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법스님이 위원장인 화쟁위원회 주최로 작년부터 종교평화 선언을 내놓고 종교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주도권을 행사하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반발이 심하여 아직 발표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초안을 싣고 그에 대한 반대론을 적어봅니다
저는  종교평화 선언의 취지와 내용에 동감합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완전히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그 요지나 주장하는바가 그다지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다인종, 다문화 사회입니다. 이와 함께 한국사회는 다종교 사회입니다. 기독교, 불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천주교, 민족종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가 한국사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믿음과 진리관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연기적 세계관은 서로 다른 인간들이 상호 존중하고 상생할 수 있는 평화적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연기적 세계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과 ‘저것’ ‘나’와 ‘남’은 서로 별개의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연관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연기적 세계관으로 본다면 반목과 대립은 바람직한 생존의 방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 ‘이것’ 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남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을 인정해야 하고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는 남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 연기적 세계관의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웃종교는 ‘이웃’에 있는 나 자신의 종교이며, 내 종교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관된 존재일 뿐 아니라 서로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나의 종교가 우주 전체를 담고 있듯이 상대의 종교 또한 우주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 인연의 차이일 뿐입니다. 각자의 다른 인연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은 ‘있는 그대로’ 세계의 실상이며 아름다움입니다. 바로 이러한 세계관이 불교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다원적 상황을 이해하는 관점이며, 이웃종교와 관계 맺기를 원하는 바탕입니다.
이웃종교에 대한 관용과 열린 정신은 기원전 3세기 중엽 인도의 아쇼카왕이 남긴 새김글에도 잘 언급되어 있습니다.

저 아쇼카왕은 모든 종교의 신자들, 그들이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모두를 존경합니다. 각 종교마다 기본 교리는 다를 수 있으며, 자신의 종교를 선전하느라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어떤 의도에서이건 자신의 종교에 오히려 더 큰 해악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조화가 최선입니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자신의 종교도 발전하게 되고 진리도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불교인은 이 내용을 역사적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소중하게 실천해야 할 가르침으로 받아들여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 불교인은 오늘날 종교 간의 갈등상황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합니다. 연기적 세계관은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관점이며, 불교가 세상과 관계 맺기를 원하는 방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불교인들은 이웃종교를 진정으로 ‘이웃’으로 생각하는데 충분하지 못했으며 이웃종교인의 허물을 내 허물로 여기고 그들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데 충분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이웃종교를 질시하거나 경쟁하는 상대로 여겼던 적은 없었는지 반성합니다. 그리고 이웃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귀 기울여 배우려는 노력이 충분하지 못하였음을 반성합니다.
이런 반성과 참회 위에서 우리 불교인은 한국사회의 종교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불교적 입장과 실천을 다음과 같이 천명합니다.

(1) 열린 진리관
불교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열린 진리관은 이웃종교를 대하는 기본 원칙이며 대화와 소통을 위한 출발입니다.
진리란 특정 종교나 믿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모든 믿음에 다 열려 있습니다.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2) 종교다양성의 존중
  내 종교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종교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웃종교에 대한 인정과 관용이라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그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웃 종교와 우리는 경쟁적 관계가 아닙니다. 진리를 향한 동반적 관계이며 이웃종교의 장점을 통해 내 종교의 부족함을 채우는 상호보완적 관계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한 동지적 관계입니다.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존중할 때 공통점이 더욱 빛나 보이며 모두 진리를 향한 동반자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상호존중의 호혜성은 종교다양성을 실천하는 최소한의 원칙입니다. 이 원칙은 다종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불교인이 지켜야 할 또 하나의 정법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되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진정한 정법수호의 정신입니다.

(3) 전법과 전교의 원칙
  믿음을 전하는 일은 곧 자신의 믿음을 다듬어 나가는 과정이요, 서로 다른 믿음을 지닌 이들과 어우러지면서 큰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입니다.
 실천적 활동을 통해 내 믿음의 참됨을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말없는 감동이 가장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말로 전하는 일은 가장 나중의 일이며, 또한 가장 조심스럽게 행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실현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습니다. 나의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 타종교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지향하고 다른 종교인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법이어야 할 것입니다.

