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은 '브루조아 민주주의'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주장은 419 혁명동지회(맞나? 하여간) 홈피에 그 관련논문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419 당사자들도 '브루조아 민주주의'라는 주장에는 크게 이의가 없다고(또는 주장 중 하나로 용인되는)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저는 419해석 중에서 이 '브루조아 민주주의 혁명'을 가장 맞다...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브루조아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러시아 혁명을 인용하여 간단히 구술하자면 이렇습니다.

"2월 부르주아 혁명으로 시작하여 10월 사회주의 혁명으로 끝난 1917년은 러시아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
출처: [세계노동운동사] 러시아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


브루조아 민주주의라는 맥락에서 본다면 20세기 한국 역사의 큰 흐름이 '일목요원'하게 정리가 됩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미군정에서 '국가의 체제를 어떻게 갈 것인가?'라는 여론조사에서 70%가 넘는 국민이 '사회주의'였다고 합니다.(*1)  그리고 1945년 해방 후 분단이 기정사실화 되자 김일성이 남한에 내린 지령이 바로 '브루조아 민주주의 혁명'...... 그리고 브루조아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주장을 용인하는 419 혁명동지회.

북한에서 419에 대한 해석이 그 이후로 몇번 바뀌었지만 419 직후 김대중의 낮은 단계의 연방의 원본격인(이 낮은 단계의 연방이 바로 김대중=빨갱이라는 덫을 씌우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지요.) 통일 방식에 대하여 김일성이 남한에 제안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419 혁명으로 들어서게 된 장면 정부.


그들이 내놓았던 경제 개발은 미국의 원조를 거부 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장면 정부의 경제 개발은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 '사회주의 체제'에서 통용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516 쿠테타 이후 박정희가 내세운 경제개발이 '장면정부의 표절'이라는 비야냥을 받는 이유는 바로 '박정희 경제 개발'이 디테일에 관계없이 큰 맥락에서 '장면 정부의 경제 개발 방식'인 '사회주의 체제'에서 통용되는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죠.

물론, 1년만에 쿠테타로 정권이 바뀌 탓도 있지만 강준만의 '장면에 대한 해석인, 양반이나 리더쉽이 약한 평가'라던가 천주교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장면은 종교의 길을 걸었으면 대단한 종교인이 되었겠지만 정치인으로서는 글쎄?'라는 평가를 미로어 본다면 516 쿠테타가 없었어도 장면이 자신의 '경제개발 원본'으로 투자유치를 하지못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판단입니다.

반면에 '장면 표절분'으로 가지고 박정희는 미국에서 투자 유치에 성공합니다. 물론, 그 금액이 적어서 한일협정이나 베트남 파병 군인들의 월급을 횡령(?)하여 경제개발의 종잣돈으로 썼습니다.



20세가 한국의 현대사는 한마디로 '조국 독립을 위하여 헌신한 좌파가 일본 강점 당시에 친일파로 좋은 세월을 보내다가 막상 조국이 독립이 되자 친일파들이 변신하면서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좌파들을 때려잡는 기괴한 역사'로 정리가 될 것입니다. 제주 43 사태가 그 좋은 예입니다.(하하하님이 저를 제주43사태의 전설로 만들어 놓으셨던데, 인터넷의 드잡이들-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그루 안티들-이 근거없이 떠드는 말을 '팩트화' 시키는 나쁜 버릇은 지양하시길, 감히 충고드립니다. ^^)


그리고 419는 이 친일파와 좌파의 권력 투쟁의 접점에 있습니다. 419 혁명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왜 친일파 척결에 대한 국민적인 항거는 없었던 반면에 뜬금없는 민주주의 수호 투쟁인 419 혁명이 일어났을까?"


이승만이 친일파인지에 대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단지, 그는 권력욕의 화신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1930년대인가?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던 이승만이 한 한인의 변호를 해달라는 청원을 알뜰히 거절한 것 등을 보았을 때 '민족주의자'가 아닌, 천박한 '미군 하우스 보이'정도의 인식.

