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유럽에는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배회했다고 하는데,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사민주의라는 유령이 배회하는 것 같습니다. 국민의 45%가 바람직한 사회형태로써 '북유럽식 사민주의'를 선호하며, 미국식 자유시장주의를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는 놀라운 여론조사 결과도 있었구요. 그 조사만 놓고 보면 대한민국은 가히 사민주의에 대한 간절한 기대(?)가 존재하는 나라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수치는 현재 더 늘었으면 늘었지 줄어들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4/05/005000000200405161756469.html
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2095
(인상적인 대목은, 새누리당 지지층에서도 35%가 미국식 자유주의보다 북유럽식 사민주의를 선호하고 있다는 결과입니다.)

문제는 사민주의에 대한 이런 높은 선호도가 곧바로 정치 활동에 반영되고 있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겠죠. 그동안 사민주의를 표방하며 활동했던 정당들이 몇몇 있었지만 '선거후 해산'이라는 도돌이표를 벗어나지 못했고, 현재 사민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정치인들도 몇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기존의 군소 좌파정당들이 국민들의 사민주의에 대한 기대를 담보하고 있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그들의 낮은 지지율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우리 국민들 다수가 사민주의를 선호하지만, 그런 사민주의에 대한 기대를 새로 등장한 정치세력들에게 거는게 아니라 기존의 정당들이 환골탈태(?)하여 뭔가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죠.

저는 어쩌면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불만이나 무관심 냉소 낮은 투표율 등의 본질적인 이유는 어쩌면 정치가 국민들의 사민주의적 기대를 전혀 반영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지난 지방선거 당시 무상급식과 복지 이슈를 통해 밑바닥에 잠복하고 있던 그런 기대감이 잠시 분출된 적이 있었죠. 하지만 그것을 끌고 나갈 주체인 민주당이 친노들에게 접수당하고, 이후 정치판이 구태의연한 '독재 vs 민주'로 짜이면서 시들해져 버린 것은 두고 두고 아쉽고 치열한 반성이 요구되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서론이 길었는데,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북유럽식 사민주의란 무엇인가' 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북유럽식 사민주의를 실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장 우선은 사민주의적 제도와 정책들을 추진할 수 있는 정당이 존재해야 하겠죠. 그리고 그 정당이 과반수의 지지를 얻어서 집권 가능해야합니다. 또한 사민주의 선진국들의 사례를 보건데, 그 정당이 최소한 20년~ 30년 이상 동안 수구세력들의 저항을 당근과 채찍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어야하고, 안정적으로 집권하면서 대한민국의 시스템을 사민주의적으로 개조할 능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현실적인 조건들이 충족되지 못하면, 사민주의는 도달할 수 없는 요원한 꿈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러면 첫째, 과연 어떤 정당이 사민주의를 추진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실 그동안 NL과 PD라는 운동권 조류로부터 유래한 군소 좌파정당들이 성장하여 그것을 해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독재잔당인 새누리당을 괘멸시킨 다음, 민주당을 보수정당으로 밀어내고 그들이 과반수를 점유하는 진보정당으로써  정치판을 구성한다는 담론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모두가 목격하고 있는 바와 같이, PD들의 진보신당은 해산당했고 NL들은 햇빛에 나온 곰팡이 신세가 되어 종말을 고하고 있는 시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맑스레닌주의적 사고틀에서 출발한 그런 담론들이 얼마나 현실성없고 어처구니 없는 먹물짓(?) 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고, 국민들로부터 냉정한 심판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은 새누리당 자체를 괘멸시킬 수 있기는 커녕, 그들의 과반수를 막는 것조차 벅차다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결론부터 솔직히 말씀드리면, 현실의 대한민국에서 사회민주주의를 추진할 수 있는 정당은 민주당밖에는 없습니다. 새누리당 괘멸시키고서 민주당 VS 좌파정당으로 구성한 다음, 좌파정당들이 장기 집권하여 사회민주주의를 구현한다? 당체 왜 이런 복잡하기 짝이 없고 현실적으로도 실현 불가능한 프로세스를 상정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걍 간단하게 새누리당을 보수정당으로, 민주당을 사회민주주의를 구현할 진보정당으로 환골탈태 시키는게 그나마 실현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대목은 이겁니다. 비록 호칭이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더라도, 정당의 이름이 사회민주당이 아니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정당의 강령과 정책들과 정치 활동이 사민주의적이라면, 그 정당이 바로 다름 아닌 사회민주당이라는 실용적 태도가 요구된다는 거죠. 솔직히 이름을 뭐라고 부르든, 그 안의 내용물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이름이나 포장만을 가지고 시비거는 교조주의적 태도는 정말 책상머리 먹물들에게나 어울리는 작태이겠죠. 그 정당의 이름이 민주당이든 아니든, 그 정당의 시초가 친일지주들로부터 출발했든 말든, 그 정당이 자신들의 정당 철학을 사회민주주의라고 부르던 말든, 그게 왜 중요하다는 것인지 저는 잘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 다음 두번째, 그 정당이 안정적인 과반수의 지지를 얻어 계속 집권가능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모두 알다시피, 북유럽의 사민주의 정당들은 조직화된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묻지마 지지"를 바탕으로 사민주의적 개혁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게 사실이죠. 설령 그런 사민주의적 개혁이 시행착오속에 실패를 하더라도, 여전히 신뢰하며 굳건한 지지를 보내주는 다수의 유권자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꾸로 이해해서 "대한민국은 노동자 정치조직이 미약하므로 사회민주주의는 어렵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굳건한 유권자 계층'이지 '노동자조직'이라는 표피적 형태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념이든지간에 늘 그 나라의 역사와 구체적인 현실을 피드백하여 재구성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당연한 상식입니다. 나라마다 처해있는 역사와 현실이 모두 다른건데, 외국에서 성공한 메뉴얼과 사례집 달랑 한장 들고 와서 읊조리는 사람들은 정말 밥맛이라고 할 수 밖에 없겠죠. 

