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보통 그 시신을 존중해 준다. 가족 중 누가 죽었을 때 “오늘은 사냥을 나갈 필요가 없겠군. 죽은 둘째 아들을 요리해 먹으면 되니까”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문화권은 없어 보인다.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시신을 먹는 문화권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긴 한데 종교적이거나 주술적인 이유로 식인을 하는 듯하다.

 

 

 

시신을 이렇게 존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적어도 세 가지 가설이 있다.

 

첫째, 문화 가설 또는 사회화 가설에 따르면 인간은 가까운 사람의 시신을 존중하도록 사회화되었다. 물론 해당 문화에서 시신을 존중하는 풍습이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둘째, 부산물 가설에 따르면 시신 존중은 신체 존중의 부산물이다. 살아 있는 식구의 신체를 존중하는 것은 명백히 적응적이며 인간을 비롯한 온갖 동물이 식구 같이 가까운 사람의 신체를 존중하도록 진화했을 것이다. 그런데 죽은 직후의 모습은 살아 있을 때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따라서 시신을 존중하는 것이 부적응적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신체 존중 기제 때문에 시신까지도 존중하는 것이다.

 

셋째, 적응 가설에 따르면 시신(정확히 말하자면, 시신 같이 보이는 신체)을 존중하는 것이 적응적이기 때문에 인간을 비롯한 여러 동물이 시신을 존중하도록 진화했다.

 

이 세 가지 가설이 서로 완전히 배타적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세 번째 가설은 설명이 필요하다. 시신을 존중하는 것이 어떻게 적응적일 수 있단 말인가?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정보와 판단이 애매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대 의학은 다시는 살아날 가망성이 없는 상태에 빠졌을 때를 지극히 정밀하게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최근에야 가능해진 일이다.

 

죽음과 관련하여 애매한 경우가 있다. 숨을 쉬지 않거나 심장이 뛰지 않을 때에는 보통 죽었다고 볼 수 있지만 때로는 다시 살려낼 수도 있다. 기절한 사람은 얼핏 보면 죽은 것 같다. 죽은 줄 알고 땅에 묻었는데 다시 “살아나는” 사례도 있다. 요컨대, 과거에 인류와 다른 동물이 진화할 당시에는 “다시는 살아날 가망성이 0%인지 여부”를 확실히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죽은 것처럼 보일 때에도 당분간 그 신체를 잘 보살피는 것이 적응적일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신체를 잘 보살피는 데 드는 비용은 그리 크지 않다. 반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죽었다고 판단하고 친족을 요리해 먹는다면 번식의 측면에서 막대한 손해를 본다. 따라서 죽은 것처럼 보이다가 살아나는 경우가 별로 없다 하더라도 그 신체를 어느 정도 기간 동안 잘 돌보는 것이 적응적이다.

 

야생 엄마 침팬지가 죽은 어린 자식을 며칠 동안 데리고 다니는 것이 관찰된 적이 있다. 확실히 죽었는지 여부를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면 며칠 동안 데리고 다니는 것은 적응적인 것 같다. 어쩌면 침팬지가 죽은 것처럼 보이는 친족 등의 신체를 존중하도록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간도 그런 식으로 진화했는지도 모른다.

 

 

 

문화 가설은 왜 문화권마다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이나 보존하는 기간이 다른지를 설명해줄 수 있다. 하지만 왜 모든 문화권에서 가까운 사람의 시신을 존중하는지를 부산물 가설이나 적응 가설에 의존하지 않고 문화 가설로만 설명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왜 문화가 대체로 그런 방향으로 생겨먹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결국 생물학적인 수준을 파고들어야 할 것 같다.

 

 

 

인간의 경우 적응 가설과 부산물 가설을 가릴 수 있는 방법은 당장은 떠오르지 않는다. 잘 생각해 보면 검증 방법이 있을 것 같다.

 

인간보다 훨씬 단순한 동물의 경우에는 최적화 이론을 적용해서 정량 분석에 도전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 어느 정도 기간 동안 또는 신체가 어느 정도 상태가 될 때까지 존중하는 것이 적응적인지를 이론적으로 따져보고 그것을 실증적 데이터와 비교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덕하

2012-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