문제는 이승만이 권력욕 때문에 친일파를 용인했던 것은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625 발발 이전 제정된 반공법과  625피난 시절 부산피난정권 때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던 당시 대법원장을 해임하고 후대 대법원장으로 추인한 2대 대법원장(이름은 기억이 안나니 패스!)이 친일파였고 그리고 그 이후로 5대까지(4대까지인지 확실히 기억은 안남) 줄줄이 친일파 인물이 대법원장이었다는 것은 이승만의 권력욕이 역사를 어떻게 망쳤고 현대에 이르러 한국의 사법기관이 왜 개판인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더우기, 대단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은 625 발발 이전에, 오늘날 국가보안법의 기원이 되는 반공법을 제정하였고(이 부분은 레드문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오류입니다. 반공법은 1961년 쿠테타 후에 제정되었습니다. 오해 없으시길) 그 법이 결국 친일파의 부활을 이끌게 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쨌든, 친일파 또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승만은 419혁명으로 물러나게 되고 그 후임으로 장면정부와 윤보선 대통령이 들어서는데 장면에 대한 친일 행적은 논란이 많으니(*2) 패스하겠지만 윤보선. 그의 작은 할아버지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5인의 자객 중 한 명이었다는, 골수 친일파 집안 출신이었다는 것.


당연히, 419혁명에 대하여 저는 통념적인 해석과는 다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만(나중에 쓸 날이 오려나?) 그 다른 해석을 포함, 419혁명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친일파를 용인한 대통령을 몰아내고 세운 총리와 대통령은 각각 친일 행적은 물론 그들이 쫓아낸 대통령의 최대 협조자였으며 다른 한명은 악질적(?)인 친일파 집안의 후예..... 그 것을 불러온 419... 그리고 그 것을 배척하는 운동은 없었다는.....(어쩌면 419 혁명 후의 혼란은 그런 연유 때문이겠지만, 역사를 날조하는 조선일보와 마찬가지로 역사를 짜집기하는 진보진영에서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인 419혁명을 폄훼하게 되는 어떠한 역사적 사실도 기록으로 남기기는 싫겠죠. 결국, 대한민국 역사는 우익에 의하여 한번, 진보(좌익)에 의하여 또 한번 뒤흔들리게 되어 기괴한 형상으로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있는거죠.


어쨌든, 그리고 516 쿠테타. 어쩌면 516 쿠테타 이후에 419혁명과 같은 요원한 반대 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군사정권'의 억압이라는 것이 가장 크게 작용하지만, 하다 못해 '항거하다가 단 몇 명의  사상자도 없었다'라는 사실을 박정희의 남로당 이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 박정희의 이력이 516 쿠테타를 성공하게 한 단초가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당시, 박정희의 이력 때문에 북한에서는 516 쿠테타를 찬성하다가 집권 이후로 반공을 국시로 한 박정희를 보고 김일성이 '중국에 박정희에 대한 자료를 달라'고 졸랐다는 기록이나 미국에서는 '오락가락하다'가 찬성도 아니고 반대도 아닌... 속된 말로 엉거주춤하다가 주저앉은 꼴이 되었고 516 쿠테타는 안착하게 되었다는 아이러니.....


결국, 박정희가 516 쿠테타를 성공시킨 이유는 바로 그의 남로당의 이력이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인데(*3) 어쨌든 친일파는 반공을 국시로 하는 박정희 때문에 연명을 하게 됩니다.



결국, 브루조아 민주주의 혁명(제가 찬성하는 쪽의 주장입니다만) 419는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친일파에, 친일파의 친일파를 위한 정권들'의 옆에서 당시 한국의 민중의 대다수였던(*4) 사회주의자......들을 무시하고 '반공'이 정치 권력을 지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10항쟁과 629항복.


어느 사회주의자의  '노력은 사회주의자들이 했는데 과실은 민주주의자들이 가지고 갔다'라는 탄식의 끝에서 419혁명의 '역사의 반복'을 목격합니다.(*5)


419혁명과 629항복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는 518 학살...... 공식명칭은 '518민주화 항쟁'입니다만 저는 518학살로 부릅니다. (*6) 그리고 나중에 후술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7) 제가 518 학살을 최초의 계급운동이라고 해석하는 이유입니다.



친일파에, 친일파의, 친일파를 위한 정권들---브루조아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419에 부쳐.... 잠시 짬을 내서 몇 자 보탭니다.


