지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신이 인간 사회를 설계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신은 적어도 학계에서는 죽었다. 나는 신을 끌어들여서 사회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현대 사회학자를 본 적이 없다.

 

둘째, 어떤 영웅이 사회를 설계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해석에도 큰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대단한 영웅이라 하더라도 신처럼 전지전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영웅 혼자 사회를 설계하는 것은 어찌해서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설계를 실행에 옮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사 실행에 옮겨서 사회를 자신이 설계한대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런 구조가 유지되도록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대단한 영웅도 결국 나이가 들어서 죽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학계에서는 사후 세계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영웅의 영혼을 끌어들여서 설명할 수도 없다. 어쨌든 나는 영웅을 끌어들여서 사회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기능론자를 본 적이 없다.

 

셋째, 사회 구성원 전체 또는 다수가 사회를 설계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해석에도 온갖 문제가 있다. 사람들은 계속 태어나고 죽는다. 그리고 사회 구조는 계속 변해왔다. 따라서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사회를 위한 설계도를 같이 그린 다음 그 설계도대로 사회를 만들었다고 볼 수 없다.

 

 

 

 

 

기능론적 사회학의 기능 개념 – 진화 생물학적 의미인가?
 

그렇다면 기능론자들이 쓰는 기능 개념은 진화 생물학적 의미인가? 만약 그렇다면 집단 선택론에 바탕을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문화적 집단 선택이든 유전자적 집단 선택이든 말이다. 왜냐하면 기능론적 사회학은 한 사회 전체를 유기체로 보기 때문이다.

 

그나마 집단 선택론을 끌어들이는 것이 사회학의 기능 개념을 과학의 세계에서 구해내는 가장 그럴 듯한 방법으로 보인다. 사회 A는 사회 유지에 방해가 되는 구조를 취하고 사회 B는 사회 유지에 도움이 되는 구조를 취한다고 하자. 그리고 사회화 과정을 통해 그 구조가 후세에 유전된다고 하자. 그러면 사회끼리(예컨대 부족끼리) 경쟁을 벌여서 B와 같은 구조가 자연 선택과 비슷한 방식으로 선택되는 것이다.

 

실제로 진화 심리학자들 중에 여러 사회 현상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기존의 기능론적 사회학자 중에 이런 집단 선택론자와 동맹을 맺은 사례가 이미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집단 선택론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 진화 생물학계의 대세다. 집단 선택의 힘은 집단 내의 개체 선택의 힘에 비해 너무 미약해서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기능론자들은 자신들이 쓰는 기능 개념이 공학적 의미에 가까운지, 아니면 진화 생물학적 의미에 가까운지, 그것도 아니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 듯하다. 그들은 공학자나 진화 생물학자가 쓰는 것과 비슷하게 기능 개념을 써서 사회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공학자는 인간의 의한 의식적 설계라는 메커니즘을 제시하고 있으며, 진화 생물학자는 자연 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을 제시하고 있다. 신학자는 학계에서는 인기가 없지만 신에 의한 설계라는 메커니즘을 제시하고 있다.

 

기능론자는 사회 유지에 무언가가 필요하면 그냥 저절로 생긴다고 믿는 것일까? 아니면 남몰래 신을 믿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것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세상에 멸종하는 종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메커니즘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설명이라고 볼 수 없다. 그냥 어떤 사회 현상이 사회 유지에 도움이 되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일 뿐이다. 진짜로 해야 할 것은 왜 그런 사회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해명하는 것이다.

 

 

 

 

 

기능론적 사회학 – 기능과 부작용을 구분하지 않는다
 

진화 생물학에서는 어떤 표현형의 효과를 따질 때 기능인지 아니면 부작용인지를 구분하려고 한다. 진화 생물학자는 심지어 생존에 유리한 특징이라고 해도 부작용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예컨대 현대 사회에서 사람이 글을 잘 읽는다면 위험 표지판도 잘 읽을 것이고 따라서 생존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읽기는 기능이 아니라 부작용이라고 보는 것이 대세다. 왜냐하면 읽기가 시작된 것은 불과 수천 년 밖에 안 되었는데 그 수천 년 동안 읽기 능력이 새로 진화했을 리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상 대대로 한 번도 글을 읽고 쓰지 않았던 부족의 갓난 아기도 문명 사회에서 자라면 읽기를 대체로 잘 배우는 것으로 보아 읽기 능력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메커니즘들은 이미 인류가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진화했다.

 

기능론적 사회학자들은 이런 구분을 하지 않는다. 그냥 막연히 뭔가 사회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면 기능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이것은 기능론적 사회학자들이 기능 개념과 기원을 연결시키지 않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종교의 기능은 사회 통합이다” 또는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서다”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종교가 만들어지게 되는 과정 즉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Richard Lewontin과 Stephen Jay Gould는 진화 심리학이 범적응론(pan-adaptationism, 적응 만능주의)이라고 비판했다. 모든 것을 적응으로 본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에서 기능을 찾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터무니 없는 비판이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표현형의 어떤 측면은 부산물 또는 부작용임을 인정해왔다.

