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진화론을 다룬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시조새와 말의 진화를 다룬 부분을 삭제하거나 수정한다고 해서 말들이 많다. 창조론자들이 만든 것이 뻔한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교진추)>라는 단체에서 삭제를 요구했는데 교과서 출판사들에서 그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었기 때문에 큰 문제라는 것이다.

 

<교진추>가 어떤 단체인지는 다음 한 문장으로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우리의 궁극적 활동 목표는 교과서의 진화론 삭제입니다.

http://www.str.or.kr/bow.htm

 

 

 

나는 교과서 출판사들이 창조론자의 요구에 굴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과서의 진화 관련 장(chapter)에는 실제로 문제가 있다. 그래서 그것을 수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21세기에 출간된 교과서들에 시조새와 말과 관련된 것을 제외하더라도 진화 관련 오류들이 수두룩하다는 점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길게 다루었다.

 

고등학교 교과서의 진화 관련 오류들 --- 『과학』

 

고등학교 교과서의 진화 관련 오류들 --- 『생명 과학 II

 

고등학교 교과서의 진화 관련 오류들 --- 『생물 II

 

 

 

어쨌든, 일부 창조론자들은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삭제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적어도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도 같이 실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의견도 어떤 면에서는 그들과 같다. 나도 고등학교 교과서에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도 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은 내가 창조론을 옹호한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자칭 진화 심리학자이며 종교에 지극히 적대적이다. 기독교인이 다음과 같은 글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미신은 종교의 핵심 요소다

 

근본주의적 기독교만 문제인가?

 

미신 없는 세상을 위하여 – 사악한 성경 구절들

 

그리고 내가 “창조설”이라는 단어 대신 “창조론”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창조론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이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처럼 과학과 별로 상관이 없는 것에도 “론”자를 쓰는 경우가 있다. “창조론”은 한국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이며 “창조설자”는 어색하지만 “창조론자”는 어색하지 않다는 장점도 있다.

 

 

 

내가 왜 고등학교 생물 교과서에 창조론도 같이 실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나열해 보겠다.

 

 

 

첫째, 19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의 많은 저명한 과학자들이 창조론을 받아들였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이런 지적 풍토 속에서 출간되었으며 논쟁되었다. 어떤 이론을 시대적 배경과 함께 다루는 것은 의미가 있다.

 

사실 다윈 자신도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 1743-1805)의 『Natural Theology(자연 신학, 1802)』에 나오는 설계 논증(argument from design)에 무척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페일리에 따르면 시계와 같이 어떤 기능을 잘 수행하는 정교한 구조가 그냥 생겼을 리가 없듯이 인간의 눈과 같이 어떤 기능을 잘 수행하는 정교한 구조가 그냥 생겼을 리가 없다. 상당히 정교한 시계가 상당히 뛰어난 지능을 갖춘 시계공에 의해 만들어졌듯이 엄청나게 정교한 눈은 엄청난 지능을 갖춘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페일리의 핵심 주장이다.

 

설계 논증은 21세기에도 기독교인이 애용하는 신의 존재 증명 논증이다. 그런데 이 논증을 21세기의 진화 심리학자들도 애용한다. 물론 그 형태는 서로 매우 다르지만 핵심 논거는 상당히 비슷하다. 양측 모두 시계나 눈과 같은 특별한 구조에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 특별한 설명이 무엇인가?”에서 둘은 서로 갈린다. 기독교인은 신을 끌어들이고 진화 심리학자는 자연 선택을 끌어들인다.

 

내가 좀 더 꼼꼼하게 검토하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2012년에 공인 교과서로 인정 받은 19 종 교과서(『과학』 7 , 『생명 과학 II 4, 『생물 II8 ) 어디에서도 설계 논증을 다루지 않은 것 같다.

 

 

 

둘째,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것도 별로 없다. 진화의 증거를 그냥 나열하는 것보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 형식으로 다루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그리고 가능하면 교과서를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덜 피곤하고 학습 효과도 좋다.

 

학생들이 진화의 증거를 그냥 외워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상당히 따분해질 가능성이 크다. 반면, 같은 반 학생들이 창조론자와 진화론자로 편을 갈라서 서로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면 생물 시간이 더 활기찰 것 같다.

