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곳에만 머물러 있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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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 l'Eau1 (By Theodor W. Adorno)

물 위에 누워 (테어도르 W. 아도르노)

 

* 출전: Theodor W. Adorno, Minima Moralia (Suhrkamp Verlag, Frankfun am Main 1951) 의 인터넷판 영역본2

http://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adorno/1951/mm/ch02.htm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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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에세이의 제목은 프랑스 작가 모파상(Guy de Mauppasant, 1850-1893)의 기행문 <물 위>에서 따온 것이다. 모파상은 36세 때인 1886년 대형 요트를 사서 4월 6일부터 14일까지 지중해를 항해하였다이 때 하루하루의 생활을 기록하여 단편집으로 출간한 것이 위의 작품이다.


2. 이하의 번역은 독일어 원본을 따른 것이지만 영역본도 충분히 자세하게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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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the question of the goal of an emancipated society, one receives answers such as the fulfillment of human possibilities or the richness of life. As illegitimate as the inevitable question may be, so inevitable is the repulsive, out-trumping response, which recalls to mind the social democratic personality-ideal of the heavily bearded naturalists of the 1890s, who wanted to live it up. Tenderness would be solely what is most crude: that no-one should starve any longer.

 

해방된 사회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질 경우 사람들은 인간적 가능성의 실현이나 풍요로운 삶과 같은 답변을 듣게 된다. 그러한 질문이 불가피하다고 인정되면서도 부당하게 느껴진다면 그러한 의기양양한 대답이 역겹게 느껴지는 것 또한 불가피하다. 이러한 대답은 삶을 만끽하려 들었던 1890년대의 수염이 텁수룩한 자연주의자들 같은 사회주의자의 이상형을 연상시킨다. ‘아무도 더 이상 굶주려서는 안 된다는 가장 소박한 답변만이 부드럽게 들린다.

 

Anything else would apply, to a condition which ought to be determined by human needs, a human behavior which is formed on the model of production as its own purpose. The utopian image of the unrestricted, energetic, creative human being has been infiltrated by the commodity fetishism, which in bourgeois society brings with it inhibition, powerlessness, the sterility of monotony. The concept of dynamics, which complements bourgeois “ahistoricity,” is raised to something absolute, while it nevertheless, as the anthropological reflex of the laws of production, must be critically confronted in the emancipated society with need.

 

다른 답변들은 모두 인간의 욕구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는 상태나 스스로의 목표를 향해 굴러가는 생산모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간 행태를 상정하고 있다. 자유분방하고,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인간과 같은 소망상에마저 상품의 물신적 성격이 배어 있는데, 부르주아 사회에서 이러한 물신주의는 제약과 무기력, 항상 똑같은 것이 만드는 불모성을 동반한다. 부르주아적 몰역사성을 보완해주는 역동성 개념은 절대적인 것으로 격상되지만, 그 개념은, 생산법칙의 인간학적 반사물로서, 해방된 사회에서는 욕구와 비판적으로 대질되어야 한다.

 

The idea of unfettered doing, of uninterrupted creating, of chubby-cheeked insatiability, of freedom as intense activity, feeds on the bourgeois concept of nature, which from time immemorial has served to proclaim social violence as irrevocable, as a piece of healthy eternity. It was due to this and not any presumed equalization that the positive designs of socialism, against which Marx bristled, remained in barbarism. What is to be feared is not the slackening of humanity in a life of luxury, but rather the dessicated expansion of what, in the guise of the all-natural, is social the collectivity as the blind rage of making. The naively mandated unambiguity of the tendency of development towards the raising of production is itself a piece of that bourgeois nature [Bürgerlichkeit], which permits development only in one direction, because, integrated into the totality, ruled by quantification, it is hostile to the qualitative difference.