(4) 공적영역에서의 종교 활동
  국가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으며 민주주의의 이념과 절차를 지향하는 한국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이 믿고자 하는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 자유는 어떤 종교도 믿지 않을 자유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전파하려고 하는 행위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일 뿐 아니라 자신에게 위임된 공적 권력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공적 영역의 종교 활동은 민주적 이념과 시민적 상식과 부합돼야 합니다. 특히 자신의 믿음을 전하기 위해 공적 지위나 권력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공적 권력이 신앙전파의 수단이 되거나 공적 장소가 신앙 전파의 무대가 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비극입니다. 개인적 신앙이 공적 영역에 작용해 종교적 편향성을 낳는 것은 결과적으로 모든 종교의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언제나 이를 유념하고 공정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5) 평화를 통한 실천
  현실은 종교의 이상과 실천력을 가늠해보는 좋은 현장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올바른 가르침을 판별하는 기준의 하나로 ‘사람’이 아닌 ‘법’에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종교 간의 갈등과 충돌은 사람의 일이지 가르침의 문제가 아닙니다. 종교 간의 갈등 상황에서 상대방 종교의 가르침이나 지도자를 비난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평화만이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종교간 평화를 가로막는 갈등 상황이 오더라도 우리 불교인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평화를 이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는 하나의 좋은 모범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불교인은 이상의 입장과 실천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종교평화가 정착되고 한국사회의 다양한 갈등과 분쟁의 해결에 하나의 모범적 사례가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서원을 함께 세우고자 합니다.
 
□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서원

우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와 안락을 얻고자 하듯이 이웃종교인들도 그들이 믿는 종교를 통해 평화와 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길은 다르지만 우리가 이르고자 원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이웃종교의 가르침도 소중하게 여기겠습니다. 내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이웃종교를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 그들의 종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웃종교인과 더불어 고통 받고 소외된 모든 생명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구촌 곳곳의 가난과 질병을 퇴치하고 전쟁과 폭력을 방지하며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파괴를 막아 모든 생명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불교 사회정책 연구소 법응스님의 비판

  현 불교와 종교 갈등의 대표적 종교인 기독교계와의 중대한 차이는 절대적 신 즉 창조주의 인정 또는 불인정이냐다. 즉 ‘불변고정’이냐 ‘무상’이냐 하는 절대 융섭할 수 없는 괴리다. 아울러 창조주를 거울삼아 제행무상을 이해하자는 것인지, 타 종교인에게는 제행무상을 거울삼아서 창조주를 더 인정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문장이다.

- [‘이웃’에 있는 나 자신의 종교이며, 내 종교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라 할 때, 다종교 사회에서의 종교 현실의 현상을 넘어서 내면의 세계관이 결국 창조론이나 연기관이 다 하나라는 인정으로 창조론 속에 연기관이, 연기관 속에 창조론이 성립한다는 이해가 어려운 주장이다.

[나의 종교가 우주 전체를 담고 있듯이 상대의 종교 또한 우주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연기관과 창조론을 혼돈케 하는 대표적 문장이다. 결국 불교와 기독교를 동일선상에 보고 있다는 결론이 가능하며 이는 연기론적 우주관과 일체유심조를 폄훼하는 문장으로 충분하다.

- 승려와 목사나 신부가 순수한 인간 대 인간 즉 ‘한 물건(有一物)’로서는 연기적 관계가 가능하나, 그들의 세계관이 충돌 할 때 연기론적 이해는 가당치가 않다

- 어느 종교를 믿고 살다죽으나, 어떻게 살든지 간에 죽는 것은 다 동일하다는 식의 주장으로 해석이 가능하기에 문제다.


각자의 다른 인연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은 ‘있는 그대로’ 세계의 실상이며 아름다움입니다. 바로 이러한 세계관이 불교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다원적 상황을 이해하는 관점이며, 이웃종교와 관계 맺기를 원하는 바탕입니다.

- [각자의 다른 인연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은 ‘있는 그대로’ 세계의 실상이며] 나와 다른 종교와 사상을 이해하는 관점, 광대무변한 마음의 세계를 이해 할 때 별 무리가 없는 듯 하지만...

- 그러나 이는 종교의 세계를 넘어서 살인 등 범죄, 일본의 옴 진리교 등 신비주의에 의한 광신교 등을 인정 가능하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선과 악, 다름이 존재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 할 때 선의 무력증, 인류가 추구해야하는 보편적 가치로서 인권, 복지, 환경마저도 불필요 한 것이며, 모든 파괴의 자행마저도 있는 그대로의 실상으로 합리화 내지 미화가 가능하다. 매우 우려스런 대목이며 발상자체가 의심스럽다. ‘백백교’도 인정하자는 주장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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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불교인은 이 내용을 역사적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소중하게 실천해야 할 가르침으로 받아들여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 불교인은 오늘날 종교 간의 갈등상황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합니다. 연기적 세계관은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관점이며, 불교가 세상과 관계 맺기를 원하는 방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불교인들은 이웃종교를 진정으로 ‘이웃’으로 생각하는데 충분하지 못했으며 이웃종교인의 허물을 내 허물로 여기고 그들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데 충분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이웃종교를 질시하거나 경쟁하는 상대로 여겼던 적은 없었는지 반성합니다. 그리고 이웃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귀 기울여 배우려는 노력이 충분하지 못하였음을 반성합니다.

