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디씨인사이드 종교갤에서 누군가와 주고 받았던 내용을 원문을 약간만 고쳐 올려 봅니다. 디씨체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종교의 창시자 그리고 종교의 타락 - 디씨인사이드버전 

오늘 어떤 자유주의 기독인과 이야기를 나누었어.

그분 말씀이 며칠전 어떤 카톨릭 시설에 갔는데 그곳에 무슨 주교인지, 교구장인지가 왔다는 거야. 그런데 그곳 사람들이 무슨 신을 모시듯이 그분을 대했다는군. 옷도 입혀주고 벗은 옷도 무슨 의식을 하듯이 개어서 상자에 넣고 어쩌고 하더라네. 그 꼬라지를 보고 참 종교라는 것이 희한하다라는 생각을 했다네. 그러면서 개신교의 목사에 대한 신자들의 예우, 그리고 다시 승려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어.

나는 이런 이야기를 했지.

불교의 근본분열은 승려들의 권위주의때문에 일어났다고.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승가의 분열의 시초가 된 마하데바의 이야기를 했지. 물론 이 일화는 근본분열에 대한 설명 중 일부분이야. 또 다른 설도 있는데 일단 생략할께.

이야기인즉슨, 마하데바라는 아라한이 아침에 옷을 벗어서 시종승에게 빨도록 명했는데 시종승이 보니까 옷이 정액으로 젖어 있었던 거야. 시종승은 황당했지. 어떻게 아라한이 몽정을 하느냐는 거야. 자나 깨나 번뇌를 여읠 수 있어야 아라한이야. 더구나 누진통을 했다면 몽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누진통을 이루지 못했다면 아라한은 아닌 것이고. 그래서 시종승이 물어보니 마하데바가 말하기를...

“짜슥아, 아라한도 번뇌가 일어날 수 있지. 더구나 잘 때에는 마구니의 힘에 의해 몽정을 할 수도 있지. 아라한이라고 별거냐?” 라...는 식의 이야기를 전달했지. 이게 뭔 말이래? 더 황당해진 시종승이 마하데바의 이야기를 승가에 하자 이 건 큰 문제가 되었어. 여기저기서 쑥덕쑥덕, 그러다가 공론화까지 된거야.

허걱... 일이 커지자 마하데바는 소위 대천오사송설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한거야. 여기서 대천이라는 말은 마하데바의 이름을 한문으로 의역한거야. 대략 다음과 같아.


<1> 여소유(餘所誘)

       아라한은 번뇌에 의하여 음행(淫行)을 하는 일은 없어도 마구니 등 어떠한 유인에 의함 음행, 즉 몽정과 같은 일은 있다는 것.


<2> 무지(無知)

       아라한은 번뇌망상의 원인이나 그를 끊어 버리는 등에 관한여는 모르는 바가 없지만, 그 밖의 일반 세속적인 일에 있어서는 모르는 바가 있다는 말이다.


<3> 유예(猶豫)

       아라한은 번뇌와 깨달음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의심이 없지만, 그 밖의 일에 대하여는 의심이 있을 수 있다는 것.


<4> 타영입(他令入)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어야지 자신의 깨달음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


<5> 도인성고기(道因聲故起)

    (아라한도 괴로울 때가 있고 그 아라한 혹은)인간이 괴로움을 깨닫고 [아, 괴롭구나.]하는 소리를 밖으로 낸다든지, [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 등 염불을 목소리를 내어 하면 보리심(菩提心)이 일어난다는 것.


이건 당시 아라한들은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이었지. 그래서 이를 부정하는 상좌부와 이를 용인하는 대중부로 나뉘었는데 이로 인해 상좌부는 소승으로 대중부는 대승으로 분열해 나간다는 것이야.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설정이고 내가 하고자 한 말은 이 설화 자체가 당시 불교가 이미 석가생존당시보다 엄청나게 타락했다는 것을 방증한다는 말이지.

소승경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와. 석가의 10대제자중 일인인 아나율존자가 옷을 꿰매기 위해 바늘에 실을 넣는데 엄청 애를 먹고 있었대. 천안제일이라고 불리는 아나율존자는 설법시간에 졸다가 이에 대한 책망을 듣고 대오각성하여 전혀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다가 그만 눈이 멀었다는 거야(이건 꼭 반항 같아, 좀 졸았다고 날 책망하다니, 오기로 안 잘거야... 뭐 이런 거....ㅋ.....).