문제는..... 노무현 정권....이명박 정권.... 그리고 다음 정권....은 국민의 삶과는 무방한 그런 정권들이었다는 점에서 물론 박정희가 경제개발의 기치를 세웠지만 그 것이 오늘날 빈익빈부익부를 너머 절대빈곤층이 다수화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국민의 삶과 관계있는 친일파를 척결하기는 커녕 친일파 출신이거나 친일파를 옹호하는 권력놀음....


역사는 한번은 비국으로 또 한번은 희극으로 우리에게 다가선다고 했나요?

당시의 '친일파에, 친일파의 친일파를 위한 정권들'은 국민들에게 비극으로 다가섰지만 작금의 정권들은 국민들에게 희극으로 다가서네요.


*1 : 이 여론조사 자료는 내 블로그에서 한번 인용이 되었고 강정구 파동 당시 강정구가 논문에서 인용하였다. 강정구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공산주의'로 합산하여 김일성을 옹호하는, 학자로서는 해서는 안되는 왜곡을 하긴 했지만. 참조로 조선일보가 '민족정론지'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일제에 항거하는 글을 쓰다가 투옥된 기자가 언론사 중 가장 많다'라는 것을 근거로 하는 것으로 그 것은 '팩트'이다. 문제는, 디지털 말지에 의하면 그 투옥된 기자의 90%(요 숫자는 틀릴 수도 있다^^) 이상이 좌파였다는 것이다. 좌파의 행위를 '민족의 정론지'라고 하면서 좌파를 때려잡는데 앞장 선 조선일보. '존재가 엽기'라고나 할까...?

*2 : 장면의 친일 행적은 과거사 규명에서 장면의 이름은 친일파 목록에서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정권 때 불거졌던 장면에 대한 친일 행적을 고 김수환 추기경은 '장면이 군입대 장려 대회에 참석했던 것은 교계 대표로 참석한 것이지 친일파로서가 아니다'라고 주장을 했는데 저는 그 김수환 추기경의 발언을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야, 사이비 천주교 신자이지만, 현 베네딕트 교황을 인종주의자이며 저런 인간이 교황이 된 것이 천주교의 수치라는 주장을 몇번 한 것을 천주교 편을 일방적으로 드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로 삼아, 말하자면 우유부단한 장면은 참석 대신에 자살이나 고문 등을 견디는 그런 '험한 일'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저의 생각은 저 유명한 논쟁인 '강만준과 백낙청(맞나? 그 당사자가? 양비론을 위한 변명의 글을 쓴...)의 양비론 논쟁'에서 '허약한 지식인'에 대한 강준만의 비판-비판 자체는 옳지만-이 너무 강하다...라는 생각과 맥을 같이 합니다.

*3 : '그의 남로당의 이력이 큰 공헌을 했다는 것' --> 이 부분은 저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박정희의 친일행각 중 사실인 것, 과대 포장된 것들은 나중에 516 쿠테타 관련 기술에서 적지요. 뭐, 이런 '가쉽거리'적 글쓰기야 10분 20분이면 되는데 이런 역사관련 글쓰기는 하나 제대로 쓰려면 최소한 (퇴근하고)일주일 이상은 다른 일 안하고 써야 겨우 써지는 글이라.... 언제 써질지....


*4 : 1945년 미군정 여론조사 후 12년이 흐른 시점. 국민의 관점은 크게 변했을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고.... 왜냐하면 미군정이 실시한 토지개혁(비록 친일파 땅을 몰수하지는 못한 한계가 있고 오늘날 한국 농업의 피폐의 직접적인 단초가 되지만)으로 인하여 소작농에서 지주로 신분상승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과 그런 것을 목도한 국민들이 사회주의를 그대로 찬성했을까....?하는 판단 때문입니다. 아쉽게도(당연히) 당시 국민들이 원하는 대한민국의 국가 체제는 여론조사가 안되어 있습니다. 이미 전쟁을 한번 치루었고 반공법이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던 시점이니 '자본주의, 민주주의가 대세'가 아니었겠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시 대다수의 국민들이 생존지점에 있었다는 점을 판단한다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5 , *6 : 여기서는 언급만 합니다. 바빠서.... 나중에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단편적인 또는 제법 본격적인 주장들은 제 블로그에서 보시기를... ^^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