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들은 무협소설을 정의내리려는 시도입니다. 혹시라도 적잖은 시간을 내서 아래글들을 다 읽게되실 분들의 관전포인트 - 엄청나게 많은, 아마도 제가 웹사이트에 쓴 글들 중 가장 많이 달린 듯한, 상대글들을 빼버렸기 때문에 '관전'이라는 말에 어폐가있습니다만 - 는 이 정의가 그럴듯한가 여부가 아니라 이 작자가 심혈?을 기울여 무협소설따위나 정의해서 무얼 하려고 하는가입니다. 문화적 창작물들을 정의하려는 시도가 문화적 창작물들의 정치적 의의와 맞물려서 헤게모니 투쟁이라는 형태로밖에는 진행될 수 없으며 - 저마다의 정의를 가지고 그 투쟁에 뛰어드는 이들은 그 투쟁이 헤게모니 투쟁이라는 자각을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 이 자가 이런식으로 무협소설을 정의하는 배후에는 무협소설이 궁극적으로 이러 저러한 정치적 효과를 내는 장르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구나 하는 점을 이해해주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국 무협소설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아는 분들은 제 정의 시도가 '시대착오적'으로 진지하며 무협소설이 완전히 통속화/혼종화되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상실해가는 대세에 아무런 반작용도 할 수 없는 소수의견임을 금방 알아채실 것입니다. 


혹시라도 제가 논쟁을 벌인 이들의 견해가 궁금하신 분들은 문피아 라는 곳의 토론게시판으로 들어가 1번 글과 3번 글의 제목으로 검색하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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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협의 쾌락, 무와 협에 관한 단상들.. 

2006-07-26 19:08:14 


1) 무협의 쾌락 

 

영화든 소설이든 나는 무협을 좋아한다. 안본 소설과 영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콩 TV 시리즈물과 한국 포르노 무협을 빼면 말이다. 내게 무협은 다음 여섯 가지를 의미한다.  

 

(1) 광활한 중국 대륙을 무대로 한다. 그 광활성이 잘 활용되어 이야기가 전개될 때 무협은 '스케일'과 시적 정취를 확보할 수 있다.  

 

한국 무협에서는 잘 안된다. 두 세 작가에게서만 확보되어 있다. 물론 최고는 <용사팔황>이다.  

 

(2) 모든 인간적 능력을 동원한 성취에 관한 이야기이다. 단순한 지나 정신만이 아니라 '몸'이 그 성취의 중요한, 심지어는 중심적인 수단이다.  

 

몸의 생리, 몸의 움직임에 대한 생생한 이해와 표현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렇다고 초식이라는 '관념성' 혹은 '컨벤션'이 빠져야 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일종의 '지적 동작'으로서의 무의 관념성과 신체성을 잘 조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한국의 몇몇 작가는 중국 작가들을 뛰어 넘는 수준을 보여주기도 한다. 

 

(3) 권력과 지배와 정의와 도덕에 관한 가장 '직접적인' 이야기이다. 여기서 직접성은 목숨이 걸려있다는 의미, 그리고 무력이 행사된다는 의미이다. 

 

누군가는 죽어야 하고 피가 흘러야 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죽을 수밖에 없었어야 하고 피를 흘릴 수 밖에 없었어야 한다. 또는 누군가는, 주인공이면 좋은데, 사익이나 인정과 갈등하면서라도 협의를 추구해야 하거나 최소한 협의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인공이 우유부단하거나 피를 끔찍히 여기는 성인군자이거나 천둥 벌거숭이거나 세상 모두에 복수하고 싶어하는 사사로운 개인이거나 해서는 안된다. 아니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할 수 있다 하더라도 어떤 '성장'을 해야 한다.  

 

(4) 숙적 간의 대결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악한 마두에서 나름의 정당성을 갖는 효웅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은 '운명적인' 적을 상대하게 된다. 

