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사회 게시판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삶에 있어서도 가장 고통이 컸던 나라가 조선이고 가장 가난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새로운 것이나 창의적인 생각이 발을 붙일수 없도록 만들었고 어떤 위대한 인물도 귀양이나 삭탈관직 심지어 부관참시를 면한 사람이 드물었던 나라이다.
올바르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함과 모략으로 죽은 나라가 조선이다
그리고 백성에 대한 약속을 헌신짝 처럼 버린 나라가 조선이고 입으로는 민심이 천심이고 백성이 어떻고 입만열면 외치면서도 백성들을 가장 못살게 굴었던 나라가 조선이다
신라나 고구려 백제는 찬란한 문화를 남기고 일본에게도 물려주었지만
고려는 금속활자와 팔만 대장경 대몽항쟁이라는 역사속의 굵은 선을 남겼지만
조선은 세종의 개인적인 특별한 관심으로 한글을 창제한 것만 제외하면 자랑할만한 것이 없다
왕실의궤나 조선왕조실록 이런것은 그냥 왕실을 보위하기 위한 과정에서 생겨난 소산물로 그것의 역사적 가치는 있지만 창의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백년안에 임진왜란 병자 정묘호란의 전란을 겪으면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왕과 신하들의 의식과 군비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실력이 없으면 무륲이라도 끓어야지 백성들만 어육이 되도록 만들었다
임진왜란때는 의병들이 불같이 일어났지만 병자호란때는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고 한일합병때 의병들도 사실 별로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서울 진공작전이라는 것도 알고보면 말도 안되는 수자였고 가장 극렬하게 일어났던 호남지역 의병도 2000의 일군 토벌대에게 겨우 100여명 남짓 사살당했을 뿐이다
이에 비해 동학때는 십만이 넘는 농민이 일어났는데 이런 차이가 어디에서 기인했는가?
바로 임진왜란때 유성룡의 시책으로 의병에 자원해서 왜군의 수급을 벤 사람은 종은 면천시키고 평민은 관작을 준다고 약속했다가 살만해지니 없던 일로 만들어 버렸고 의병장들은 김덕령의 경우처럼 매맞아 죽거나 곽재우처럼 산으로 숨어버렸다
일본 정창원 문서에 나온 신라시대 어느 마을의 종의 수는 인구의 2%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중기에는 인구의 70%가 종이었다
그넘의 종모법때문이었다
아시다시피 종이나 양반은 세금이나 군역의 부담이 기본적으로 면제되었다
양반도 형식으로는 군역을 져야했지만 유학의 경우는 말하자면 연기혜택을 주었으니 양반들이 하는 일이 밥먹고 공부하는 일이라 모두 유학이라 군대가는 넘이 없었고 오늘날도 우리나라 상류층의 병역면탈은 유서가 아주 깊은 것이다
종은 국가에 아무런 요역이 없었으니 인구의 70%가 세금을 안내는 무산계급이고 그들은 노력으로 양반에게 봉사하였고 양반은 쥐꼬리만한 토지세만 내면 되었으니 나라가 온전하게 굴러가는 것이 이상하다
조선시대 영의정의 월급이 기억이 희미하다만 콩이 열가마 쌀이 스무가마 베가 삼십필 뭐 대충 이런정도로 우리가 사극이나 실제로 남아있는 양반 세도가들의 대 저택은 유지할 수 없는 월급이었다
그래서 황희나 맹사성이 비오는 집에서 살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고 영의정이 이정도니 나머지 관리들은 말해서 무엇할 것인가?
결국 ㅇ요령껏 알아서 해먹고 찍히면 탄핵받아 귀양가거나 관직이 날라갔던 것이니 주위 사람 눈치보느라 바른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게 나중 정조이후로는 양민의 수가 70%가 넘고 일부 기록에는 양반이라고 했는데 말만 양반이지 실은 양민이라해야 옳을 것이다
본래 양반과 양민은 신분적 차이가 없고 다만 사대부라는 학문을 하는 차이만 있던것이 어느덧 신분 질서가 된 것이다
좌우간 시간이 흐를수록 종의 수가 늘어가게 되어있고 조랑말 반마리 값이 종의 몸값이었으니 이런나라가 또 있었을까 싶다
4천년전 성경에 나오는 종의 몸값이 은30양이었던걸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가격이다
그만큼 종이 흔했다는 이야기다
이게 바로 유교를 숭상하고 성리학을 신주단지 모시듯하고 공맹의 도를 쫒았다던 조선선비들의 위선에 쩐 조선의 모습이다
나는 일본과 한국전쟁이 아니었으면 지금도 한국사회는 이만한 발전은 물론 여전히 양반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청백리중 제명에 죽은 사람은 몇 안되고 나중에 모두 모략으로 귀양이나 사약을 받았다
황희나 맹사성은 물론 나라를 구한 유성룡 이순신등등 웬만한 인물치고 귀양 대여섯번 안간 사람이 없고
사약을 받거나 삭탈관직을 당했다
남이나 조광조나 정약용등 참신한 인재들중 무사하게 수를 마친사람이 누가 있는가?
