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에는 아주 특이한 정치 현상이 하나 있죠. 정말 세계 정치사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특이한 현상이 맞을텐데, 어느덧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린 상황입니다. 바로 호남의 90% 몰표 현상이죠. (요즘은 그나마 많이 낮아져서 70~ 80%대인 것 같습니다). 지난 87년 대선 당시 처음 등장한 이후, 벌써 25년이 지났네요. 한 세대가 흐른 것입니다.

특정한 행정구역 단위로 구분되는 사람들이 어떤 정당을 90%의 확률로 지지한다거나 반대한다는 것은, 사실 보통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긴 합니다. 그래서 일부가 호남을 향해 민주공화국의 상식을 거스르는 집단인 것처럼 폄하하기도 하고, 야권 지지자들도 대개 불편함을 느끼면서 언급을 회피하는게 일반적이죠. 어쨌든 각자가 이 현상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면서 그냥 저냥 무덤덤해진 상황으로 보입니다.

그동안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많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딱히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만한 설명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지역감정론'인데, 사실 이것처럼 웃기는 설명이 없죠. 사람이 아무리 지독한 감정의 동물이라지만, 특정 지역의 광범위한 대중들이 이토록 오랫동안 감정적 투표행위를 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큰 충격을 주고 감정을 격앙시키는 사건이라해도 길어야 몇달이면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기 마련이죠. 그런데 이토록 긴 시간동안, 세대를 이어가며 그 감정이 보존되면서 그것을 투표장에서 표출한다? 이건 호남인들을 무슨 사이코스러운 정신병자 취급하는 논리와 다름 아닙니다. 

투표라는 것이 보통의 경제활동처럼 어디까지나 정치적 자기 이익의 극대화를 위하여 각 개인들이 나름의 합리적 선택을 하는 것이라 한다면, 그런 정치적 감정 해소가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남한에는 종교적 가치를 다른 무엇보다 더 위에 놓는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가 수백만이지만, 정작 기독교정당의 지지율은 해산을 걱정하는 수준에 불과하죠. 이처럼 한국은 이미 국민들의 정치적 분별력이 꽤 높은 수준에 도달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과연 지역감정이라는게 종교보다 더 강한걸까요? 이념도 그 앞에서는 한 수 접는다는 종교적 유혹에도 끄떡 없는 대한민국의 유권자들이 고작 영남 호남하는 행정구역상의 감정에 이끌려 미친듯이 몰표를 찍는다? 정말로 그것이 사실이라면, 대한민국은 미친나라이거나 상식을 가지고 살기 힘든 나라라고 봐야죠.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지역간 내전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나라가 맞을겁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투표장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여 표를 주는 이유는 정말 다양할 것입니다. 천만명의 유권자가 있다면, 천만가지의 이유가 있을 수도 있어요. 겉으로는 새누리당지지 몇% 민주당지지 몇%하는 집단적 누계치로 드러나지만, 유권자 개개인의 투표현장을 들여다보면 온갖 기상천외한 선택 기준들이 나타날겁니다.

후보가 잘 생겨서, 정당 이름이 맘에 들어서, 말을 잘해서, 길다가 악수를 해봐서, 성씨가 똑같아서, 이름이 같아서, 나이가 젊어서, 대학교 동창이라서, 정책이 좀 더 신경쓴거 같아서, 명함이 독특해서, 인쇄물이 근사해서, 누구 딸이라서, 누구 아들이라서, 같은 동네 살아서, 조기축구회 회원이라서, 사장님이 추천하니까, 애인이 권해서, 친구가 난리치니까, 북한이 싫어서, 일본놈 얄미워서, 독도는 우리땅이니까, 미국쇠고기 무서워서, 이건희가 미워서, 취업이 안되니까, 정규직이라서, 비정규직이라서, 보도블럭 뒤집는게 싫어서, 전세사니까, 아파트에 사니까, 집이 두채니까, 전철요금이 비싸서, 기름값이 너무 올라서, 노인을 홀대해서, 손바닥에 침튀겨서, 운명이라서  등등등... 

이런 갖가지 이유들을 다 빼고 나면, 정말로 순수하게 '지역감정'으로 자신의 투표 의사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과연 몇명이나 남을까요? 과연 있기는 한걸까요? 그런데도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거대한 집단적 누계치만 가지고서, 개개의 유권자들이 '지역감정'에 이끌려 투표했다고 함부로 진단하는 이유가 과연 뭘까요? 선거후 개표방송이나 전문가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호남 유권자의 70% 이상, 영남유권자의 60% 이상이 모두 지역감정에 사로잡힌 상태로 투표장에 납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개별 유권자들의 투표 결과를 모아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어떤 집단적인 누계치를 계산한 다음, 그것을 해석한 결과를 다시 개별 유권자 수준으로 환원하여 '투표의 이유'로 설명하는 이런 방식은 아무리 설명의 편의를 위한거라지만 정말 골때리는 것이죠. 어떤 호남 유권자가 남북간 긴장 완화가 더 낫다고 판단해서 민주당을 찍었는데, 이 사람이 투표한 이유를 지역감정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지금까지 그 잘난 언론들과 정치평론가들이 벌인 작태입니다. 많은 호남 유권자들이 대기업 중심 경제 정책이 싫어서 혹은 비정규직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민주당을 찍었겠지만, 그 사람들 역시 통계의 장난속에서 지역감정으로 투표한 사람들로 분류될 뿐이죠. 

