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쯤으로 기억된다. 강남 어느 찻집에서 장숙영 교수를 만났다. 일년여 시간이 지났지만 그 모습은 그때 그대로였다. 장숙영은

재색 자켙과 역시 재색 바지를 즐겨 입는다. 아마 언제나 재색 옷을 입었던 것 같다. 목 둘레에는 별다른 장식도 없이 소박한 머풀러

를 두르고 있었다. 얼핏 보면 꾸밈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지만 은근히 차분한 자기 분위기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었다.

 

 장교수는 첫 마디로 작가 H가 전화도 잘 받지 않고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내게 불평했다.

설마 H가 그럴리가...?  그는 다정다감하고 심성이 아주 착한 사람인데.....곡마단을 소재로 한 소설로 혜성처럼 등장하여 수년째 인기

절정에 있던 H는 바쁘기도 했겠지만 필경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시기가 정확하게 맞는지 확신이 가지 않지만 당시 신군부 치

하에서 H는 신문연재의 필화사건으로 아주 큰 곤욕을 치렀다. 그와 친한 어느 시인은 그 사건 연루자로 끌려가 지옥을 경험하고 그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그 P 시인의 시집 한권을 나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H가 그 일로 그렇게까지 심한 곤욕을 치렀다는 걸 나는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장숙영을 위해 시간을 할

애하지 못한 이유가 그 사건 때문이 아닐까,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장숙영은 내게 원로작가 東里 선생과 진보문학계에서 명성이 높던 중견작가 T를 소개시켜 달라고 단도직입으로 부탁했다. 두 사람의

작가, 원로와 중견을 소개시켜 달라는 장교수의 부탁을 나는 쉽게 받아들였다. 그건 내가 시간만 조금 할애하면 되는 일로 전혀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다. 가령 장숙영의 부탁이 내가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었더라도 나는 즉시 그걸 받아들였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화렌의 바다를 구경시켜 준 장교수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고 그게 아니라도 국제관계 사업인데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도와야

하는 것이었다.

 

 이방의 지적인 여성에 대한 나의 감정?  그때 나는 장교수가 기혼인지 미혼인지도 알지 못했다. 구태여 알 필요도 없었다. 사십대 초

반이니 응당 기혼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장숙영은 가정 얘기 같은 건 입에 떠올리지 않았다. 장숙영에게서는 늦게까지 결혼을

미뤘거나 한창 가정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여성에게서 느껴지는 쓸쓸한 분위기 같은 것이 감지되긴 했다. 그러나 이것도 분명한

근거가 없는 나만의 생각일 뿐이다. 이런 느낌을 제외하면 차분하고 여성적이며 도도한 자부심까지 지닌 이 이방의 여성에게 내가

얼마간 호감을 갖고 있던 것은 분명했다.

 

 당시 東里선생은 내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거주했다. 본래 나는 이 분과 별다른 인연이 없는데 집이 가까운 관계

로 이분이 자택에서 자주 벌이는 술파티에 몇번 불려다녔고 그 이후부터 내막적으로는 조금은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다. 무슨 이

유인지 몰라도 이 작단의 거물은 당신의 추 종 자도 제자도 아닌, 요즘 말로 듣보잡 뜨내기에 지나지 않는 내게 과분한 친절을 베

풀었던 것이다.

 장숙영과 원로작가의 면담은 청담동 작가의 자택에서 쉽게 이루어졌다. 나는 시작부터 면담이 끝날 때까지 동석해서 장교수가

외로움을 타지 않도록 옆에서 분위기를 돋우었고 이야기가 끝날 때 쯤 선생께서 베푸신 정종 두어잔 씩을 기분 좋게  얻어마시고

그 집에서 물러났다.

 그 이후에도 장교수의 부탁으로 타이완에서 온 여성비평가 한사람을 東里선생 댁에 데려간 일도 있다. 쉬엔메이던가-이름이

정확하지 않음- 이 여성 비평가는 자기 책까지 여러권 가져와서 만나는 사람마다 사인을 해서 건네주고 자기 홍보를 했다. 쉬엔

메이는 장숙영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이었다. 가까운 친구라는데 그렇게 다를 수가 없었다. 쉬엔메이는 말 수가 많고 무척 활달

하며 조금 잘난척 하는 기미도 언듯언듯 보였다. 장교수 말에 의하면 타이페이에서 꽤 알려진 여성비평가라는데 문학에 대한

견해도 장숙영과는 많이 다른 것 같았다.

 東里 선생은 뒤에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쉬엔메이가 장 보다는 샤프해. 장은 착하긴 해도 샤프한 맛은 없더구만."