심지어 노론의 영수 송시열조차도 사약을 받고 죽었으니 말 다한거다
인재들을 이런식으로 다 모략하고 죽여버리니 나라가 제대로 경영이 될 리가 없다
어떤 이는 정조를 대단한 개혁군주라고 하지만 자세하게 다른면을 보면 그다지 개혁적이지 않고 다만 왕권강화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이 왜 이리 변화가 없고 백성은 고단했는데 오백년을 유지했을까?
바로 백성이 항거할 힘조차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북한의 김씨왕조를 보면 답이 나온다
주체사상으로 무장하고 무력으로 위협하고 반란을 기도할 세력을 가만두지 않으니
조선시대는 성리학으로 단속하고 가난한 백성들이 힘을 모을수가 있는가?
양반들은 구태어 현실을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하니 당연히 백성들의 힘만으로는 왕조를 엎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강화도령이었던 철종은 부끄러움을 알아서 자신의 어진을 그릴때 일월봉황도를 그리지 말라했다던가
조선이 이리된것에는 성리학의 폐단이 가장 크며
다음으로는 신하와 왕권의 견제와 다툼이 너무 심했던 것이고
그 과정에서 왕은 왕대로 신하를 총애했다 버렸다하며 이용했고 신하들은 신하들대로 견제하며 끈질긴 주청으로 결국 사람을 죽이기를 밥먹듯 하였던 것이다
세번째로는 종모법으로 종의 자식은 종이되어야 하는 모진 법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당대의 신하중 어느사람이 세계 어느나라에 자신의 동족을 저렇게 대대손손 종으로 만드는 나라가 있느냐고 탄식을 했을 것인가?
이것참...
너무 자의적이고 왜곡만 말씀하시니...
그래, 조선이 어떻게 가장 가난한 나라였습니까?
역사 조금만 공부해도 농업 생산성이나 기타 상공업에서
조선이 다른 어떤 왕조보다 훨씬 더 발전하였던 것을 쉽게 알수 있는데...
더우기, 조선이 언제 남의 나라의 전격적 지배를 받은 유일한 왕조?
설마 일제시대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일제시대는 조선왕조가 망한것입니다.
마치 고구려가 당에게 망했듯이요.
그리고 고구려지역은 아예 중국땅이 되었으니,
님말씀대로라면, 고구려는 아예 싹을 말려야 할 왕조겠네요..
아, 고조선도 있네요. 고조선도 중국에 망해 수백년간 한사군이 설치되서
중국이 다스렸으니, 고조선도 아예 뭔같다고 말씀하셔야죠..
그리고, 우리나라 왕조역사상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자,
현대사회에서 너무나도 중요하며, 소중한 한글하나만 가지고도
조선왕조는 그 업적이 찬란할수 있는것입니다.
또하나, 인재들이 죽음을 당한것이 어찌 조선시대만 있겠습니까?
다른 왕조들 또한 마찬가지지만, 조선시대때 많은 사람들의 이름까지
다 수 있는것은 조선이 그만큼 역사기록의 충실하였고, 방대한 자료들을
후손에게 넘겨주었기에 가능한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백성들이 항거할 힘자체가 없었기에
500년간 지속되었다는 말은 그야말로 코메디이네요..
근대이전까지 어느 나라도 일반 백성의 힘만으로 왕조를 뒤엎은적이 어디있습니까?
원래 없는것을 가지고, 조선운운하시니 황당그자체네요..
그래, 고조선, 고구려, 백제,신라,고려에서 일반백성의 힘만으로 왕조가 뒤엎퍼졌나요?
조선시대때야 말로 어느 왕조보다 농민봉기가 가장 많았던 시기였습니다..ㅋ
맞는 말도 있고 틀린 말도 있는데.....
일단 제도상으로는 당시 세계 어느나라에도 비교가 안될만큼 선진국이었지요.(거의 사민주의적 개념 <--이거 예전에 주장하다가 네티즌들에게 몰매 맞고... 깨갱.... 그러나 그렇다고 생각함. 특히, 정약용을 진보적 인물라고 했다가 역사 초절정고수에게 거의 난타 당한 쓰라린 기억이... ㅠ.ㅠ;;;)
참조로 난 토정 이지함을 제일 존경함. 가장 백성을 위한 사람임. 통계학의 진수인 '토정비결'은 바로 이런 백성을 헤아리는 마음에서 나온 것임.