- 이 대목은 예로 과거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의 천진암에서 관군에 쫓긴 천주교인들을 숨겨주고 그들에게 강학의 장소를 제공해서 ‘이웃’이상으로 대한 스님들을 욕보이는 문장으로 충분하다.

- [이웃종교를 진정으로 ‘이웃’으로 생각하는데 충분하지 못했으며 이웃종교인의 허물을 내 허물로 여기고 그들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데 충분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생각만으로는 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 이는 현행법도 그러하고 부처님도 마음으로 단지 생각만은 죄가 안 된다 했다. 그것이 행동으로 표출될 때 문제다. 마치 불교가 승려들이 기독교나 타 종교를 생각으로라도 배척 했다는 의미로 해석되며, 또한 그들을 우리 불교계나 승려개개인이 지나치게 ‘이웃'으로 여길 이유가 무엇인지도 의문이다.

- 문장 작성자는 그러한지 모르나 그러하지 않은 대다수의 승려들을 모독하기에 충분하다.


이런 반성과 참회 위에서 우리 불교인은 한국사회의 종교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불교적 입장과 실천을 다음과 같이 천명합니다.

(1) 열린 진리관
불교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열린 진리관은 이웃종교를 대하는 기본 원칙이며 대화와 소통을 위한 출발입니다.
진리란 특정 종교나 믿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모든 믿음에 다 열려 있습니다.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 불교와 이웃종교로 대변되는 기독교에 대해 ‘불교도 진리중 하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깡그리 무시하는, 스스로가 진리가 아니라는’ 심하게 말해 ‘해종행위’의 문장이라 까지 할 수 있다.

- 이 대목에서 ‘진리’는 모든 종교가 보편적 가치로 추구하는 자비, 사랑, 박애, 헌신, 보살행, 나눔 등의 ‘지말무명’적인 것이 아니라 생사관으로서 ‘근본무명’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하며, 지나친 표현이다.

-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즉 이 문장은 연기적 세계관, 사성제, 무아, 삼세인과론 등 부처님의 가르침이 기독교의 세계관인 ‘창조론’과 단어만 상이하지 내용적으로 같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진다.

- 현 기독교 학자들은 불교의 연기법, 사성제 등을 성경에 대입하여 불교를 무력화 시키고 있다. 우주의 변화를 불교적 제행무상관에서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운운 한다.

- 승려의 입장에서 타 종교에도 진리가 있다라 대 놓고서 종단 차원에서의 선언은 불교를 부정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단지 타 종교의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지말무명’의 해결에 대한 노력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 종교간 평화, 상생을 부정할 자는 없다. 그러나 [이웃종교에 대한 인정과 관용이라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그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라는 문장은 종단 기구가 승려들을 향해서 기독교를 배우라는 의미로 해석이 충분하다. 중대한 오류라는 생각이다.

-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되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진정한 정법수호의 정신입니다.] 별안간 튀어나온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3) 전법과 전교의 원칙
믿음을 전하는 일은 곧 자신의 믿음을 다듬어 나가는 과정이요, 서로 다른 믿음을 지닌 이들과 어우러지면서 큰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입니다.

실천적 활동을 통해 내 믿음의 참됨을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말없는 감동이 가장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말로 전하는 일은 가장 나중의 일이며, 또한 가장 조심스럽게 행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실현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습니다. 나의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 타종교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지향하고 다른 종교인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법이어야 할 것입니다.

- 우선 이 대목은 무명에서 허덕이거나, 그릇된 종교관이나 사상을 가진 자들을 바른 길로 인도를 포기하는 즉 불교의 포교를 포기하는 선언과 다름이 없다.

- [믿음을 전하는 일은 곧 자신의 믿음을 다듬어 나가는 과정이요, 서로 다른 믿음을 지닌 이들과 어우러지면서 큰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입니다.] 불교에 대한 무지한 문장이다. 불교에서 ‘신(信)의 의미는 수행을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하면 성불을 한다는 확신의 의미다. 혹 불교의 믿음(信)을 타종교인의 사실상 절대적 믿음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 불교의 ‘믿음’에 대해 말을 할 때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의 입장을 기본으로 해서 거론돼야 마땅하다.

-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실현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습니다.]라 한바 이는 ‘전법’의 의미를 불과 몇 사람이 규정하는 대 오류를 범하며, 설사 전법이 개종이 아닌 불교를 이해시킴에 한주 하고 개종여부는 당사자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전법의 의미를 제한’하여 스님과 포교사들로 하여금 혼돈을 자초하고 이해에 따라서는 불교는 타 종교인의 개종을 시키지 말라는 의미로 까지 확대가 가능하다. 어떠한 의도에서 작성된 문자인지 이해가 안 된다.