 나는 이 말에 일면 수긍이 가는 점도 있었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할 수도 없을 것 같다는 이율배반적 생각에 잠겼다. 東里

선생은 알다시피 해방 이후 우익 문단을 주도하던 인물이고 군사정권 치하에서도 자기가 누릴 것은 모두 누렸던 인물이다. 극

우에 치를 떠는 장숙영의 문학적 견해가 그의 마음에 들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작가 T는 그무렵에 연희동 노태우 전 대통령 집 인근에서 살았다. 그가 북행하기 얼마 전이니까 노태우 정권시절이 끝나갈 무렵

이다. 그를 잘 알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장숙영을 그의 집으로 안내하고 원고청탁이나 번역관계 등, 장교수의 일이 차질없이

잘 성사되도록 도왔다. 그 후에 일이 잘 진행되어 T가 타이페이 여행을 아주 재미있게 다녀왔노라고 내게 자랑했던 일이 어

렴풋이 떠오른다.

 그것 뿐만 아니다. 앞서 얘기한 작가 김도 장교수의 부탁으로 내가 다리를 놓았고 그의 단편 몇편이 장교수를 통해 중국어

로 번역이 되었다. 작가 김으로 말하면 지금은 시대상황이 많이 바뀌고 그의 활약도 주춤하지만 군사정권 말기나 YS 정권

초기 때만 해도 김은 이른바 진보 문학계의 새 가능성으로 높이 평가되곤 했었다.

김은 처음 시로 시작했다가 뒤에 소설 쪽에 더 열정을 쏟게 되었는데 그의 작품들을 한 마디로 민중. 저항 등의 말로 단정짓

기 어려운 면도 있지만 그가 범 운동권 출신이고 그의 문학 밑바탕이 넓은 의미에서 민중에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일면식도 없던 김의 작품이 장숙영의 선택을 받았을 턱이 없는 것이다.

 

 

 90년대 초, 서울이 막 겨울로 접어들려고 하던 어느 날 타이페이에서 내게 팩스가 한장 날아왔다. 그곳 문화대학 교수 장숙영

이 보낸 건데 나와 김을 타이페이로 초청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메일이 사용되던 때가 아니어서 팩스가 첨단의 통신수단

이었다. 며칠동안 서울과 타이페이 사이에 타이완 여행 문제로 연락이 오고 간 끝에 나와 작가 김 두 사람은 타이페이 행 비

행기에 올랐다.

 여행기간은 약 십일이고 초청 측에서 체재기간 동안 숙박과 기타 경비를 제공한다는 조건이었다.

 

 이 타이페이 두번째 여행을 떠날 때 나는 숙고 끝에 대륙의 상하이에서 번역 발표된 내 작품 자료를 복사해서 장교수에게

보일려고 휴대했다. 공교롭게 그 얼마 전에 상하이에서 번역자가 내 작품 중편 두편을 문학지에 번역 게재한 사실을 알릴

겸 또 다른 경장편 번역과 출간의 동의를 구하려고 서울에 왔는데 그가 가져온 잡지를 보니 우연찮게도 東里선생 초기작

한편도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원로급인 번역자에게 작품정보를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었더니 놀랍게도 김일성 선집 중

국어판 감수를 위해 북에 갔다가 거기서 소개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 잡지 수록 작품 말미에는 북의 비평가의 언급도 간

단히 소개되고 있다.

이런 일은 내 상상을 한참 벗어난 일로 나는 지금도 그 일을 해독불가의 일로 여기고 있다.

09년엔가 우연찮은 기회에 잠시 방북했을 때 묘향산 가는 길에 옆에 앉은 청우당 간부로부터

"북에서 문학을 외부(주로 남쪽)에서 생각하듯 그렇게 단순한 잣대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실상을 더

자세히 확인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 점은 중국도 비슷해서 요즘엔 대륙 쪽이 도리어 문학, 예술을 보는 관점이 더 융통성

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내가 구태여 그런 자료를 장교수에게 가져간 것은 그간 장교수가 가끔씩

"언젠가 선생님 작품도 번역할 거에요." 라고 말하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른 작가 안내를 부탁하고 내게

번거로운 심부름만 시킨 걸 좀 미안하게 생각하고 립 서비스 삼아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나는 장교수더러

'이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그걸 보여줄려고 했던 것이다.

'봐라, 대륙에서도 이렇게 번역되어 나오지 않느냐?' 이렇게 뻐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면 그도 거짓일 것이다.

