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강님의 요청도 있고 해서 저는 이만 사상검증 논쟁에서 빠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논쟁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소감이나, 토론 과정에서 타이밍을 놓쳐 미처 말하지 못했던 걸 대충 정리해놓고 관심끄려고 합니다. 

이번 논쟁에 임하면서 제가 항상 염두에 두었던 것은 만약 수구세력이 저를 상대로 그 돌직구녀와 진중권과 똑같이 했을 때, 그리고 이상규의 자리에 제가 앉았을 때 과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였습니다. 제가 만약 그 돌직구녀와 진중권이 옳았다고 인정해버린다면, 과연 어떤 논리로 나를 방어할 수 있을것인가라는 궁리도 해봤구요. 결국 남는건 "좋은색깔론 나쁜색깔론, 좋은사상검증 나쁜사상검증" 이라는 조악한 논리밖에는 달리 없지 않겠는가라는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꽤 과장해서 '사상검증의 위험성' 을 떠들긴 했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은 아직 낮다고 봐야하겠죠. 그러나 야권진영이 그동안 소중하게 지켜왔던 어떤 원칙이나 개념적 정의들을 상당부분 스스로 훼손한 것만은 사실이지 않는가라는 안타까움은 있습니다.

어떤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이 모여 무언가를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무대, 배우, 관객, 희곡이 존재하는 뭔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할까요? 딴거 없이 연극을 하고 있다고 해야겠죠. 배우의 연기력이 아무리 형편없어도, 희곡이 아무리 유치하고 귀여운 수준이라 할지라도 그 어린이들의 행위를 연극이라고 불러야지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면 연극의 4요소를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죠. 즉 우리가 그것을 연극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연극임을 증명하는 조건들'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상상력을 발휘해 연극을 아주 나쁜 행위로 여겨 금지하고 있는 이상한 나라가 있다고 해보죠. 이 나라에서는 당연히 초딩들의 연극이건 전문배우들의 연극이건 모두 동일한 원칙을 적용하여 금지할 것이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 연극인가 아닌가 판단하는 기준은 당연히 연극의 4요소를 모두 갖추었느냐이지, 희곡의 내용이 화끈한가 아닌가, 관객수가 많은가 적은가, 연기력이 좋으냐 나쁘냐,  등등의 여타 모든 곁가지조건들은 고려대상이 될 수 없을겁니다. 설사 특수한 상황의 예외규정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경우 역시 일단은 연극이라고 먼저 판단해놓고, 그 다음 예외를 논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번 사상검증 논쟁에서도 마찬가지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백토에서 벌어졌던 일이 사상검증이냐 아니냐를 놓고 다툴 때, 사상검증의 개념적 정의, 사상검증임을 증명하는 필수요소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곁가지조건들을 끌고 와서 '사상검증이 아니다' 라고 반론하시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차라리 '사상검증 맞다. 그러나 이러이러해서 예외적인 경우이다." 라고 했다면 서로간 입장 차이 확인하고 논쟁이 좀 더 일찍 끝날 수도 있었겠죠. 오히려 노골적으로 "사상검증 맞다. 그게 왜 나쁜데? 공직자들에게는 당연히 해야한다" 고 하시던 몇 분들이 상대하기는 가장 편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 사상검증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무너뜨렸을 때, 이제 수꼴들이 날리는 사상검증의 돌직구를 무슨 논리로 방어할 수 있을까요? "주사파들은 빨갱이가 확실하니 경우가 다르다" 고 하실건가요? 수꼴들의 눈에는 "주사파들과 선거연대 후보단일화까지 한 무리들도 빨갱이가 확실하다" 일텐데요? 설마 돌직구의 구속이 다르니까 경우가 틀리다라고 하지는 않으실거라 믿습니다.

우리 스스로 정치인은 유권자에게 자기 사상을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답변을 회피해서도 안되고 애매모호하게 답변해서도 안된다고 해버렸으니, 이제 수꼴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살판 나는 일만 남았습니다.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명확하다고 인정해줄 때까지 야당정치인들은 열심히 답변해주는 일만 남았구요. 저는 솔직히 앞으로 인사청문회나 토론회때 무슨 일들이 벌어질지 살짝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추가 - 이번 백토 사건이 뭐 대수냐, 오버해서 호들갑떠는거 아니냐는 분들도 많이 계시는데, 원래 사상문제과 관련된 사태들은 최초 별거 아닌 사건에서 번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 잡지에 실린 짧은 문학 평론 하나가 그 엄청난 난리통을 만들어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무리 조그만 사건이라도, 그 사건에 내재되어 있는 구조적 논리가 동감을 얻으며 퍼지는 순간, 들불처럼 번진다는게 역사적 경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