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http://media.daum.net/entertain/cluster/view?clusterid=600187&newsid=20120619012604118

 

"관능이란 것은 가슴 속에 폐허가 느껴지는 느낌이다"

 

 박범신. '은교'의 원작자가 이렇게 손에 잡힐 듯이 멋진 말을 했다는 데. 

 

2. 박범신 인터뷰 기사를 읽고 떠올린, 몇 개월 전에 게시판에 끄적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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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하다'와 '색기가 흐른다'는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저는 이 두 가지 표현이 좀 다르게 느껴집니다.  '색기가 흐르는 여자'를 보면 (그 여자가 하는) 노골적으로 성적인 행위, 제스쳐가 자연스럽게 연상이 되지만 '섹시한' 여자를 볼 때는 그런 연상이 잘 안되더군요. 

 

 예를 들어서 백xxx님이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셨지요. '유이와 현아가 자신에게는 제일 섹시해 보인다'라구요.. 근데 저는 개인적으로 현아에게는 '색기가 줄줄 흐르고' 있다고 느끼는데, 유이에게는 그런 느낌은 전혀 안들고, '섹시하다'는 느낌도 별로 안듭니다. 처음에 현아는 적나라한 노출 컨셉인 반면 유이는 그렇지 않아서 그런가 싶었는데...좀 더 생각해 보니 그것보다..더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더군요. 바로 여성의 눈빛입니다. 유이는 눈빛 자체가 매우 선하고 맑은 느낌이라서...유이가 노출 컨셉으로 가슴이 확 패인 의상을 입고 나오지 않는 한, 그런 색기를 느낄 여지가 앞으로도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반면 현아는...적어도 무대 위의 모습만 봐서는...뭐랄까.. 언제 어디서라도 자신은 준비되어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반면 셀카로 찍은 것 중에 (백치미가 제법 섞인) 선한 눈매를 부각시켜 놓은 사진을 보면, 이 현아가 그 현아 맞나하는 느낌이 들 정도이지요.

 

 '섹시함'과 '색기 넘침'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런 필요를 실제적으로는 별로 느끼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섹시함이란...제가 보기엔 이런 의미에서 남성들에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숫컷'으로서의 본능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충격을 줄 정도로 순간적인 성적인 매력, 즉 색기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섹시함이란 '여성이 눈빛을 통해 남성에게 어필하는 기술' - 그것이 대중이 되었든 자신이 사랑하는 한 남자가 되었든 - 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섹시함은 한마디로 그 여자가 가진, 눈빛을 통해 표출되는,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성적인 아우라 같은 것이지요. 아우라는 사물 안에 존재하지만, 그 사물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을 감싸는 주변 환경과 관찰자의 시선 모두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 들이지요. 암컷의 육체를 정복하고 싶어하는 숫컷의 성적인 정복욕은 오히려 섹시함을 느낀 이후에 오는, 체념 비슷한 감정의 잔여물입니다.

 

섹시함의 본질은 '여성이 남성을 가지고 싶다고 순수하게 욕망하는 것',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그 은밀한 욕망이 눈빛을 통해 표출되고, 그 시선에 남성이 반응될 때, 여성은 섹시함이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남성이라는 타자가) 자신을 가져주기를 원하는 것'과, '자신이 가지고 싶다고 욕구하는 것', 이 둘은 엄연이 다르다고 봅니다. '색기가 흐르는 여자'와, '섹시한 여자'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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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슴 속에 폐허가 전해지는 느낌' ; 박범신이 말하는 관능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자신이 사랑하는 남성에게서 어떤 것도 원하지 않을 때에만- 그것이 물질적인 만족 뿐만 아니라 그 남성과 함께 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정신적인 충족감일지라도-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의 관능성과 섹시함은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소외시키는 것이고, 또 여성성 안에서 영구적으로 서로 불화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관능성에 관한 소설적 사례; 레마르크의 개선문에 나오는 조앙 마두. 그리고 보들레르의 시 전반을 흐르는 창녀 잔느의 모티브. 덧붙여, 매춘 그 자체가 사회적인 관계의 모든 인간적인 황폐함들이 녹아들어가 있는 사회적인 도덕성의 틀이라는 점은 부단히 상기될 필요가 있다. 

 

4. 박범신의 말대로라면, 남성이 여성에게서 관능성을 발견할 때, 그 내적인 지진의 진앙은 섹시함의 경우에서처럼 여성의 욕망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인 '나' 안에 관행적으로 정립된 모든 인간적인 관계가 순간적으로 잊혀질 정도로 자기 파괴적인 체험에 놓여 있다. 그것은 타인 안에서 관계가 구제하지 못하는 자신의 외로움을 보는 경험이다. 

 

이러한 관능성에 관한 영화적 사례: 제레미 아이언스의 데미지. 불륜의 껍질을 뚫고 들어가다보면 외진 구석에 오래도록 방치된, 인간적인 빛의 외로움들이 서로 만나고 있다. 그리고 그 빛들은, 서로 욕망하지 않기 때문에 온전히 만날 수 있다. 이러한 관능성에 관한 또다른 영화적인 사례: 화양 연화와 색 계. 이 두 영화는 철저하게 남녀 관계의 관능성에 관한 영화다. 덧붙여 떠오른, 관능성에 관한 소설적인 사례: 상실의 시대. 

 

5. 현실 속에서 남녀 관계의 이런 관능성이 과연 가능한가? 문제는 자신이 성적인 인간임을 자각하면 자각할수록 그 외로움은 깊어지고, 그에 비례하여 더 많은 관능성이 요구된다는데 있다. (물론 관능성이 순전히 인간의 성적인 특질의 반대 급부라는 뜻은 아니다) 관능성에 관한 영화와 소설들, 음악들이 넘쳐나는 이유는 여기서도 발견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