 

 타이완에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서울서 타이페이까지는 세시간 남짓 소요된다. 나는 그 정도 시간을 흔히

'담배 두어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비행기 안 객석에 앉아 담배를 피워댄다는 말은 아니다. 요즘에

그랬다간 비행기 창 밖으로 쫓겨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후배 작가 김과 처음으로 함께 여행하면서 나는 아주

놀라운 그의 특징 한가지를 발견했다. 그는 한 마디로 내가 아는 한 '이 지상 최고의 애처가'였다.

그는 김포공항에서부터 오분 간격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시각각으로 자기의 동선과 일정을 보고하는 것

이다. 그때만 해도 핸드폰은 특수층만 사용하던 고가품이었기 때문에 그는 하는 수 없이 공중전화 신세를 져야만

했다. 그는 공중전화를 이용하기 위해 동전 한웅큼을 늘 손바닥 안에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동전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그가 동전을 빌려달라고 내게 손을 내밀기 시작했고 나는 여행기간 내내 그의 동전구걸에 시달렸다.

 처음에 나는 그의 그런 행동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으나 차츰 익숙해지자, 이 후배 작가를 이렇게 이해하게 되었

다.

'이 친구는 정말 아내를 사랑하는구나. 그래서 아내 목소리를 오분 동안만 못 들어도 온통 이 세상이 깜깜해지는

모양이구나.'

 물론 타이페이에 가서도 비싼 국제통화료 따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줄곧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만

국내에서 오분 간격이던 것이 십분 간격 정도로 바뀐 것 뿐이었다. 보다 못해 내가 가끔 핀잔을 주어도 김은 들은척

도 하지 않았다.

 그런 친구를 지켜보며 나는 스스로 자괴감에 빠졌다. 나라는 인간은 남편으로 아버지로 완전실격이었다. 나는 열흘

의 여행기간 동안 한 차례도 집에 통화를 시도하지 않았고 귀국해서 공항 밖으로 나온 다음에 겨우 집에 전화를 걸었

다. 그것도 집이 혹 비어있다면 아파트 현관문 열어줄 사람이 없을까봐 걱정이 되어 걸었던 전화였다.

 

 오후 늦게 비행기가 타이페이 공항에 도착했는데 장교수는 제자 몇명을 데리고 공항으로 마중나왔다. 우리를 태울

승합차가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막상 현지에서 장숙영과 얼굴을 마주치자, 전에 못 느끼던 미묘한 친애감이랄까, 정

감을 느꼈다. 장교수도 과거와는 달리 우리를 좀 더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녀는 여름 양복을 입은 나를 보더니 타이

페이 날씨가 예상보다 춥다면서 내 뒤로 다가와 내 외투 깃을 세워주기도 했다.

 나는 장교수에게 대뜸 말했다.

"화렌 바다를 빨리 보고 싶은데요."

"아이구, 참 성급하시네요. 그러실줄 알고 타이페이에서 하루만 묵으시고 내일 그리로 가시도록 조처해 놓았어요.

타이페이 일정은 뒤로 미뤘거든요."

우리에게 제공된 타이페이 숙소는 무슨 청년회관의 기숙사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 큰 규모의 식당도 있었다. 그곳

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틑날 오전에 고궁박물관과 장개석 사당, 그리고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댐인지 호수인지 그

런 것을 둘러보고 오후에 우리는 화렌행 기차에 올랐다. 장숙영은 타이페이에 남았고 화렌에서는 교수의 여자 제

자들이 역에서 우리를 맞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둘만 남은 기차의 객석에 앉아 김이 아주 엉뚱한 소리를 했다.

"선생님, 장숙영이 왜 우리를 초대했다 생각하세요?"

"그야 자네 작품도 번역했고 자네 문화대학에서 학생들과 미팅도 잡혀있지 않은가. 나야 뭐 서울에서 조금 도와

줬다 해서 끼워준 거겠고."

"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는데요."

"어떤 각도로 보는데?"

"장숙영이 선생님을 매우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낮에 댐 구경할 때 선생님이 추워하니까 안절부절 못해

요. 표정은 속이지 못해요. 저는 사실 이번에 덤으로 따라온 겁니다."

"에끼! 이 친구야. 말도 안되는 소리 말어. 덤은 자네가 아니고 나야.  장숙영은 민중문학 쪽이 아니면 인정하지

도 않는다고. 자네도 잘 알지않아. 자네 지루하면 기차에서 국제전화 할 수 있나 알아봐. 음, 저기 전화실이 있

군. 빨리 서울로 전화해야지."

김은 깜빡 잊었다는듯 벌덕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화 부스가 있는 쪽으로 부지런히 걸어갔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