저는 이 세상에서 집단적선택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선택의 단위는 늘 그 선택을 직접 수행하는 개인들이지 집단이 될 수 없다는 말씀이죠. 진화의 현장에서는 유전자일테고, 투표의 현장에서는 유권자 개인일 것입니다. 집단적 누계치란 그저 추세를 해석하는 참고자료일 뿐인건데,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유권자 개인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규정하는건 말이 안되는거죠. 호남인들의 민주당을 지지 누계치가 50%이든 90%이든 상관없이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이것은 영남의 경우에도 동일할테구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고 실험을 한번 해보죠.  여러가지 크기의 구슬들이 있는데, 이 구슬들을 모아서 어떤 스크린을 통과시킨다고 해보죠.  이 스크린에는 가장 작은 구슬만 통과할 수 있는 구멍들이 뚤려 있습니다. 이때 당연히 스크린 아래에는 가장 작은 구슬들만 모여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구슬 크기에 따라 색깔을 다르게 칠해놓았다고 해보죠. 가장 작은 구슬에는 빨간색을 칠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스크린 아래에는 죄다 빨간색 구슬만 모여있겠죠. 이 때 만약 스크린이 구슬을 걸러내는 기준이 크기가 아니라 색깔이라 주장하고, 스크린 아래 모인 구슬의 집합을 '가장 작은 크기의 구슬 집합' 이 아니라 '빨간색 구슬의 집합'이라고 부르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혹시 호남이라는 호적은 그저 호남 유권자들에게 칠해진 색깔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 이 사고 실험은 엘리엇 소버 -Elliott Sober- 의 선택장난감 놀이라는 실험에서 차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호남의 유권자들이 통과하는 스크린이 과연 뭐길래 90%의 유권자들이 민주당을 선택하고, 그저 색깔에 불과한 호남 호적에만 주목하면서 그것을 지역주의 투표라고 부르고 있을까가 문제가 되겠죠.  

저는 첫번째 스크린은 역사성의 스크린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역사성이 형성된 배경은 광주항쟁의 기억과 함께 자본주의 산업화 과정에서 타 지역보다 더 많이 소외당하고 수탈당하고 착취당한 특수한 지역으로서의 호남의 정체성이 될테구요. 아마 거의 100%의 호남인들이 이 첫번째 스크린에서는 새누리당의 반대편에 서겠죠. 물론, 이 역사성의 스크린을 인식하는 방식은 호남 유권자 개개인마다 다 다를겁니다.  광주항쟁을 더 많이 기억하는 사람, 타지에 취업나가 고생한 기억이 더 많은 사람, 호남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기억이 있는 사람 등등...

두번째 스크린은 뭐니 뭐니 해도 당연히 현실의 경제적 이득이라는 스크린이라고 봅니다. 물론 국가경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 유권자 레벨의 경제적 이득입니다. 모두 자신이 소속된 회사나 운영하는 업종, 혹은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의 가치나 종류와 같은 구체적인 경제 생태계안에서 최대한의 이득을 얻을 수 있다 판단되는 정당이나 후보를 선택할 것입니다. 또한 각 정당들이 제시하는 분배정책들도 주요한 고려대상이 되겠죠. 저는 이 단계에서 정당별로 갈라질 확률은 호남이라해서 특별할 것 같지는 않고, 서울의 강북지역보다 약간 더 높은 수준으로 민주당을 선택하는 정도라고 봅니다. 이번 총선 결과를 살펴보아도 서울의 강북지역만 뚝 떼어서 정당별 득표율만 살펴보면, 호남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일부 명망가급 새누리당 후보들이 출마한 지역(이정현, 정운천) 에서는 오히려 서울의 강북보다 더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기도 했었구요.

(이 두개의 스크린은 사실 호남뿐만 아니라 타 지역의 유권자들도 모두 동일하게 통과하는 스크린일 것입니다.)

결국 두번째 스크린의 구멍이 크면 클수록 민주당의 지지율이 더 높게 나타날테고, 저는 이것이 때로 90%에 육박하는 민주당 지지율로 나타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알고보면 별거 없는건데, 90%라는 충격적인 숫자가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키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고 그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누구는 이걸 해결하겠다며 대연정을 하겠다고 하고, 누구는 낙동강벨트니 뭐니 엉뚱한 곳에 가서 난리 생굿를 치고 있구요.

만약 새누리당이 호남을 공략할 생각이 있다면, 첫번째 스크린은 사실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 굉장히 장기적인 실천이 따라주어야하는 과제이고, 새누리당이 그런걸 할 의사나 능력이 있는 정당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스크린은 다르겠죠. 오로지 정당의 능력에 따라 판가름이 날 문제일텐데, 새누리당은 지금까지 이런 것에조차 관심을 기울여본 적이 없는 정당입니다. 저는 새누리당이 두번째 스크린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야 민주당이 정신차리고 하루라도 더 빨리 사민주의적 정당으로 환골탈태하려 노력할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