 

적이 멋있어야 한다. <복우번운>의 방각 정도면 아주 좋다. 이 멋있음을 결정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는 <적=순수한 악인>이라는 도식 멀리하기 이다. 정의 또는 협의라는 것의 우발성 내지는 애매성 내지는 상대성이라는 인간적 현실에 착목하여 이쪽 저쪽이'다 나름대로 정당한' 운명적 대결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람의 검심>은 이점에서 압도적이다. 혹이라도 적=순수한 악인이라는 구성이 선택된다면 그 악에 대한 '진부하지 않은' 묘사가 관건이 될 것이다.  

 

(5)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라는 면에서는 '고전적'으로 절제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좀처럼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고 첫눈에 반하더라도 은은하게 익어가는 사랑 말이다.  


무협 속의 모든 남녀관계가 고전적일 수는 없겠다. 그러나 어떤 관계들은 그래야 한다.옛 중국 사회의 남녀관계를 현대 자본주의 도시들 속에서의 그것과 혼동하지 말아달라는 주문이기도 하고 사사보다 협의가 앞서는 분위기 속에서의 사랑을 염두에 두어달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물론 그런 고전적인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내 개인적인 주장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많은 무협들은 완전히 실격이고 고룡의 몇몇작품들도 좀 시대착오적이다. 조민과 장무기 사이 정도면 만점이고 대도오에서의 운기려와 주인공 사이 정도면 만일점이다. 한림의 작품들에 천편일률적으로 등장하는 사랑에 미친 주인공들은, 내게는, 전혀 무협답지 않다.  

 

(6) 무인인 여성이라는 여인상을 만날 수 있는 장소, 혹은 '칼과 주먹을 휘두르면서도 어떻게 여성적일 수 있는가'라는 흥미로운 주제가 탐구될 수 있는 장소이다. 

 

대단히 개인적인 요구 사항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 흥미롭지 않은가? 여러 가지로 더 위에 있는 남자 주인공에게 결국은 '저를 원하는 건가요, 보검을 원하는 건가요'라는 식의 말을 하게 되더라도(<와호장룡>) 여성이 주먹과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읽는 것 자체가 (남성인) 내게는 굉장한 쾌락이다. 단, 그 쾌락이 무슨 신선한 눈요기의 쾌락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탐구적인' 캐릭터 구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한국에서의) 여성 무협 작가의 등장과 성취는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이 여섯 가지는 내게는 바로 무협의 쾌락을 정의해주는 것들이다. 그 요소들이 골고루잘 형상화되어 있을 수록 내게는 훌륭한 무협이 된다. 

 

 

2) 무로 무엇인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무로 무엇인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협입니다. 무 다음에 협이 붙는 것은 그 무엇인가가 협이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이구요. 여러분이 무인이라면 무로 무엇을 성취하고 싶겠어요? '어, 저는 무로 명리와 권세와 미녀를 얻고 싶어요. 그게 다지 더 이상은 없어요'라고 말하시겠어요? 통상적인 욕구를 재확인시켜 주는 수단으로라면 문학이란 별 쓸모가 없어요. 문학은 관념론적(즉 이상주의적) 실천의 수단입니다. 무를 제재로 하는 소설이 무'협'소설이 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그리고 이 전제를 명심한다면 협의 상대주의같은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협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것은, 어떤 행위를 협으로 만드는 것이 아주 세심한 판단 (윤리학에서는 덕의 발휘라고 얘기하지요)과 그 행위의 맥락과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요구하기 때문이지 저마다의 협이 다 나름대로 정당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협의 상대주의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영원히 폭력과 갈등의 관점에서 본다는 얘기밖에는 안되요. 합의될 수 있는 것으로서의 협을 지향하고, 마침내 그 협이 세상을 장악해 더 이상 그 지향의 '최후의' 수단으로서의 폭력(무)가 사라진 세상 - 이를테면 모든 무인들이 동시에 강호를 떠날 수 있는 세상 - 을 꿈꾸는 것, 이것이 바로 무협소설의 본령입니다. 

 


3) 무림, 협의 그리고..  