 

구속받지 않는 행동, 중단 없는 출산, 만족을 모르는 욕망, 가득한 할 일들로서의 자유 같은 관념은 부르주아적 자연 개념을 먹고사는데, 이 자연 개념은 예로부터 항상 오직 사회적 폭력을 변경 불가능한 것, 건전한 영원성의 일부로 선전하는 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저항했던, 사회주의에 대한 긍정적 청사진이 야만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은 소위 하향평준화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때문이다. 두려워해야 할 사태는 인류가 유복한 생활 속에서 축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가면을 쓴 사회성, 즉 해내기라는 맹목적 분노로서의 집합성이 살벌하게 확장되는 것이다. 생산증대를 향해 가는 발전경향의 명백함이라는 소박한 가정은 총체성 속에 통합되고 양화에 의해 지배되어 질적 차이에 대해 적대적이기 때문에 발전을 한 방향으로만 허락하는 부르주아성의 일환인 것이다.

 

If one thinks of the emancipated society as one emancipated precisely from such a totality, then alignments become visible, which have little in common with the raising of production and its human mirror-images. If uninhibited people are by no means the most pleasant, and are not even the freest, then the society which freed itself of its fetters, could arrive at the thought that even the productive forces are not the final substrate of human beings, but are rather the historically specific form of these last under commodity production. Perhaps the true society would become bored with development, and would out of freedom leave possibilities unused, instead of storming alien stars under a confused compulsion. What would begin to dawn on a humanity, which no longer knew urgent necessity [Not: necessity, privation], is just how delusory and futile all the arrangements hitherto created to escape privation [Not] have been arrangements which used wealth to reproduce privation [Not] on an expanded scale.

 

해방된 사회라는 것을 그러한 총체성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구상할 경우 소실점이 시야에 포착되는데, 그러한 소실점은 생산의 증대나 그러한 증대가 인간에게 투영된 모습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을 것이다. 아무런 눌림도 없는 사람들이 결코 가장 안락한 자도 가장 자유로운 자도 아니라면, 족쇄가 떨어져 나간 사회는 생산력조차도 인간의 궁극적 토대가 아니라 상품생산에 맞게 역사적으로 재단된 인간의 모습이라는 데 생각이 미칠 것이다. 아마 진실된 사회는 발전을 식상해할 것이며, 정신없이 쫓기듯이 낯선 별을 정복하러 돌진하기보다는 자유롭게 가능성들을 다 쓰지 않은 채 남겨둘 것이다. 더 이상 곤경을 모르는 인류는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그리고 풍요와 더불어 곤경을 확대재생산했던 그 모든 장치가 얼마나 미친 것이었고 쓸 데 없었던 것인지 깨달을 것이다.

 

Enjoyment itself would be touched by this, just as its contemporary schema cannot be separated from industriousness, planning, imposing one’s will, subjugation. Rien faire comme une bête [French: Doing nothing, like an animal], lying on the water and look peacefully into the heavens, “being, nothing else, without any further determination and fulfillment” might step in place of process, doing, fulfilling, and so truly deliver the promise of dialectical logic, of culminating in its origin. None of the abstract concepts comes closer to the fulfilled utopia than that of eternal peace. Onlookers of progress such as Maupassant and Sternheim have helped to express this intention, shyly, in the only manner the fragility of the latter permits.

 

즐김 자체도 이에 의해 영향 받을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즐김 도식이 부지런 떨기, 계획 세우기, 의지를 갖기, 정복하기에서 떼어낼 수 없는 것과 같다. 한 마리 동물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물 위에 누워 평화롭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 ‘있는 것, 그 밖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더 어떤 규정과 실현 없이......’가 과정, 행위, 실현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고 기원에서 정점에 이른다는 변증법적 논리의 약속을 진실로 이행하게 될지 모른다. 추상적 개념들 가운데 영원한 평화라는 개념만큼 실현된 유토피아에 가까운 것은 없다. 모파상이나 슈테른하임 같은, 진보를 방관했던 이들은 이 의도가 수줍게, 즉 그것의 연약함이 허용하는 유일한 방식으로 표현되는데 일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