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피노키오님께서 목포의 눈물에 얽힌 어머님의 고생하셨던 삶을 짧게 반추하셨는데.....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의 굴곡진 삶을 그대로 반영한. 한민족의 '한과 애환'이 그려진 노래입니다. 저는, 일제 강점기 기간 동안 발표된 노래 중 최고의 곡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뽑습니다. 당시 음반 판매량이 25만장이니 생활수준으로 판단한다면 국민가수 김건모가 불러 220만장의 레코드를 팔았다는 '잘못된 만남'보다 더 인기가 있었다고 해도 무방할겁니다.

 

피노키오님이 언급하신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예전에 제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자펌'합니다.

 

 

글쓰기에 있어 아마추어가 프로보다 좋은 점은 이런 무거운 주제에도 자신의 의견 개진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물론,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는 현실에서 아마추어라고 해서 글을 마구 써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아, 나는 글을 마구 쓰는 경향이 있다. 후다닥 쓰고 교정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다. 이거, 최소한 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에게는 실례인거 아는데 여든살 버릇 세살 때 배웠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잘 안고쳐진다.

 


아참, '내가 여든살 버릇 세 살 때 배웠다'라고 표현하면 '또 속담도 모른다'라고 스토킹하는 인물들은 없겠지? 예전에는 호사다마에서 다마는 일본말이니까 구슬로 바꾸어 써야 하며 따라서 호사다마가 아니라 호사구슬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했다가 삼일 밤낮을 스토킹 당한 적도 있다. 누굴 원망하랴? 썰렁한 유머 이야기한 내 죄이거늘.....

 


어쨌든 아마추어가 프로보다 좋은 점은 이런 무거운 주제를 다루어도 그 '결과'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무시 당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견해'로 읽혀지기 때문에 팩트에 대한 시시비비나 구성 상의 시비는 있고 다른 의견들이 있을지언정 큰 부담은 느끼지 않아도 된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만일 내가 나름 이름있는 음악평론가인데 이 포스팅의 제목과 같은 주제의 원고 청탁을 받았다면 백번 사양했을거다. 십여만원 벌자고 매를 버나? -_-;;;

 

한그루 글쓰기의 유일한 단점인 서론 길게 뽑기가 또 작동되었는데 과연 일제 점령기 중 최고의 가요는 무엇일까?

 


내가 요즘 일제 점령기 시대의 가요를 종종 듣는 이유는 나의 한국 현대사 공부의 순서를 따라 지금 일제 점령기 시대를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 중 대한민국의 19세기말에서 20세기말까지 백여년 간의 역사보다 더 파란만장한 역사가 있을까? 제대로 공부하려면, 최소한 팩트만을 확실히 알게 되는데도 만사 젖혀두고 삼년은 공부해야 '일견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나의 시선을 어지럽히는 수많은 진영논리에 의거한 주장들이 이 백년 동안의 역사를 기술한 책들의 대부분이다. 물론, 요약본 밖에 읽지 않았지만 북한이 집대성한 '갑오농민혁명'이 북한이라는 체제를 옹호하기 위한 진영논리에 의하여 주장한 것이며 그동안 수구라고 배웠던 '척사파'가 실제로는 현실감각이 있었으며 '개화파'야 말로 수구라는 새로운 관점, 그리고 명성황후는 나쁜 인물........이라는 등의 머리를 쥐쌀만한 시각적 변화가 있었다.

 


아, 오해는 하지 마시라. 명성황후는 나쁜 인물이라는 내 주장이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죽인 것이 잘한 것이라는 맥락은 아니니 말이다. 논점이 다르다. 서로 다른 논점이라는 것이다. 명성황후의 선악에 관계없이 일본 낭인들 그리고 그들을 사주한 일본 제국은 나쁜 것들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아니 나쁘다. 그건 '팩트'이다.