 

범적응론이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한 학자들은 따로 있다. 기능론적 사회학자들은 사회 유지에 도움이 되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으면 덮어놓고 기능이라는 딱지를 붙여왔다. 이것은 전형적인 이야기 만들기(story telling) 또는 그럴 듯한 이야기(just-so story)다.

 

 

 

 

 

기능론적 사회학 – 가치 의존적 기능 개념
 

왜 기능은 사회 파괴가 아니라 사회 유지를 가리켜야 하나? 왜 기능은 인간 학대가 아니라 인간 복지를 가리켜야 하나? 이 문제에 대해 기능주의 사회학자들은 별로 생각도 하지 않는 듯하다.

 

진화 생물학자들은 자연 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을 제시한다. 자연 선택의 논리상 기능은 생존과 번식을 가리켜야 한다. 이것은 도덕적 가치와 전혀 상관이 없다. 반면 어떤 메커니즘도 제시하지 않는 기능론자들은 그냥 자신의 도덕적 가치나 이데올로기를 투영하여 기능 개념을 적용하는 듯하다. 과학적 기준이 없는 곳에 이데올로기가 들어앉는 것이다.

 

사회학 교과서에 나오는 다음 예를 보자.

 

기능은 명백할(manifest) 수도 잠재적일 수도 있다. 만약 어떤 행위가 체제의 어떤 부분을 돕도록 의도된(intended) 것이라면 그것은 명백한 기능이다. 예컨대, 정부 관료들이 우리 나라의 낮은 출산율에 대해 걱정하게 되었다고 하자. 의회는 결혼한 커플에게서 한 명의 아기가 태어날 때마다 1만 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하기로 한다. 이 보너스의 의도 또는 명백한 기능은 출산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머턴은 사람들의 행위에는 잠재적 기능도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즉, 체제가 조절할(adjust) 수 있도록 돕는 의도치 않은 결과가 어떤 행위 때문에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보너스가 효과가 있어서 출산율이 급상승했다고 가정하자. 그 결과 기저귀와 아기용 가구의 판매량이 급증한다. 이런 산업에게로 돌아간 이득은 의도된 결과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은 보너스의 잠재적 기능이다. (『Sociology: a down-to-earth approach(9판)』, 26쪽)

 

여기서 출산율을 높이는 것이 기능이 된다. 물론 이것은 어떤 기능론적 사회학자의 가치관을 반영한 목적일 뿐이다. 인류의 인구 증가를 걱정하는 기능론적 사회학자가 있다면 출산율을 낮추는 것이 목적이 될 것이다.

 

선진 산업국에서는 대체로 출산율이 낮다. 하지만 선진 산업국으로 이민 가고 싶어하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많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이민 장벽을 낮추면 된다. 그러면 선진 산업국의 인구 감소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인종주의자나 민족주의자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에 따르면 가난한 나라 사람들 또는 어떤 인종 사람들은 선진 산업국에서 살 자격이 없다. 위에서 인용한 사회학자(그는 자신이 나름대로 진보적이라고 믿는 듯하다)는 이런 인종주의 또는 민족주의를 (적어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이 글의 주된 테마는 위에서 인용한 사회학자의 (암묵적)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기능 개념이 학자의 가치관에 의존한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점이다. 기능론자는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무엇이 기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정한다. 그리고 어떤 신비로운 힘에 의해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사회가 작동한다고 믿는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과대망상인가?

 

 

 

 

 

“살인하지 말라”는 규범 – 루소의 해법
 

기능론적 사회학자는 “살인하지 말라”는 규범이 존재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할 것이다. 살인 금지 규범의 기능은 사회 유지다. 즉 사회가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살인 금지 규범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살인 금지 규범의 효과를 지적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은 그 규범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그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메커니즘을 대야 한다. 신이 사회가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그런 규범을 만들었다는 설명이 그 예다. 이런 설명은 엉터리 설명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기능론적 사회학의 설명은 아예 설명 측에도 못 낀다.

 

인간들이 사회 유지를 위해서는 살인이 금지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어느 날 깨닫고 그런 규범을 만들었다는 식의 설명은 어떨까? 이것이 루소의 사회 계약론의 핵심 논리다. 하지만 이 논리에는 온갖 심각한 결함이 있다.

 

첫째, 그런 것을 깨달은 “어느 날”이 있기 위해서는 그 날까지 사회가 유지되었어야 한다. 만약 그 이전에 사람들이 동족을 마구 잡아 먹었다면 사회는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사회가 유지되려면 살인 금지 규범이 있어야겠군”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온갖 종의 동물들도 대체로 동종은 잘 잡아먹지 않는다. 이것이 동물이 쉽게 멸종하지 않는 이유다. 육식 동물들은 대체로 다른 종을 잡아 먹는다.

