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초의 내시에 대한 기록은 '역사'를 저술한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4 ?~BC 425 ?]에서 처음 발견된다. 키케로에 의하여 역사의 아버지라 불린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이야기체인 '역사'를 저술하는데 그 책에서는 '페르시아 지방에서는 내시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이용한다'라고 써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의 장담인 '믿을 수 있는 사림인 내시'의 구체적인 인류 최초의 기록은 전혀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기록이 된다. 그 것은 바로 페르시아의 환관 바고아스이다. 물론, 바고아스라는 이름도 사람의 이름을 칭한 것이 아니라 '환관'이라는 뜻의 페르시아어를 그리스어로 바꾼 것에 불과하니 엄밀한 의미에서 환관 바고아스는 인류 역사에 최초로 기록된 환관이라고 불 수 없다. 그러나 그 역사적 사실 기록의 구체성으로 미루어 환관 바고아스를 인류 최초로 기록된 환관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환관 바고아스는 BC 4세기에 활동한,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조인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아르닥사스) 3세의 신임을 받았던 신하이다. 흔히 다리아스 3세로 불리우는 아르닥사스는 그의 전왕인 BC338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를 독살한 환관 바고아스에 의하여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다리아스 3세는 막상 왕위에 오르자 환관의 그늘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을 하고 이에 분개한 환관 바고아스가 자신을 독살하려 하자 이를 간파하고 거꾸로 환관 바고아스를 독살하게 만든다.(*1)


환관에 대한 기록은 고대 이집트에서도 발견된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팡세'의 저자 파스칼이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인류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라고 불리운 미의 화신 클레오파트라 시대의 기록에도 환관의 기록이 나온다.


내시에 대한 국내의 최초의 기록은 신라 흥덕왕 때의 환수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2) 흥덕왕 원년 왕비가 죽자 이를 슬퍼한 흥덕왕은 좌우에 환수를 두어 슬픔을 달랬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흔히 환관과 내시를 같은 것으로 혼용해 부르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보면 조금 틀린 명칭이다. 흔히 고자(告者)라고도 불리는 내시(內侍)는 고려 때와 조선 때 궁궐 안에서의 잡무를 보는 관직 또는 임금을 옆에서 모시는 관직이었다. 궁궐 내의 여인들을 넘보지 않도록 내시가 되기 위해서는 생식기를 잘라내야 했다. 처음에는 세도가의 자제들이 내시 일을 했으나, 원나라의 내정 간섭 이후 환관이 맡게 되었다.

환관(宦官)은 거세된 남자들로 이루어진 중국과 한국의 관직이다. 엄밀히 말해 관직은 아니었으나, 나중에 거세된 남자들이 주로 맡게 된 내시직을 환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3)

중국의 경우 가장 유명한 환관이 바로 존국춘추 시대에 일세의 패권을 다툰 제나라의 제양공을 비극의 죽음으로 몰고간 수아라는 환관이 있었으며 전국 춘추 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의 아들이 나라를 환관에 의하여 빼앗기게 된다.

또한 이 진시황의 아들 이후로 중국을 통일한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한 때 환관 고조에 의하여 나라를 빼앗기기도 했다가 다시 찾기도 하는데 그래서 한나라를 전한과 후한으로 나누고 있다. 이후 삼국지연의에서도 등장하는 십상시, 당나라의 유명한 현종이 총애했던 애첩인 양귀비가 총애했던 환관 고력사 등 중국에서는 유독 환관에 의한 전횡의 역사가 많이 등장한다.


조선과 중국이 환관 제도가 있어 왕을 보필한 반면에 일본에서는 환관이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일부다처제였던 조선(*4)과 중국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아니었으며 오랜 내란에 시달린 탓에 성비가 무너져 성관념이 보다 개방적이었다는 주장, 일본에 전래된 제도는 궁형이 사라진 당나라의 제도였다는 등의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내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중국이나 조선 그리고 일본의 문화 차이에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패망하지 않은 이유는 물론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장수가 활약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본이 초기의 파죽지세를 이어가지 못한 것은 전쟁의 개념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즉, 일본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하여 전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오랜 전란을 겪었던 일본에서 전쟁의 승패 개념은 도성 뺴악기 개념으로 도성을 뺴앗는 즉시 빼앗은 진영은 '승리', 그리고 빼앗긴 진영은 '패배'라는 의식이 강한 반면에 조선이나 중국은 나라의 주인인 황제나 임금이 죽지 않는 한, 패망하지 않은 것이 전쟁의 개념이라 조선의 한양을 점령한 왜구는 자신들이 승리한 것으로 판단 진격을 미루었으며 반면에 몽진을 한 조선은 당시 임금인 선조가 건재하는 한 전쟁에서 패한 것이 아니고 계속 항전을 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5)


