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유머 1번지>>에서 봤던 장면입니다. 무인도에 갇혀 있던 한 남자가 몇 년 후에 무사하게 구출된 후에 어떻게 그 몇 년 동안 언어를 잊지 않을 수 있었는지 인터뷰하는 장면입니다. 그 남자에게 인터뷰하는 사람이 다가가 마이크를 들이대자 무인도에 갇혀 있던 남자는 느닷없이 인터뷰하는 사람의 역할과 인터뷰를 당하는 사람의 두 역할을 하게되는 거죠. 적어도 20년도 더 된 그 장면을 속속 들이 기억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유머 1번지>>의 그 장면을 상상을 해보면, 실제로 인터뷰를 하는 사람이 마이크를 들이대자 첫 대답은 제대로 대답을 했겠지만, 그 다음 장면에서는 난데없이 무인도에 갇혀 있던 사람이 인터뷰하는 사람의 역할을 하게되는 것이죠. 그 남자는 인간의 언어를 잊지 않기 위해 나름 노력을 했지만, 대화 상대자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를 자기의 대화 상대자로 만들어 인간의 대화, 언어를 잊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엔 언어를, 대화를 잃어버리게 된것이죠. (그 무인도의 남자와 관련하여선, 여러 편의 꽁트들이 있었을 터인데, 앞에 쓴 꽁트만 기억에 있네요. <<유머 1번지>>에서 안경쓴 코메디언인데, 술 취한 역할을 아주 잘 하는 이였습니다. 이봉원 같은 이름 있는 코메디언이 아니었던,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코메디언 입니다.)

위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18세기 초반에 쓰인 <<로빈슨 크루소>>에서의 로빈슨 크루소는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인도에 유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이하게도 인간의 언어, 관습, 인간의 사고, 행동 방식을 잊지않습니다. 오히려, 전혀 새로운 인간으로,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적인 인간으로 탄생을 합니다. 경제학적으로는 아담 스미스가 얘기했던 "경제학적 인간"의 전형인, 사적 소유적(possessive) 개인(individual)으로,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인(liberal) 인간으로 탄생을 합니다. 개인이라는 말은 이미 사회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1957년에 쓰인 이안 와트의 <<소설의 발생(The Lise of the Novel)>>의  <<<로빈슨 크루소>>, 개인주의(individual)와 소설>이라는 쳅터에서, 와트는 로빈슨 크루소의 배와 함께 전통적인 사회적 질서는 난파를 하게되고, 그 유폐된 공간, 그 고독의 공간, 그 격리된(isolated) 공간에서, 개인주의화된(individualized) 개인이 탄생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푸코가 <<감시와 처벌>> 등등에서, 공간의 분할, 개인의 격리, 감시의 시선, 가시성이라는 개념들을 통해 말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칸트도 <<판단력 비판>>에서 로빈슨 크루소가 유폐되었던 그 공간을 이야기 하면서, 그 공간에서 근대적 주체가 탄생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어떻게 크루소는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고독의 공간에서 미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였습니다. 소설을 읽기 전에, <<유머 1번지>>에서의 꽁트를 알고 있었고, <<로빈슨 크루소>>에 대한 패러디인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라는소설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들을 몰랐다고 해도, 크루소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납득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아마 그 상황에서 저라면 너무나도 행복하게 미쳤을 겁니다. 비록 "아마"라는 행복한 가정이기는 하지만요...

이러한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는 자유주의적이고, 사적 소유의 주체인 개인이라는 허구에 맞다아있는 허구일 뿐이죠. 그러한 개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외로운 섬에 갇혀 있을 때에도, 스스로를 분열해 대화 상대자를 만들어야했던 <<유머 1번지>>의 그 남자 처럼, 타자가 없는 세상은 존재 하지 않습니다. 그가 인간인 한에서는 말이죠. 그가 인간(人間)인 한에서는 말이죠. 즉, 인간은 사람(人) 사이(間)에서만 인간일 수 있죠. 차라리 사람(人)은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형상에서 온 문자라는 것... 그리하여,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칸트의 인간학적 질문은 인간(Mensch)에 대한 질문을 넘어서, 이웃(Neben-mensch, among+man)에 대한 질문으로 대체되어야 하겠죠.
 
만일 타자가 없는 세상이 있다면, 광인의, 정신병자의 세상이겠죠. 타자가 없어, 스스로가 스스로의 타자가 되어야 하는...

그렇게 자유주의적인 개인이, 개인주의가 탄생한 시대에,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인 다니엘 데포의 시대에, 소설(the novel)이 탄생을 합니다. 구닥다리 전통을 극복하면서, 허구(fiction)를 극복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것(the novel)이라고 치장하면서, 새로운 장르인 소설(the novel)이 탄생을 합니다. 물론, 스스로를 새로운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여러 이야기들 중의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죠.

다니엘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패러디 하는 소설들이 있습니다. 미셸 트루니에의 <<방드르디>>가 그 한 예입니다. <<로빈슨 크루소>>에서 크루소는 카리브해의 원주민을 만나는데, 그를 금요일에 만나서 "프라이데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물론, "프라이데이"를 만나는 것은 그 무인도에서 몇 년이 지나서 입니다. 여기서 프라이데이는 대화 상대자, 즉 타자가 아닌 정복하고, 가르쳐야할 한낱 물건에 불과한 대상일 뿐입니다. 서구인들의 제국주의가 그러하듯이 말이죠). 프랑스 작가인 트루니에는 프랑스어에서의 화요일인 "방드르디"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라는 이름이 아닌 방드르디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소설을 써서 데포의 소설을 패러디하는 것이죠. 이 소설에서의 크루소는 딱 미친놈 입니다. 또 남아프리카 작가인 쿠체도 디포를 패러디합니다.  (쿠체가 노벨상을 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부커상을 두 번 탔네요.) 직접적으로 데포를 겨냥햐지는 않지만, 호주 작가의 <<바벨론을 기억하기>>라는 작품도 난파당한 서구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영국인인데, 영어를 잊고, 원주민의 언어를 배우게 됩니다. (사실, <<로빈슨 크루소>> 자체에도, 크루소가 미친것으로 보이는 몇몇 장면들이 있습니다. 크루소는 열병을 앓으면서 환청을 듣습니다. 이런 장면들 덕택에 그 소설을 패러디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겠죠.)

또 하나 빼먹을 수 없는 것이 영화 <<캐스트 어웨이>>겠네요. 그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아주 잠깐 동안의 영상에서, 주인공은 "발리"를 대화 상대자로 만듭니다. 같이 난파당한 배구공에 눈, 코, 입을 그리고 그것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죠. 아마 퀴즈 프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물론,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짧은 시간이 지나서 구조가 되었을 겁니다. 퀴즈 프로가 맞는게, 그의 직업을 묻는 것이 있었고, 그의 직업은 패댁스의 배달부 였네요. 아님, 혼자 묻고 대답하는 방식의 영화 안내 프로 였을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