 

강호의 매력이란 그곳이, 개인보다는 집단, 어떤 집단보다는 다른 집단, 발견되는 덕보다는 이미 규범화되어 있는 덕이 우선시되는 신분제 (반)봉건 사회 속의 근대적 섬같은 곳이라는데 있습니다. 무인들은 마치 사유나 실천의 최종적 근거를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근대적 개인처럼 살아갑니다. 물론 그들도 문파나 비전되는 무예로 대표되는공동체와 전통의 유대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은 분명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평균적 인간들보다 훨씬 더 개인적이고 주체적인 존재, 이를테면 '무법자'입니다.무협에서 이 사실은 보통 관은 왠만한 일로는 강호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며 무림인사들이나 문파들의 경제적 기반이 괄호처져 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협이 무엇인지 알기 힘들다는 것과 진실하게 추구하는 것은 다 협이다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진정한 무인은 협이 무엇인지 알기 힘들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칼을 휘두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인간세상에는 아주 단순한 권선징악의 윤리가 적용되어야 할 정도로 뻔한 모습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쉽게 칼을 빼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무림 혹은 강호란 실제 세상의 일부 - 그것도 어느 정도는 가상적인 면이 있는 - 에 불과하다는 것, 즉 그곳에서 성취될 수 있는 협이란 뒷골목의 정의나 평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금은 겸손한 동시에 침울할 것입니다. 

 

강호의 진정한 무인은 강호 혹은 무림의 매력이 동시에 그것의 한계와 일치한다는 것을 압니다. 관은 강호에 간섭하지 않으나 간섭할 능력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간섭할 필요가 없어서 입니다. 대부분의 무인들은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 자신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무의 권위와 협의 추구에 만족합니다. 그들은 전란이나 민란이 일어나아야만 더 넓은 세계와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때는 이미 그들은 더이상 무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군대를 지휘해야 하고 군대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군인의 무는 더이상 무림고수의 무는 아닌 것입니다. 물론 그들가운데 일부는 영웅이 되어 장군이 되거나 심지어는 군주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르나 그 경우도 그들은 이미 강호를 떠난 것입니다. 


협은 합의될 수 있으나 그 합의가 오래 가지는 못할것 입니다. 무엇보다도 애초의 합의 자체가 관계당사자들 모두의 충심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일부의 무력 위협에도 기인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얘기는 협의 개념 자체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무협에서 협은 아무리 알기 힘든 것으로 되어 있어도 결국은 알려질 수 있는 것이 되고 맙니다. 흔히 정당한 관심들이 충돌하고 어느 한쪽이 패배할 때의 상황을 비극적이라고 하는데, 무협에서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각 입장의 주인공들 자신은 자신이 협의 편에 있다고 믿지만 작가는, 그리고 작가의 권위에 힘입어 독자는 어느 한쪽에 더 호의를 보이게 됩니다. 대국적인 견지의 협이 아니라 복수나 의리 등 아주 개인적인 견지의 협이라도 독자들은 언제나 조금이라도 더 주인공의 편에 서게 됩니다. 즉 무협은 '대중' 문학입니다. 

 

무와 협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단순히 신체의 건강을 위해 무를 닦는 개인들도 있을 수 있으나 그런 이들을 무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아니, 나는 무를 단순히 신체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지 않아. 무는 일종의 도, 즉 무도이기도 해'라고 얘기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도란 사람들 사이에 나야할 바른 길입니다. 뛰어난 무를 성취하기 위해서 나는 마음의 평정, 끈기, 탁월한 지성 등등 많은 인간적 장점들을 키워야하고 경쟁자나 스승과의 인간적 관계에도 남다른 면이 있어야 하나 그 장점이나 남다름은 여전히 도라고 하기에는 좁습니다. 막말로 해서 최고의 악인도 절정고수가 될 수있습니다. 그러므로 무 '자체'에는 아무 도도 없습니다. 무 자체는 그저 '기'일 뿐입니다.  

