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다수가 소수 의견을 무시하고 밀어붙일 때, 이렇게 비난하죠.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는 다수의 폭력이고 날치기다"
그리고 소수가 다수결 원칙을 거부하고 폭력적으로 의사 진행을 방해할 때, 이렇게 비난하죠.
"다수 의견에 승복하지 않는 소수가 폭력에 의존해서 민주적 절차를 파괴하려 한다."
(참고로 이 말씀은 오늘 크레테님이 아크로에서 하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양쪽 모두 이것들을 '민주적 절차'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한다는 거죠. 그리고 솔직히 지금까지 우리나라 진보진영은 정치적 상대방을 향해 후자보다는 전자의 말을 사용할 때가 훨씬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동안 진보진영에서 정적들을 향해 '다수결 원칙을 지켜라'고 일갈해 본 경험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죠.  

그런데 이번 통진당 폭력 사태 국면에서는 모든 진보틱한 언론들이, 진보연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당권파들을 향해 "다수결의 민주적 절차를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있다'며 비난하는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자신이 마치 '다수결 원칙'을 수호하는 뭐라도 되는 듯이 "어이 런닝맨들. 니들도 한때 저 못된 통진당 당권파들처럼 다수 의견에 승복하지 않고 폭력에 의존해서 민주적 절차를 파괴하려 했었지? 이렇게 당권파나 런닝맨들이나 똑같은 놈들임이 분명한데, 이에 대한 생각이 어때?" 라며 기세 등등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언제부터 다수결 원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게 진보의 언어가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요 며칠 새 갑자기 지구의 자전 방향이 바뀌기라도 했나 봅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이런 분들 대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제발 좀 정치적으로 철 좀 드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는거죠. 국회 다수당인 새누리당의 의결 행위를 날치기라 비난하고, 우리 사회의 아주 소수인 용산 철거민들의 폭력적 저항을 옹호하고, 김진숙과 희망버스를 옹호하던 분들이 갑자기 이러시면 정말 난감한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날치기든지 소수의 폭력적 저항이든지 그 자체만으로는 그것이 과연 민주적 절차를 파괴하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통진당 당권파들에게 다수결 원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며 비난하는데 앞장서는 분들이, 과거 노무현 탄핵 의결 당시 벌어졌던 상황에 대해 어떤 견해를 피력해왔는지를 살펴보면 민주적 절차라는게 그렇게나 쉽고 편하게 판단될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지는거죠.

그렇다면, 민주적 절차라는 것이 자기 진영이 처한 입장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해도 상관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경우가 날치기이고, 어떤 경우가 소수의 폭력인지 가려낼 수 있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혹시 어쩌면 그런 기준 따위는 없고 그저 힘센 놈이 장땡, 언론의 지원 사격을 받아 여론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놈이 장땡인 그런걸까요? 아니면 새누리당이 하면 날치기요, 우리가 하면 다수결 원칙에 충실한 것이라는 착한 다수결 나쁜 다수결 그런걸까요?

물론 저는, 이번 통진당 폭력 사태에 대한 분명한 판단이 있습니다. 유심조의 표결처리 강행이 다수결을 빙자한 날치기인지 아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당권파들의 폭력적 의사 진행 방해 행위가 소수의 정당한 저항은 아니라는 생각이죠.

우선,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 방식인 다수결의 원칙은 일단 존중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것처럼 그것의 기계적 적용을 신봉하는 사람이 진보연하는건 곤란하겠죠. 다수이든 소수이든 자기 집단의 의견 관철을 위한 행동이 날치기 혹은 소수의 막가파식 폭력이 아닌게 되려면, 표결 현장에서 드러나는 외형뿐만 아니라 플러스 알파로써 다른 것이 더 필요합니다. 바로 명분이죠. 그 명분은 늘 현장의 표결보다 더 상위의 어떤 '다수결 원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제3자들에게 설득할 수 있었을 때에만 주어지는 걸테구요. 

가령 어제 통진당 당권파들은, 현장의 표결보다 더 상위의 가치가 있는 다수결 원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제3자들에게 보여주는데 실패했습니다. 자기 계파의 이익보다 더 큰 상위의 어떤 가치를 위해 우리는 지금 저항할 수 밖에 없다는걸 입증하는데 철저하게 실패했다는 말씀이죠. 그들이 단순히 폭력적으로 의사 진행을 방해한 소수여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런 명분이 없었기에 그들이 시망한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과거 노무현 탄핵 의결 당시에, 외형적으로는 다수의 의사결정을 소수가 폭력적으로 방해하며 저항했다는 점에서 어제의 통진당 폭력 사태와 매우 유사하지만, 그들이 "국민의 과반수가 선출한 대통령을 국회의원들이 작당해서 맘대로 탄핵했다'는 보다 상위의 다수결 원칙을 제시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소수의 폭력'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는걸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날치기든 소수의 폭력이든 어디까지나 '민주적 명분' 싸움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저 단순하게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으로 "저 시키들은 민주적 절차를 파괴했다' 며 함부로 판단해서는 곤란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 크레테님의 말씀처럼 외형적 유사성만으로 통진당 당권파의 폭력과 어느 런닝우먼의 난동 행위를 동일한 잣대로 비난하는 것이 과연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일까요? 당시의 민주당 분당파들에게 '지지자들에 대한 중대한 배신 행위'라고 일갈하던 그 런닝우먼의 명분보다 더 상위의 '민주적 명분' 이라는게 있었나요? 그런거 없었죠. 분명히 말씀드리면 이 문제는 당시 분당의 주역들이 줄줄이 반성문을 제출하면서 이미 역사적 판단이 끝난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뜬금없이 등장한 '통진당 당권파와 런닝맨은 쌍둥이'라는 괴상한 주장은 대체 그 정체가 뭘까요? 역사를 거스르며 다수 의견을 거부하는 소수의 폭력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