황희가 청백리의 상징으로 된 것은 역사의 왜곡. 그도 아마 어떤 비리에 연루되어서 벼슬자리에서 물러났다가 컴백한 경우. 세종대왕은 부민고소방지법이라는 악법을 제정, 결국 지방관료들의 토색질이 가능하게 하고 결국은 조선이 약하게 되게 만듬.
그리고 조선이 그렇게 약한 나라는 아니었음. 을사오적들의 반칙 때문에 나라를 빼앗긴 것임. 한미FTA를 걱정하는 이유가 바로 제도 그 자체보다 운영상의 내부의 적 때문에 악용될까 그런 것임.
오죽하면 당대의 신하중 어느사람이 세계 어느나라에 자신의 동족을 저렇게 대대손손 종으로 만드는 나라가 있느냐고 탄식을 했을 것인가? --> 이건 이성계가 열받아 그런 것임. 원래 그런 법이 없었는데 조선을 개국하고 과거를 보았는데 선비들이 과거에 응시를 하지 않았음. 그래서 열받은 이성계가 신분제 세습(구체적으로는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을 하고 당시 과거에 오지 않은 '가문'은 영영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함.
조선이 망하게된 근본 원인은 도학자인 정도전이 '선비들'이 학문에만 정진하라는 의미에서 나라에서 받은 토지를 세습하게 되었는데 이게 멜데스의 '식량은 산수급수적으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어' 토지가 항상 모자르게 된 것에 연유.
연산군, 중종반정, 조광조..... 인조반정 등등...의 내면은 결국 '토지 빼앗기'였음. 장희빈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농업위주의 사회'와 보부상으로 대변되는 상업의 충돌로 보면 됨. 장희빈이 이겼어야 함. 사랑의 라이벌 인현왕후가 바로 민씨 가문인데 명성황후(민비)의 조상임. 민씨가 의외로 조선에서 민폐 끼친 것이 많은(에구구... 민씨들 데모할라...)
조선이 농민봉기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이유는 한명회가 만든 오가작통법 때문임. 북한의 오호담당제가 이 오가작통법을 모방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본인은)확인하지 않아서 맞는지 모름. 이 오가작통법은 아마 숙종 때 더 강화가 되어 백성들 감시제도로 잘 활용된 것으로 암. 이 제도가 특히 천주교 도래 시 탄압의 도구로 아주 유용하게 활용됨.
조선의 청백리가 적었다는 것은 식민지 사관임. 청백리 많았음. 식민지 사관에 의하여 존경받을 선비들은 역사책에 소개 안되서 그렇지. 어쨌든 만성적인 토지가 적어 양반들끼리 싸운 것은 사실임.
뭐 등등인데.... 흐강님이 생각보다는 많은 분야에 만만찮은 지식이 있는 분이라는 것이 엿보이는데.... 이 글은 '구라'가 좀 많이 섞였음. 식민지 사관과 성리학..... 기독교 특히 개신교와 앙숙인 종교관이 좀 많이 반영된듯함. ㅋㅋㅋ
출처(ref.) : 정치/사회 게시판 - 우리 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나라 조선왕조 - http://theacro.com/zbxe/free/604382
by 흐르는 강물
아참, 나는 이게 호남을 천시하게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함. 예전에 한양의 상권을 호남이 잡았지만 정치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약해 질시어린 폄훼가 호남차별의 원인 중 하나라고 했는데 이성계의 신분제 세습.....
당시, 호남에서 과거보러 온 사람이 적었고 이는 쿠테타에 의한 정권을 바꾸는 것에 일종의 항의인데 그 결과 호남은 '양반 가문'이 네 개(로 기억) 밖에 없는 것으로 암. 즉, 반골성분이 다분하다는 의미로 통치권에서는 제도적으로 천시할 필요가 있었음. 호남차별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함.
그리고 역사가 부끄러울 게 뭐 있습니까? 제가 초딩 때 오줌 좀 싼 역사가 있는데 그럼 저는 지금까지 그걸 부끄러워해야 합니까?