 


어쨌든, 이런 구비구비 질척거리며 훌터온 역사들.....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위하여 일제 점령기 시대의 가요를 들으며 나름 분석을 해보고 있다. 처음 분석하는 각도는 31운동을 계기로 강압적인 통치에서 문화적인 유화정책을 썼다는 일제의 정책, 그리고 대동아전쟁(이게 아마 친일파들이 즐겨하는 표현이지? 그러니까 제2차 세계 대전 -_-;;;)을 거치면서 우리 가요가 어떻게 변화를 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분석은 처음부터 암초를 맞이하여 삼천포로 빠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이고 술 한잔 걸치면 부르는 '황성 옛터'의 그 옛터가 신라 시대나 백제 시대의 성터가 아니라 바로 중국에 있는 만리장성이라는 사실을 접하고 나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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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 옛터에 밤이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이밤 못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어 있노라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처지를 가슴속 깊이 안고
이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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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를 아는 분들은 느끼겠지만 곡조가 애절한 것이 아니라 음울하고 궁상맞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한 것 같다. 그러나 곡조는 그렇고 이 가사에 담긴 진짜 의미, 그러니까 일제 점령기 당시 금지곡으로 묶였던 사실 등과 관계없이 역마살, 그러니까 망국의 한을 담은 비운의 민족이 택할 수 밖에 없는 역마살.... 을 그린 것 같아 내 애창곡이 된 것이다.

 


'황성 옛터'가 음울하고 궁상맞다고 했는데 음울하고 궁상맞기로는 난형난제인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역시 궁상맞고 음울한데다가 소름까지 끼친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의 전주와 간주 부분에는 '나레이션' 그러니까 현대로 치면 랩....과 같이 읽는 부분(마치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처럼.... )이 나오는데 그 부분은 얼마나 쪽팔린지 소름이 다 끼칠 정도이다.

 


우리나라 가요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남인수에 대하여는 한번 언급을 했지만 그를 가수로 유명케 만든 애수의 소야곡. 그의 중성적인 음색이 음울하고 궁색맞는 느낌이 어느 순간에는 사라지고 노래 가사와 딱 맞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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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주나 휘파람 소리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못 생긴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마져 싸늘하구나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든고
모두 다 흘러가면 덧 없던 마음
외로운 별을 안고 밤을 새우면
바람도 문풍지에 싸늘하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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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가사에는 포함이 안된 나레이션이 일제 시대에 발표되었던 '오리지날'에 원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해방 후 다시 부른 노래에 추가된 것인지는 명확치 않은데(예를 들어, 음악을 듣는 유료 사이트 2000mp3.com에서는 오리지날에 이 나레이션이 있는 반면에 남인수를 소개한 다른 사이트에서는 나레이션이 없다)

 


이 노래는 저런 이유로, 그리고 저 노래는 그런 이유로....... 나름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역시 김정구의 '두만강'과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일제 점령기 중 최고의 가요가 아닐까? 특히 '목포의 눈물'은 그 가사의 역사성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해방 후 남인수와 동거를 하다 요절을 했으며 남인수와 동거하기 전의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육남매를 우리나라 최초로 라스베가스에 진출하여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스'라는 중창단으로 가수활동을 하게 만든 이난영..... 의 파란만장한 생만큼이나 애절하면서 뜻깊은 노래 '목포의 눈물'

 


이난영의 생애에 대하여는 화첩기행(김병종 저, 효형출판사 2005년 출간-이 책에는 여러 인물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충분히 소장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한권씩 사서 보시도록. 아참, 나는 김병종님과 어떤 관계도 없다. ^^)에서도 기술했지만 지지리 궁상맞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생을 시작한다. 부두 노동자였던 이난영의 부친이었다.

 


목포의 눈물 속에 나오는 유달산은 그 산 밑에는 일본인들과 조선의 부자들이 살았으며 산 중턱에는 부두 노동자 등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그 '희한한 동거'.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이난영. 그러나 가난은 여전해서 제주로 식모살이를 떠났던 이난영의 어머니.

