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듀나 게시판에서 눈에 띈 글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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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중국의 옛이야기인데 가끔씩 되새겨 음미해볼 만하다. "한 선비가 기녀를 사랑하였다.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 의자에 앉아 백 일 밤을 지새우며 기다린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 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아홉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 이렇게 짧고 깊은 이야기. 롤랑 바르트는 이것을 <사랑의 단상>에서 '기다림'에 관해 말하는 대목 끝에다 적어두었는데, 그저 그러기만 했을 뿐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저런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유리로 지어진 집 같아서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다 깨뜨리고 나오게 되니까. 그 집 안에 빛나는 진실 하나가 숨어 있는 것 같아 애가 닳아도 그냥 유리 밖에서 고요히 안을 들여다보기만 해야 좋다. 진실의 실루엣 같은 게 얼핏 보여도 경박한 문장들로 옮겨 적지 않는 게 좋겠다. 어떤 진실은 내성적이고 연약해서 그저 그렇게 도사리기만 할 뿐 말해지지 않는다.

 

진실을 함부로 발설하려 하지 않고 그것이 온전히 거주할 공간을 만들어 주는 일은 어렵고 옳고 아름답다. 발설하는 순간 훼손될 진실이라면, 세상에 내놓을 게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 시인들의 일이 그와 같다. 흔히 시(詩)를 일러 '말[言]로 지은 사원[寺]'이라고들 하나 사실은 틀린 말인데, 왜냐하면 '시(詩)'는 뜻과 뜻이 결합돼 있는 '회의문자'가 아니라 뜻과 소리가 결합돼 있는 '형성문자'이므로, '寺'는 그저 '詩'가 시로 발음되도록 거기 있을 뿐 '사원'이라는 뜻을 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를 쓰려고 마음먹은 이들이라면 그냥 그렇다고 믿어버리는 게 좋다. 그리고 저 중국의 옛이야기를 세 문장으로 지어진 사원이라 생각하고 그 앞에서 좋은 시의 모범을 궁리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선비는 왜 아흔아홉번째 밤에 기녀의 집 앞을 떠났을까. 아마도 그 결단 속에 사랑의 어떤 진실이 숨어 있겠지만, 저 이야기는 번잡한 말로 그 진실을 발설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은 온전히 저 자신인 채로 내내 숱한 방문객을 맞을 것이다.

 

중략

 

왜 선비는 아흔아홉번째 날 밤에 기녀의 정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기녀는 알았을까. 선비라고 알았을까. 그냥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은 한참 후의 일. 누구도 삶에 대해 너무 많이 알 수는 없어서 우리는 때로는 선비가 되었다가 때로는 기녀도 되었다가 하면서 마음을 섭생할 밖엔 없는 것인데, 그렇게 우리는 만나고 헤어지고 기억하고 잊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겠지. 마음이 저지른 일을 마음이 이해하는 과정이 삶이라면, 모든 문학은 결국 '그렇게 된 일이 그리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그러니까 마음의 소이연(所以然)을 더듬고 또 더듬는 일인 것일까. 그러나 시의 길은 산문의 길과는 다른 것이어서, 이 시인이 이 시집을 통해 그리했듯이, 시인의 일이란 언제나 그 소이연을 묻고는 충분히 대답하지 않는 일, 섬세하고 아름답게 대답을 유보하여 그 진실을 잘 보존해두는 일이다.

 

후략

 

신형철, , 김소연 시집에 달린 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