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얘, 응?"
"시러. 쑥스러운데?"

"너, 남자 맞니?"


대학 시절, 어느 날, 내 여친이 친구 만나러 가는데 같이 가지고 하더군요. 뭐 원래는 늑대 같은 '싸나이'지만 그래도 여친 앞이라 있는 내숭, 없는 내숭 다 떨었죠.

"그럼 나 혼자 간다."

내가 몇 번 내숭을 떨자 여친은 혼자 가겠다며 몸을 돌리더군요.

"(허걱~ o.,O 그게 아닌데)나를 버리고 가면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


그렇게 졸래졸래 여친 뒤를 쫓아 여친의 친구들을 만나러 학교 밖에서 꽤 떨어진 커피숍까지 갔습니다. 여친이 그 커피숍 문을 열고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갔고 나는 '여친 친구들이 얼마나 예쁠까?'라는 엉큼한 상상을 하면서 그녀의 뒤를 따라 커피숍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닌 말로 '잘못된 만남'도 불사할 각오로 말이죠. -_-;;;

그런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는데 커피숍 한쪽에서 쩌렁쩌렁할 정도의 큰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얘, 미친년아! 여기야 여기"

"미친년아, 좀 빨리 오면 안되니?"


O.,O;;;

허걱~! 순간 커피숍은 쥐 죽은 듯, 아니 미친년 죽은 듯 조용해졌고 커피숍 안의 그 수많은 눈동자들 중 반은 나와 내 여친쪽으로, 그리고 나머지 반은 그 큰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습니다. 내 여친은 그런 쏠리는 눈길은 아랑곳 하지 않고 그 큰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고 나는 잔뜩 주눅이 들은 채로 여친 뒤를 졸랑졸랑 따라갔습니다.

내 여친은 그 큰소리를 지른듯한 여성들 세명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가더니 자리에 앉았습니다. 저는 어쩔줄 몰라 그 테이블 앞에 서서 멀뚱히 여친과 그 여성들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얘, 구루야 앉아, 뭐해?"
"으응~"

여친이 권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다시피한 나는 여친 친구들과 채 인사도 끝나기 전에 궁금한 질문을 내 여친 민정이에게 던졌습니다.


"근데 민정이 너 별명이 미친년이니?"


나의 이 주책없는(?) 질문 때문에 좌석은 한바탕 뒤짚어졌고 여친의 친구 중 하나가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상체를 거의 뒤로 넘기면서 손가락으로 여친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호..하각..하각... 맞아요. 쟤 별명이 바로 미친년이예요."


그렇게 여친의 친구를 소란스럽게 만난 며칠 후 비가 오는 어느 오후였습니다. 여친과 사이좋게 우산 하나를 받쳐들면서 캠퍼스 뒷동산쪽을 올라가다가 나는 그동안 궁금했던 질문을 여친에게 던졌습니다.


"근데......... 왜 너 별명이 미친년이니?"


그러자 여친은 웃을듯말듯 미소를 짓더니 자신이 미친년이라는 별명을 얻게된 동기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친의 어머니는 극렬 여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식들은 반드시 일류대학을 가야한다고 주장을 했고 특히 여성들은 학교 공부 이외에 교양 공부는 필수라며, 그래야 시집을 잘간다며 여친에게 피아노 과외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피아노 과외는 내 여친에게는 고문보다 더한 고통이었습니다.


"내가 숏핑거거든? 너도 알다시피."

여친은 말을 하다 말고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친은 내가 보아도 손가락이 짧았습니다. 그런 여친에게 피아노라니.... 손가락이 길었던 내 친구들 중에도 그 무슨곡이더라? 하여간 손가락 길지 않으면 안쳐지는 곡이 있는데... 하여간... 내 친구들 중에도 손가락 사이를 짼다.. 수술을 한다....는 둥 난리 아닌 난리를 쳤었는데(마치 무용 선수들이 T자 모션으로 가랑이를 찢는 것처럼) 그 것도 어느 정도 손가락 길이가 되야 가능한 것이지 여친처럼 선천적으로 숏핑거는 손가락 마디를 하나 덧대더라도 피아노는 불가능이었습니다.