 

셋째, 이런 설명에는 인간들이 사회 유지를 욕망했다는 가정이 있다. 왜 인간이 사회가 유지되길 바란다는 말인가? 이것이 설명되어야 한다. 게다가 그 사회 유지 욕망이 예컨대 다른 사람을 잡아 먹음으로써 채울 수 있는 식욕, 또는 다른 사람을 죽임으로써 채울 수 있는 복수심보다 더 커야 말이 된다. 그런 사회 유지 욕망이 왜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 욕망이 왜 다른 욕망보다 더 큰지를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살인 금지 규범의 기원을 밝히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그냥 “살인 금지 규범이 사회가 더 잘 유지되도록 하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사실상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능론적 사회학자들은 그런 것을 지적한 것이 대단한 발견이나 되는 것처럼 떠들어댄다.

 

 

 

 

 

갈등론 속의 기능론 – 자유 민주주의 사례
 

사회학의 전통을 기능론(functionalism)과 갈등론(conflict theory)으로 나누기도 한다. 기능론은 우파와 연결되고 갈등론은 좌파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런 구분이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갈등론이 기능론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좌파이기 때문이 아니라 갈등론이 기능론보다는 과학적 설명에 더 근접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갈등론자들이 기능론자와 상당히 비슷한 논리를 편다. 그들이 암묵적으로 또는 노골적으로 주창하는 기능론적 논리에 대해 살펴보자.

 

기능론자가 자유 민주주의의 기능에 대해서 열심히 떠들어대는 광경을 상상해 보자. 그에 따르면 자유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이유는 가난하고, 힘 없고, 빽 없는 사람에게도 한 표를 줌으로써 사회를 통합되어서 더 잘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면 갈등론자가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유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이유는 가난하고, 힘 없고, 빽 없는 사람에게도 한 표를 줌으로써 그들이 사회를 운영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부르주아의 지배를 연장하기 위해서다. 자본가들의 지배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지배 체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만약 가난한 사람들도 자신이 체제의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배 체제를 받아들일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 체제는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두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는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파 기능론자는 현 체제를 정당화하는 듯 보이며 좌파 갈등론자는 현 체제를 비판하거나 비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비슷하다. 둘 모두 자유 민주주의의 기능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런 갈등론자의 기능론도 기능론자의 기능론과 똑 같은 문제에 봉착한다. 갈등론자도 기능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면 그런 현상이 나타나도록 하는 메커니즘을 제시해야 한다.

 

갈등론자는 신을 끌어 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들의 지배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수호 천사가 자본가들의 지배가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인간 사회에 선물한다는 식의 설명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호 천사가 없다면 어떤 메커니즘이 있어서 자유 민주주의가 생겨야 한다. 갈등론자들 중에는 수호 천사 대신 자본가들의 음모를 메커니즘으로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 따르면 자본가들은 음모를 꾸몄다. 어떤 음모냐 하면 무지막지한 군사 독재나 파시즘 체제 대신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어냄으로써 노동자들이 체제에 포섭되도록 하는 음모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보면 자유 민주주의는 보통 노동자 계급이 피 터지는 싸움을 통해 얻어낸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의 근간인 표현의 자유, 보통 선거권, 노동 조합 결성과 파업의 권리, 정당 결성의 권리, 시위의 권리 등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이 몽땅 자본가의 첩자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자본가에게 속은 것일까?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체제에 포섭하기 위해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려고 음모를 꾸민 다음에 사람들을 속여서 민주 투사로 싸우도록 만들 것일까? 이런 설명은 말도 안 된다. 자본가가 그런 체제를 원했다면 도대체 왜 그들은 자유 민주주의를 방해하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까지 저항했단 말인가?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효과 중 하나는 노동자들이 체제에 더 자발적으로 순응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본가 계급에게 유리하다. 하지만 그런 유리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을 지적했다고 해서 자유 민주주의의 기원에 대해 설명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자유 민주주의는 노동자를 포섭한다”는 효과에 대한 명제이며 “자유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이유는 노동자를 포섭하기 위해서다”는 기능에 대한 명제다. 진화 생물학자들은 모든 효과가 기능은 아니라고 누누이 지적했다.

 

자유 민주주의는 자본가에게 불리한 다른 온갖 효과도 발휘한다. 노동조합 결성의 권리가 있으면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자본가에 대항하기 쉽다. 언론의 자유가 있으면 자본가의 비리를 폭로해서 대중에게 알리기가 더 쉽다. 정치의 자유가 있으면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을 만들어서 자본가에게 대항하기가 더 쉽다. 게다가 그런 당이 정권을 잡으면 자본가들은 상당히 곤란해질 수 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자본가들은 자유 민주주의에 그렇게도 반대했던 것이다.

 

갈등론의 핵심은 이해 관계를 둘러싸고 각 집단(특히 계급)이 투쟁을 벌이며 그 결과 사회 현상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가 자본가의 음모라고 보는 어설픈 기능론은 갈등론의 올바른 핵심을 져버리고 기능론에 투항하는 것이다. 그것이 체제 비판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더라도 말이다.

 

 

 


2009-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