   

<아나율존자가 이렇게 생겼다..고 상상하래.. 조계종에서>


 석가가 보다 못해 아나율에게 그건 다른 제자에게 부탁하라고 말하자 아나율은 자신의 일을 어찌 남에게 맡기냐고 고집을 부렸지. 그래서 석가가 직접 바늘에 실을 꿰어주고 바느질은 아나율이 했다는 거야(이것도 오기로 개기는 아이한테 부모가 져주는 스토리 같아... 내가 보기에는).

어쨌든 석가 생존당시에는 아무리 아라한이라 할지라도 시종승에게 무언가를 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이거야. 승가는 그야말로 모두가 평등한 사회였지. 이건 당시 인도사회에서는 혁명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어. 승가에 들어오면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가 따로 없었어. 모두가 동등한 수행승일 뿐이지. 당시에 이걸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어?

숫타니파타의 내용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어. 사람의 신분은 태생이 아니라 그사람의 말과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브라만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브라만의 행동을 해야 브라만이 되는 것이고, 수드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드라처럼 행동하는 자가 수드라라는 것. 이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발언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이미 시대를 앞서간 혁명적인 사람이라는 거지. 

난 예수가 제자의 발을 씻어준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봐. 예수는 권위주의와 형식주의에 찌든 유대교에 평등의식, 열린 사고를 부여했던 것 아냐? 즉, 예수라는 인물이 실존했는지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초기 기독교사회가 지향했던 이상은 이런 모습이라는 거지. 신이 인간의 발을 씻길 수 있는 그런 사회.

다시 마하데바로 돌아가서, 어쨌거나 마하데바시대에는 이미 고승이랍시고 권위를 부리고 자신의 옷가지를 시종승에게 시키는 것이 일반화 되었던 거잖아. 석가생존 당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불멸 후 백년, 혹은 이백년이 지나니까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일화가 되어 나온다는 거, 이거 한심 한 거 아냐?

 마하데바의 오사송설이 맞건 틀리건 별 관심이 없어. 그밖에 사소한 계율문제로 계속 분열이 일어나지만 그 또한 석가의 뜻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봐. 분명한 건 현재의 불교형태는 석가가 원했던 형태는 아니라는 거야. 물론 개신교 역시 예수가 설파한 것(혹은 원시 기독교에서 예수가 설한 것이라 생각한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개판으로 변질 되어 버렸고. 완전소중 김홍도목사 좀 봐, 예수가 본다면 아마 억장이 무너질 거야. 이런 무리들을 본다면 예수는 채찍대신 기관총을 난사할지도 모르지. 이건 독일의 문학가 에리히 케스트너의 시에도 나오는 구절이야.

그 양반이 풍자에는 또 본좌급인데 대충 아래와 같은 내용의 시가 있었어..

 - 늙은 목사님이 일요일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여셔서 설교하신다

    만일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채찍이 아니라 기관총을 쏘아 갈길 겁니다-

뭐 대충 이런 내용으로 기억해.

전에도 말했지만 대부분의 종교가 발생할 당시에는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일종의 선각적 사상으로 태어기 마련이야.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짜라투스트라도 당시의 이란의 종교인 마기교의 구태를 개혁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그러더라구. 그러나 창시자가 죽고나면 인간들은 다시 구태의연한 경전을 만들고 죽은 시체를 붙잡고 생쇼를 하면서 새로운 모순을 만들어 나가지. 종교가 제도화되면 새로운 의식이 생기고 교리가 생기고 닫힌 마음의 인간은 그 교리를 죽은 것으로 만들며 삶을 옭아매는 것 같아.

열린 마음, 열린 사고, 그리고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 이런 것이 없다면 이미 그건 죽은 종교라고 봐. 죽은 종교가 산 사람의 삶을 옭아맨다는 것, 그것이 현재 종교의 근본문제 아닐까?

P.S. 근본분열의 원인에 대해서는 대천오사송설 이외에도 십사비법이라는 설도 존재해. 이건 대천오사송설보다 더 사소한 계율문제에 대한 것인데 주로 보시와 음식에 관한 계율 10가지에 대한 문제야. 금은을 받으면 안되고 식사시간 이외에는 우유를 마셔도 안되는데 동인도 지방의 비구들은 태연하게 돈도 받고 우유도 마시는 것을 보고 서인도에서 온 야샤스라는 비구가 뭐 이렇게 빠진 놈들이 비구야? 하면서 문제를 제기해서 이걸 비법으로 규정했는데 다수의 비구가 여기에 찬성하지 않은 것이 근본분열이라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