"피아노 과외는 내게는 지옥이었단다. 내가 너무 힘들어 엄마한테 차라리 마라톤 과외를 하겠다고 했다가 엄청 혼이 났어. 뭐? 시집을 잘가려면 악기 하나는 잘 다루어야 하고 피아노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데 가장 좋다나?"


그렇게 여친은 숏핑거를 가지고 지옥과 같은 피아노 과외를 계속 다녔습니다. 그렇게 지옥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무더운 여름 날........


그 날은 아침부터 후덥지근하기만 하고 비는 내리지 않아 사람들에게 불쾌지수가 최고였던 그런 낭이었습니다. 그 날 따라 불쾌지수가 높았고 피아노들을 치던 학생들 중에 누군가 건반을 잘못 친 모양입니다. 이내 피아노 과외 선생님 입에서는 험한 소리가 나왔습니다.


"누구야! 누가 미쳤어? 미친년 일어서!"

그 부분에서는 솔을 쳐야 했는데 피아노 과외 때문에 힘들어 했던 내 여친은 다른 학생들보다 더 건반을 잘못쳤고 특히 그 부분에 있어서는 손가락을 최대로 뻗어도 미 건반 밖에는 미치지 않아 엉겁결에 미를 쳤다고 합니다. 죄 아닌 죄를 진 내 여친은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피아노 과외 선생님의 험한 소리는 이어졌습니다.


"너 날씨도 더운데 정신 안차라릴래? 한번 더 그러면 진짜 혼난다. 앉아!"


피아노 과외 선생님은 그 곡을 다시 치도록 학생들에게 시켰고 눈을 감고 학생들이 치는 피아노 선율에 맞추어 고개를 까닥이다가 갑자기 눈을 뜨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외쳤습니다.


"이번엔 어떤 년이 미쳤어? 미친년 일어서!"


과외를 받던 학생들이 약속이나 한듯 내 여친에게 눈길을 돌렸고 그런 눈길을 의식한 내 여친은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주의를 한다고 했는데도 그만 똑같은 부분에서 같은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진짜, 너 정신 안차릴래? 내 말이 말같이 안들려? 너 미치더니 미쳤니? 왜 자꾸 미쳐?"


한참동안을 피아노 과외선생에게 후달림을 당한 여친은 힘없이 자리에 앉았고 피아노 과외 선생님은 마지막 기회라며 같은 곡을 다시 연주케 했습니다. 한참 곡이 연주되고 있는데 이번에 또 피아노 과외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습니다.


"누구야? 누가 또 미쳤어? 너희 자꾸 미칠래?"

그러자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여친을 쳐다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키득키득 웃으며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선생님, 민정이가 미쳤데요. 자꾸만 미치고 싶은가봐요."


결국 내 여친은 그 날 나머지 과외 시간을 밖에 나가 담장에 서있는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여친이 벌을 받자 아침부터 찌푸리던 하늘이 드디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글쎄?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까 왠지 설움이 복받치더라. 친구들 피아노 연주 소리가 왜 그리 서글프던지..."

나는 뭐라할 말을 못찾다가 겨우 말 한마디 께냈습니다.


"뭐, 손가락 짧은게 너 죄니? 네 부모님 죄지."

그러자 여친은 빙그레 웃더니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근데 너 그거 아니?"
"뭐?"


"처음에는 분명 내가 미쳤지만 두번째, 특히 세번째는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거?"
".......!"


"나는 세번째는 또 실수할까.... 아니 누명을 뒤짚어 쓸까봐 아예 피아노 건반에 손도 올려놓지 않았거든?"
".......!"


"하여간.......... 그래.......... 내가 미친년이라는 별명을 얻게된 이유가!"


우산 밖으로 비가 거세게 몰아쳤습니다.


지금은 헤어진 그녀, 이제 한 가정의 주부이며 아내며 어머니가 되어 있을 그녀가 여전히 '미치는지' 비가 오는 날이면 가끔 생각이 난답니다. 그녀가 미쳤건 미를 치지 않았건 항상 행복해 보기를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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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년'이라는 유래는 천리안 유머란에서 올라온 유머를 원용한 것이고 '여친'은 결혼하기로 한 '여친'이 유학을 가면서 헤어졌던 여친입니다. 당시, 저는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서 유학은 커녕 학비도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고단한 고학생 신세였는데.... 남친보다는 '공부'가 더 소중했는지.....

 

예전에 제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자펌 형식으로 올려봅니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