그런 문화의 차이, 즉 황제와 임금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중시했던 조선과 중국과는 달리 '성'이라는 하드웨어를 중시했던 일본의 차이가 이런 내시 제도에 대한 차이를 두게 했다면 너무 지나친 해석일까? 즉, 황우석 톤으로 이야기하자면 일본의 경우에는 '왕이 전왕의 씨앗이면 어떻고 신하들의 씨앗이면 또 어떻냐?'라는 다분히 성 개방적인 개념이 일본에는 환관 제도가 없게 만든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면 내시는 잘린 성기를 어떻게 했을까?

이미 위에서 인용한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조선과 중국 공히 환관들이 자신이 잘린 성기를 사기그릇에 보관한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조선의 경우에는 자신의 잘린 성기를 사기그릇에 넣어 보관했다는 조선일보 기사의 설명이 맞지만 중국의 경우에는 삼국지 정사에 기록에 의하면 은행나무로 만들어진 상자에 보관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이며 머리는 잘려도 머리카락은 잘릴 수 없다(此頭可斷 此髮不可斷)는 유교의 조선 그리고 중국에서 그리고 남성 천하인 그 시절에 신체의 일부를 잘려 부모에게 막심한 불효를 한 것은 물론 남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잘려 여성들에게도 남성의 대접을 받지 못했을 내시.

그들의 한이 얼마나 컸으면 자신의 잘린 성기를 사기그릇 또는 은행나무로 만든 상자에 고이 보관했다가 죽을 때 자신과 함께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으며 만일 같이 묻지 않는 경우 노새로 환생한다는 믿음을 가졌을까?


그런데 이런 환관 정도의 굴욕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현재 남성들은 굴욕을 당하고 있다고 한다. 흔히, 여성들이 젊어서 남편에게 구박을 받을 때 '나중에 늙어서 보자'라고 말하는데 그 '늙어서 보자'는 여성들의 복수가 작금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한다. 즉, IMF 이후 급증했던 이혼율이 점차 감소하는 추세지만 50살이 넘은 부부의 황혼 이혼은 급증하는 추세이고 그 이혼 사유 중 가장 큰 이유가 '성격 차이'라고 하니 시대가 변하면서 남성들의 위치가 점점 쇠락해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황혼 이혼이 권장될 사항은 아니지만 황혼 이혼율의 급증은 남성 위주의 한국 사회, OECD 국가 중 여성의 인권이 꼴지에서 두번째라는 한국 여성의 인권을 신장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아마 그렇게 된다면 황혼이혼률은 다시 수그러질 것이다.



*1 : 브리테니커 사전에서 발췌한 것으로 일부 블로그에서는 다리아스 3세가 환관 바고아스에 의하여 독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2 : 환관 바고아스가 '내시'라는 뜻인 것처럼 환수 역시 내시라는 뜻이다. 특히, 내시를 비칭하는 것으로 환수가 '고유명사'인 것처럼 명기한 조선일보의 기사는 잘못된 기록이다.(관련 조선일보 기사는 여기를 클릭)

*3 : wikipedia.org에서 인용.

*4 : 조선은 엄밀한 의미에서 왕만 축첩이 가능했고 양반은 축첩을 할 수 없었지만 이를 무시하고 양반들도 축첩을 하게 된다.

*5 : 임진왜란에 대하여 일본이 초기의 파죽지세가 머뭇거린 것에 대하여는 많은 설이 있는데 여기서는 본글에 적합한 것을 적용 설명하였다.


*6 : (추가) 일부 블로그에서는 중국은 성기와 고환을 동시에 제거하고 조선에서는 고환만 제거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역시 잘못된 기록으로 중국과 조선 동일하게 성기와 고환을 동시에 제거했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