- 석가모니부처님이 당시에 개종을 강요하지 않은 것은 부처님만이 가능한 일이며, 현 시대에 구태여 필요하다면 이러한 결정은 ‘종정예하’만이 가능하며 합의가 필요하다. 아니 구태여 거론할 필요가 없는 내용이다.


(4) 공적영역에서의 종교 활동
국가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으며 민주주의의 이념과 절차를 지향하는 한국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이 믿고자 하는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 자유는 어떤 종교도 믿지 않을 자유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전파하려고 하는 행위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일 뿐 아니라 자신에게 위임된 공적 권력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공적 영역의 종교 활동은 민주적 이념과 시민적 상식과 부합돼야 합니다. 특히 자신의 믿음을 전하기 위해 공적 지위나 권력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공적 권력이 신앙전파의 수단이 되거나 공적 장소가 신앙 전파의 무대가 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비극입니다. 개인적 신앙이 공적 영역에 작용해 종교적 편향성을 낳는 것은 결과적으로 모든 종교의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언제나 이를 유념하고 공정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5) 평화를 통한 실천
현실은 종교의 이상과 실천력을 가늠해보는 좋은 현장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올바른 가르침을 판별하는 기준의 하나로 ‘사람’이 아닌 ‘법’에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종교 간의 갈등과 충돌은 사람의 일이지 가르침의 문제가 아닙니다. 종교 간의 갈등 상황에서 상대방 종교의 가르침이나 지도자를 비난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 [부처님께서는 올바른 가르침을 판별하는 기준의 하나로 ‘사람’이 아닌 ‘법’에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내용을 의미한다. 결국 종교 간의 갈등은 ‘법’인 ‘자신의 종교철학에 기인’함을 알아야한다. 사람으로서 종교인의 몸과 입을 빌어서 말이다.

- 되레 선언문 작성이 ‘법’이 아닌 사람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느낌이다.  


평화만이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종교간 평화를 가로막는 갈등 상황이 오더라도 우리 불교인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평화를 이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는 하나의 좋은 모범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불교인은 이상의 입장과 실천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종교평화가 정착되고 한국사회의 다양한 갈등과 분쟁의 해결에 하나의 모범적 사례가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서원을 함께 세우고자 합니다.

□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서원

우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와 안락을 얻고자 하듯이 이웃종교인들도 그들이 믿는 종교를 통해 평화와 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길은 다르지만 우리가 이르고자 원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 많은 분들이 진리는 하나며 마치 등산 시 산정을 향하는 목적은 하나라 한다. 언어의 희롱이다. 산의 정상에 ‘무아’와 ‘무상’이 있는 산인지, ‘창조적 하나님의 십자가’가 있는 산인지는 분명 다르다. 종단 적 차원에서의 발표는 심중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이웃종교의 가르침도 소중하게 여기겠습니다. 내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이웃종교를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 그들의 종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기독교식의 ‘기도’가 불교 내부에 판치고 있다. 가히 ‘종교문화사회주의’라 할 것이다. 불교가 삼투압 현상으로 타종교에 빨려 들어간다는 생각이며 현실이다. 위험한 발상이다.


이웃종교인과 더불어 고통 받고 소외된 모든 생명들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구촌 곳곳의 가난과 질병을 퇴치하고 전쟁과 폭력을 방지하며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파괴를 막아 모든 생명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3. 끝내며

급한 마음에 우선 정리를 했습니다. 이 선언의 문제는 결국 조계종을 대표하는 선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선언을 준비한 분들의 노고와 필요성은 인정하나, 조계종을 대표해서 나가는 모든 선언은 단어하나, 점 하나까지도 조심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 지나친 표현도 있음을 인정하고 애종심으로 이해 바랍니다.

지난번 비공개 토론회에서 여러 문제를 지적했으며, 당시 자리를 같이한 다른 토론자들도 많은 부분을 동의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교정하거나 좀 더 전문적인 불교계 인사들로 하여금 검증하고 중진 대덕의 동의를 받아야 마땅한 사안입니다. 이것이 종평위나 화쟁위가 대표적으로 하는 사안이나, 종단을 넘어 범 불교계의 일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이 선언을 타종교계에서 악용할 여지가 있습니다. 이를 간과해선 안 됩니다. 불교의 다양한 방편 중에 적용할 바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발표문을 공개해서 대중적으로 건의나 문제제기를 하라는 것이 열린 자세인지는 모르나 언론을 통해 한번 나간 것은 회수가 불가능 하며,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비추어 질수도 있음이 염려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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