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진보라는 단어는 대략 두가지의 서로 다른 의미로 쓰이는거 같습니다.

1. 이전보다 나아진 상태라는 사전적 어의
2. 좌파의 대용어

진보를 1의 의미로 사용할 때는 비교적 논란거리가 될 소지가 별로 없습니다.  그 자체로는 어떤 정형화된 이데올로기가 함의된 단어도 아니고, 어떤 특정 정치세력이 독점적으로 자신들을 지칭할 수 있는 단어도 아니죠. 물론 이전보다 나아졌음을 판단하는 기준이 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단어의 뜻을 가지고 다툴 일은 별로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기준이 경제적 소득 향상이나 생산력의 발전이냐 혹은 인간성의 회복이냐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냐만 서로 밝히면 될일입니다.

문제는 2의 의미로 사용할 때인데, 좌파를 좌파라고 부르지 못하던 우리나라의 비극적인 역사때문에 좌파들이 자신들을 '진보'라고 지칭하는 것을 이해못할 바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 때문에 발생하는 용어의 혼란은 이제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정점에 있는 말이 바로 '진보개혁진영'이라는 국적 불명의 용어인데, 이제는 유명한 지식인들의 글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하는 지경입니다.  보통 민주당과 군소 좌파정당들을 모두 아울러서 통칭할 때 그렇게 부르는 모양입니다.

이게 왜 이상한 말이냐면, 원래 개혁이라는 말이 진보를 이루는 방법이나 어떤 태도를 의미하는 단어이거든요. 이를테면 '인류는 대부분 개혁을 통해서 진보했고, 아주 가끔 혁명을 통해서 진보했다' 라는 이덕하님의 명언이 진보와 개혁과 혁명을 가장 올바르게 사용하는 모범적인 문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진보와 개혁은 서로 상충하는 단어도 아니고, 따로 분리시켜 병렬로 배치하고서는 '진보개혁'이라고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진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상에 있어 개혁과 병렬시킬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바로 혁명입니다.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말이 되지만, '개혁이냐 진보냐' 라는 문장은  그 자체로 성립될 수가 없는거죠. 따라서 '혁명을 통한 진보'를 포기한 정치세력은 일단은 모두 '개혁진영'이라고 불러야 올바르다 할 것입니다. 

(또한 진보와 대립시켜 병렬시킬 수 있는 단어는 바로 보수가 아니라 수구입니다. 진보 vs 보수 NO, 진보 vs 수구 OK)

현재 우리나라의 모든 합법정당들은 혁명을 통한 진보에는 일단 모두가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개혁을 통해서는 진정한 진보를 이룰 수 없다' 라는 군소 좌파정당 지지자들의 이 말은 대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일까요? 유일하게 진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개혁 아니면 혁명인건데, 이미 스스로 혁명을 포기한 사람들이 저런 말을 주저없이 사용하는 모습은 뭘 어쩌자는건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유명한 대학 교수들이 그러니 아햏햏한거죠.

그러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과거 좌파의 대용어로 주로 쓰이던 말은 지금처럼 진보가 아니라 바로 '혁신'이었죠. 50 ~ 70년대의 기사들을 검색하면 '혁신계열 정당'이라거나 '혁신계열 인사' 라는 표현이 자주 쓰이는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80년대 이후 맑스레닌주의로 무장한 본격 좌파(?)들이 등장하면서 자신들을 이전의 혁신계열 인사들과 구분하기 위해 진보라고 자칭하면서 진보가 좌파의 대용어로 굳어진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기존의 야당 세력들을 '보수 야당'이라고 부르고, 그들을 '혁명을 거부하면서 개혁에만 몰두하는 개량주의' 라고 비판하던 것이 오늘날 마치 '개혁진영'이 따로 있고 '진보진영' 이 따로 있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입니다.   

그런데 이게 자꾸 그렇게 사용하다보니까 이제는 좌파들이 진보를 좌파의 대용어로 사용하던 원래의 어의를 은근슬쩍 갖다 버리고서 1의 사전적 어의까지 욕심을 내며 포함시키는 바람에 현재와 같은 용어상의 혼란이 발생하고, 더불어 본인들의 정치적 정체성까지 모호해져버리는 부작용까지 발생하는 것이죠. 좌파들이 진보라는 모호한 용어로 자신들을 지칭하니까, 자신들의 정치적 정체성까지 모호해져 버렸다는 말씀이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진보개혁진영'이라는 이상한 말을 아직도 사용하는 이면에는 아직도 운동권의 철지난 맑스레닌주의적 태도가 관행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애초에 '개혁진영'과 '진보진영'이 마치 별개로 존재하는 무엇인 것처럼 구분하던 기준이 바로 맑스레닌주의적 사고틀에서 그랬던 것인데, 그랬던 본인들 스스로 맑스레닌주의를 폐기했다고 말하면서도 당시의 사고틀에서 유래한 단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은 지적으로 매우 게으른 태도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민주당에 대한 태도, 호남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죠. 제 자신 과거 맑스레닌주의자였기 때문에, 그쪽 출신 지식인들이 민주당과 호남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말속에서 맑스레닌주의의 진한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더 황당한 것은 좌파들이 자신들을 진보라고 부르니까, 우리나라 우파들이나 수구들이 저절로 보수가 되버리는 이상한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죠. 보수는 원래 우파를 지칭하는게 아니라 '더 나은 대안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 현재의 것을 가장 최선이라 여기며, 함부로 뜯어 고칠 때 나타나는 시행착오를 경계하는 태도'입니다. 어쩌면 우파 좌파의 이념을 떠나 변화에 대응하는 가장 합리적인 자세일 수도 있는건데, 좌파들이 자신들을 진보라는 대용어를 사용하며 감추다 보니까 우리나라 수구우파들에게 '보수'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을 부여하는 기가 막히는 일도 벌어지는 겁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는 변혁이라는 말도 있는데, 알다시피 혁명의 대용어입니다. 그 의도와는 무관하게,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자칫 독자들을 기만하고 오독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똑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인데, 혁명운동과 변혁운동은 전달되는 뉘앙스가 사뭇 다르죠?

저는 그래서 앞으로는 저만이라도 아크로에서 글을 쓸 때에는 다음과 같이 사용하려고 합니다.

민주당은 민주당으로, 진보정당이라고 불리는 정당들은 군소 좌파정당으로, 민주당과 군소 좌파정당들을 통칭할 때 쓰는 진보개혁진영은 걍 개혁진영으로. 이미 굳어진 표현이라 새로운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잘못된 관행은 고쳐져야 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