 


그리고 이 어머니를 따라 제주 배를 무턱대고 탔던 이난영은 애절한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고 그 것을 본 한 악극단장의 권유로 이난영은 가수의 길을 걷는다. 일본 오사가까지 가는 우여곡절 끝에 가수 취입을 하게된 이난영. 그 뒤 배경에는 '조선일보'가 있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흐트러져 가는 민족의 정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OK레코드와 손잡고 향토 노래를 응모하였고 그 과정에서 이난영, 그리고 목포의 눈물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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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의 뱃노래 가물 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 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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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의 발표 당시의 원본을 충청투데이에서, 발췌 여기에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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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

문 일 석 작사
손 목 인 작곡
이 난 영 노래

沙工의 뱃노래 감을거리며

三鶴島 파도깁히 숨어드는데

埠頭의 새악씨 아롱저진 옷자락

離別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三栢淵願安風은 露積峰밋헤

任자최 宛然하다 애달ㅍ은 情調

(달 +ㅍ 이므로 ㄹ 옆에 ㅍ을 붙여 작성)

儒達山 바람도 榮山江을 안으니

任그려 우는마음 木浦의 노래

깁흔밤 쪼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짓타 옛傷處가 새로워 진다

못오는 님이면 이마음도 보낼것을

港口에 맷는절개 木浦의사랑

<발표 당시의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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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포의 눈물은 발표하자마자 공전의 히트를 쳐서 당시 18세의 이난영을 스타로 만들었으며 당시의 기록으로는 음반판매만 25만장(생활수준으로 따지면 우리나라 최고의 판매량을 자랑하는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의 220만장을 훨씬 능가한다.)이며 각 다방에는 이 노래를 듣고 배우고 암기하려는 사람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 노래만큼 일제의 탄압을 받은 노래가 있을까? 작사를 한 '문일석'은 구둣발로 짓밟히기를 수차례 당했다고 한다. 문일석은 조선일보가 가사 공모를 할 때 응모를 한 학생으로 나중에 노래가 발표될 때는 '이철은'으로 바뀌어 발표되었다.

 


세 처녀의 전설로 유명한 삼학봉..... 일본으로 공출당하는 조선의 식량과 토산품들을 그냥 쳐다만 보고 있어야 하는 유달산의 가난한 망국인들... 그리고 흥청망청하는 일부 조선인들과 일본인....

 


특히, 노적봉은 바로 충무공 이순신의 지형을 이용한 고도의 심리전이 돋보인 곳이었다.(애후 사전 발췌 주 *1) 그리고 그 임진왜란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 3백년.... 그 이후에 역사는 뒤바뀌어 이제는 속국이 되었으니 어찌 왜구에게 승리를 한 이순신 장군, 임(任)이 그립지 않을소냐?

 


'두만강 푸른 물에'가 망국의 한을 앉은 채 만주로 떠난 민족을 그리워하는 것이라면 떠나지도 못하고 일제의 압제를 온 몸으로 받는 망국인의 설움을 그린 노래가 바로 '목포의 눈물'이다.

 


이난영.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편탄치 못한 삶. 그녀의 자식들인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스가 라스베가스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진출한 가수가 된 이유는 바로 미군 클럽에서 '생계의 방편'으로 채찍을 들고 자식들을 가르쳤다는 일화에서 느끼듯 그녀는 평생을 비운 속에 살다가 우리에게 '목포의 눈물'이라는 이 민족과 운명을 같이할 노래 한 곡을 남기고 간 가수였으며 그 가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일제 시대를 통털어 최고의 가요라고 해도 크게 시비를 받지는 않을 것이다.

 


주 *1) 임진왜란 당시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이엉을 엮어 바위를 덮었는데 마치 그것이 군량미를 덮어놓은 노적처럼 꾸며서, 군량미가 대량으로 비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또한 주민들에게 군복을 입혀서 노적봉 주위를 계속 돌게 해서 마치 많은 대군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게 했으며, 영산강에 백토 가루를 뿌려 바다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쌀뜨물로 보이게 하여 왜적들에게 아군의 군세를 위장하여 왜장이 군사를 돌려 후퇴하게 했다는 것이다. 당시 노적봉을 돌던 전술은 훗날 문화예술로 승화되어, 강강수월래로 발전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