맞는것도 있고 틀린 부분도 있습니다
제가 자료를 정확하게 확인하고 연구하고 쓴 글은 아니니까요
또한 개인의 역사적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제 글의 요지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개인의 창의성을 억압하고 백성들의 신분상승을 억제하고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부분에서 정책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공리공론이나 백성들을 위한 정책대결이 아닌 권력을 위한 싸움이 더 컷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성리학의 명분론에 의한 필연적 결과로 봅니다
예를 들면 예송논쟁으로 권력이 바뀌고 사람이 죽어나가고
중요한 당쟁이나 역사적 사건 사화등이 백성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한 방법론에서 충돌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과 명분싸움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도 이어져 여야가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농성하고 싸우기보다는 누가 더 권력을 잡는데 유리한가랄지 이념이나 명분에서 우위에 서기위한 정치적 의제로 인한 싸움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조선시대 당쟁이나 붕당의 긍정적인 측면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나름의 수준도 있었지만 결국 백성들의 삶에는 도움이 안되었고요
조선이 가난한 나라라는 것은 조선 중후기 통계로만 보면 세계에서 지디피가 그리 떨어지지 않는 나라임은 맞지만 빈부격차로 소수의 지배계급만 빼면 일반 백성들의 삶은 너무나 열악하였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요지는 이렇습니다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신분제가 조선시대만큼 엄격하지 않고 상승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성에 대한 평등도 훨 높았고 조선 초기만해도 재산도 같이 분배받고 제사도 참여하였고 족보에도 올랐습니다
그러나 임란이후 조정에선 이반된 백성을 다잡기 위해 성리학적 질서를 강요하고 통제하여 결국 남녀평등이 무너지고 신분제가 강화되었고
늘어나는 양반들의 수와 한정된 관직때문에 당쟁이 격화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백리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청백리들 대다수가 귀양을 가고 편한 노년을 보내지 못할 정도로 모략과 근거없는 탄핵이 횡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조선 왕조실록을 보십시오
주로 신하들이 어떤 이유로 탄핵받고 귀양가고 웬만한 사람치고 제명에 산 사람 있는지
그리고 난중일기를 보십시오
이순신 장군은 군사들이 굶어죽는 것을 보면서 나는 오늘 저녁도 입에 밥을 꾸역꾸역 먹었다고 아픈 마음을 적고 있습니다
또한 소금을 굽고 둔전을 하여 자급자족하고 싸우면서도 조정에 세곡미를 올려 조정 살림을 도왔습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게 조선이라는 나라가 국가가 맞나 할 정도입니다
이건 아무런 책임은 안지면서 관리나 백성에게 책임과 처벌만 하는 그런 막장나라입니다
조선이 을사오적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국가를 버렸기에 그리 쉽게 망한 것입니다
한글창제 대단합니다
다만 저는 조선이라는 나라 전체와 그 체제를 말하고자 합니다
세종대왕이 아니라면 창제가 되었으며 그후에도 사실상 언문으로 격하되어 부녀자나 상민들만이 사용하던 그런 문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한글의 발전이 400년동안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정부의 지원도 못받고
따라서 한글은 세종의 개인업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정조이후 70%가 양반이라고 하는데 그건 맞는 말입니다
다만 그 양반이 진짜 양반이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족보를 사거나 기타방법으로 양반행세를 하는데 결국 그 돈은 양반 족보에 넣어줄수 있는 힘이 있는 양반의 호주머니를 배불리게 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말이 양반이지 누가 인정하지 않는 자칭 양반이고 양민과 별 차이가 없으며 의무는 그대로 지고 있었습니다
족보를 사고 돈으로 사고 해서 양반이 되었다고 그들이 유교를 압니까?
아니면 주위에서 양반으로 인정을 해줍니까
자기만족이지요
그나마 나중 대원군때 공명첩을 팔고 그래서 뭐 집안마다 통정대부 가선대부 없는 집안이 없습니다
사실상 우리나라 사람들의 족보 70%는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어보십시오
한나라의 사신 행렬이 얼마나 초라한지 상단의 행렬만도 못한
그리고 사람대접이라는 것이 짐승만도 못한 예를 들면 말고삐를 잡고가는 종이 말 발굽에 발이 다쳐서 걷기 힘들면 그 먼 외국에 돈도 주지 않고 그냥 두고 갑니다
중국사람들이 오히려 동정을 하고
그런일이 비일비재하고 중국만해도 노비는 당대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대대손손 내려오고 양반도 벼슬한 사람만 양반이고 3대째 벼슬이 없으면 양반이 될수가 없는데 무시되었습니다
그렇게 수백년동안 중국을 드나들면서 중국의 넓은 도로 벽돌 이층집들 선진문물을 보았건만 우리나라에 도입해서 적용한게 뭐가 있는지요
구한말 선교사들의 기록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아 물론 파리도 1800년대 하수도 만들기 전에는 요강을 길바닥에 버린 시기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걸 나무라기엔 우리가 너무 심한거지요
난중일기 열하일기만 읽어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우리 역사에 가장 무능하고 부끄러운 나라라는 것은 알 것입니다
그중 우리나라가 아마 중국보다 더 철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도는 힘있는자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필요할 때만써먹는 억압의 도구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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