여기서 등장하는 분들이 바로 호남입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죠. 오랜 사회적 차별과 탄압을 겪으며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훈련된 시민들, 이짐전심으로 조직되어 개혁정당과 진보적인 정책들에 흔들림없는 묻지마 지지를 보내주는 유권자들이 벌써 수백만입니다. 거기에 45%가 넘는 국민들이 사민주의에 대한 기대와 선호를 보여주고 있는 나라에서 '사민주의는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건 어려운거죠. 

솔직히 북유럽의 사민당을 지지하는 조직된 노동자들이 뭐 별겁니까? 그들이 대한민국의 호남 유권자들보다 얼마나 더 대단하고 진보적 사상으로 무장한 사람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별거 없을거라는데 백만원 겁니다. 한 집 건너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이 산다는 울산에서는 새누리당이 싹쓸이를 했지만, 호남에서는 전멸한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우습게도, 호남 지역의 그런 새누리당 전멸 현상을 탄식하고, 그런 호남을 지역주의에 사로잡혔다며 손가락질하는 골때리는 인사들이 진보연하면서 뻐길 수 있는 것도 대한민국의 서글픈 현실이죠.)

그리고 세번째, 과연 그 정당이 일관되게 사회민주적 개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보기에 현재의 민주당으로는 솔직히 어렵습니다. 영남의 국회의원 몇석이 모든 정치 행동의 유일한 목적인 사람들이 접수한 민주당은 그것을 절대로 할 수가 없죠. 자신들의 무능을 '반MB'로 감추고, 착한 FTA 나쁜 FTA, 착한 해군기지 나쁜 해군기지를 논하고, 능력보다는 지도부와의 친분으로 공천장을 주고 받고 하는 수준의 정당은 설사 그들이 당장이라도 '사민주의'를 하겠다고 나서도 문제입니다. 어쩌면 목전의 대선승리보다는 당내의 정치 양아치들을 몰아내는 것이 저는 긴 안목으로 훨씬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민주당이 정당의 존재 목적을 분명히 하고, 일관된 철학을 정립하고, 그 깃발 아래 능력있는 사람들을 불러모아도 될까 말까인데, 지금처럼 관장사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잘 될 턱이 없는거죠.

어쨌든, 저는 사회민주주의를 열망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세력은 환골탈태한 민주당과 호남의 굳건한 지지, 그리고 타 지역 서민들의 정치적 연대밖에는 없다고 판단합니다. 이거 말고, 한국사회에서 과연 사회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