 

물론 논쟁을 통해서 공부하는 것은 비판적 사고력을 기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셋째, 교과서에서 창조론을 다룬다면 창조론을 옹호하는 고등학생을 계몽할 가능성이 더 크다. 나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창조론을 받아들이는 한국 상황에서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교과서에서 창조론의 논거와 그 약점을 상당히 깊이 있게 다룬다면 적어도 똘똘한 고등학생 기독교인은 기독교식 설명에 의문을 품을 것이며 목사나 신부를 찾아가서 더 나은 논거를 알아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 결국 성직자들도 한심한 논거 이상을 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넷째, 창조론/진화론 논쟁은 과학 철학 쟁점(특히 칼 포퍼의 반증주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창조론자들은 인간에게는 맹점이 있는데 오징어에는 없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신이 오징어를 인간보다 더 사랑했단 말인가? 창조론자들은 또한 수천만 년 된 공룡의 화석을 설명해야 한다.

 

맹점이 있는 눈이 바보 같은 설계라는 점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생리학을 무시해야 한다. 공룡 화석이 수천 년이 아니라 수천만 년 되었다는 점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방사능 연대 측정법을, 즉 물리학을 무시해야 한다. 그러면 창조론자는 자신이 점점 더 바보 같아 보인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창조론자에게는 다른 전략도 있다. 신이 마치 수천만 년 전에 생긴 것처럼 공룡 화석까지 창조하였다고 주장하면 된다. 맹점의 경우에도 신이 기분이 울적해져서 그냥 그렇게 만들었다고 우기면 된다. 하지만 이 전략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어떤 반증도 허락하지 않는 천하무적 가설이라는 점이 문제다. 이런 전략을 쓰는 사람에게는 어떤 화석이 발견되어도 통하지 않는다. 그런 화석도 다 신이 그런 식으로 창조했다고 말하면 된다. 이런 사람에게는 현생 생물의 온갖 흔적 기관을 들이대도 통하지 않는다. 신이 기분 나빠서 그냥 그런 식으로 창조했다고 말하면 된다. 포퍼는 이런 식으로 반증을 전혀 허락하지 않는 가설을 과학 가설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나는 이런 면에서는 포퍼가 옳았다고 생각한다.

 

 

 

다섯째, 동물은 진화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진화 생물학으로 설명하기를 꺼리는 사람들, 또는 인간의 육체는 진화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진화 생물학으로 설명하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창조론자와 어떻게 닮았는지 따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내가 보기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여성주의자(feminist)들 중 상당수가 말로만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진화론의 핵심 함의 중 하나(인간의 행동, 정신, 사회도 진화의 산물이다)를 거부한다. 인간을 특별히 따로 창조했으며, 인간의 육체가 티끌에서 비롯되었지만 인간의 정신(또는 영혼)은 고귀한 신의 형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구약 성경의 정신은 21세기의 많은 자칭 무신론자들의 마음 속에 약간의 변형을 거쳐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과학 교과서에 창조론이 실리면 처음에는 기독교인들이 매우 좋아할 것이다. 자기 이야기를 실어 주니까. 하지만 그것을 계기로 기독교를 믿는 고등학생들이 창조론과 진화론의 차이와 장단점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고 공부하는 일이 많아지면 기독교인들이 전혀 바라지 않는 일이 일어날 것이 뻔하다. 창조론은 진화론에 비해 너무나 한심하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고 토론하면 할수록 창조론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 때가 되면 기독교인들은 교과서에서 창조론을 빼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남겨 두라고 할 수도 없는 진퇴양란에 빠질 것이다. 이 때 실컷 약 올리면 된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하디-바인베르크 법칙까지 다루고 있었다. 물론 중요한 법칙이다. 진화 생물학을 깊이 공부하려면 결국 개체군 유전학(population genetics, 집단 유전학)을 배워야 하며 하디-바인베르크 법칙은 개체군 유전학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관련 학과를 전공하지 않는다면 평범한 학생이 그런 것까지 배워서 도대체 어디에 써 먹을 수 있을까? 대학 입시 빼고는 써 먹을 데가 전혀 없어 보인다.

 

나는 고등학교 과학 시간에 우선 가르쳐야 할 것은 교양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 해당 학과 전공자를 위한 전문 교육보다는 교양인으로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교양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양 과학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현대 과학의 성과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과학하는 법 즉 과학 철학을 배우는 것이다. 미신(또는 종교)과 과학이 어떻게 다른지 사례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과학 철학의 첫걸음이다. 창조론/진화론 논쟁은 이런 점에서 훌륭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종교인의 비율이 1%도 안 되는 세상이 되었을 때 누군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창조론을 굳이 실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나도 굳이 그 사람의 의견에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덕하

2012-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