 

무에서 자연스럽게 협이 나오는 것은 무가 폭력의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고 일정한 사회적 및 경제적 조건에서 폭력으로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 하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에서 '어떤' 무는 나쁜 폭력에 대한 대항세력으로서 협이 되는데, 나쁜 폭력을 근절한다 함은 결국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바로 잡는다는 것이니 그것이야 말로 도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나쁜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무를 사용한다고 해도 그 사용에는 여러 가지 덕의 발휘가 요구될 터이니 협에도 등급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단, 무림을 둘러싼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더 넓은 세계 자체에 협이 확립되어있지 않은 한, 무림 역시 평화로운 날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제가 모든 무인이 꿈꾸는 것은 동시에 강호에서 은퇴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의도했던 것은 일종의 유토피아주의입니다. 협이 필요없는, 그래서 무가 단순히 기에만 머물러 있어도 얼마든지 좋은 그런 상황에 대한 꿈 말입니다. 이 꿈이 이루어지기 위한 첫번째 조건은 강호와 더 넓은 세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인데, 그것은 동시에 무협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간접적으로 무협은 무협의 종말을 꿈꾼다고 말한 셈입니다. 확실히 적어도 저로서는 마지막 권에서 주인공이 여전히 무림에 남아 영웅이 된 후의 뒷맛을 즐기기보다는 세상 속으로 은거해 '들어가'는 식으로 끝나는 것이 보기 좋았습니다. 




2. 허구의 개연성


2007-06-15 00:24:58    

허구의 개연성이란 그 허구가 속한 장르의 기본 컨벤션이 개연성 있느냐 없느냐는 괄호에 처둔 개연성입니다. 무협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장풍이나 경공이나 이기어검이나 구대문파나 오대세가나 강시나 비급이나 영약에 대해 개연성의 기준을 들이대지는 않습니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그 기본 컨벤션을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된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기본 컨벤션의 틀 속에서 전개되는 내러티브는 그 내러티브의 무대로 설정된 사회나 시대를 반영해야 한다는 얘기도 됩니다. 이 반영의 가장 기본적단위는 적절한 표현입니다. 무림 방파들 사이의 패권 다툼을 묘사하면서 전투니 지휘관이니 전령이니 하는 표현을 쓰는 것은 무림의 성격이나 무림과 통치 권력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기본 컨벤션을 멋대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무림방파가 민란이나 반란을 주도해 새 왕조를 개창하려 하고 있고 그래서 자신을 일종의 군사 조직으로 생각하고 있는게 아니라면 그런 표현이 나와서는 안됩니다. 하물며 무림방파가 기병대, 심지어 철기를 보유하고 1만필이 넘는 말을 사육하는 말목장과 독점 수급 계약을 맺는다는 따위의 설정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정도의 무력을 갖춘 무림 방파를 허용하는 통치세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세력이 그 정도 무력을 갖추었다면 정의상 그 세력은 군대이거나 반란군입니다. 통치 권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지방 호족들이 사병을 양성할 수는 있으나, 그 경우도 결국은 통치권력 다툼이라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무림 패권의 다툼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3. 무협 소설에 나오면 안되는 것들.. 


2007-08-29 15:14:45 

무림인들끼리의 싸움을 '전쟁'이라고 표현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전함이니 포니 철기니 하는 것도 등장하지 말아야 한다. 전쟁은 군대가 하는 것이고 그런 무기들은 군대나 반란군이나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왕조교체기나 반란이나 민란을 배경으로 한 것이아니라면 제발 통치권력이 절대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의 활동능력과 무력을 무림 방파에 부여하지 마시라.  당신이 소위 '천자'라면 그런 집단 인정할 수 있겠나? 제발 공식적 무력과 협사들의 무력의 경계를 지키고 무협의 판타지가 그 경계 안쪽의 결국은 허망한, 그러나 즐길만한 판타지라는 사실을 속이지 마시라. 즐길만한 판타지를 최소한의 사실주의적 기율도 존중하지 않는 시대착오적 과장으로 뒤범벅된 사이비 판타지로 타락시키지 마시라. <대협심>에서 우리 대협이 미래의 악비를 만나는 대목에서 고전적으로 표현된, 이곳 강호와 저기 더 넓은 현실세계 사이의 구분을 배우시라. 그 구분의 틀 안에서, 기본 컨벤션 안에서 은근하게 절제되지 않은채 마구 과대설정과 시대착오가 난무하는  무협은 소설이 아니라 그저 애들용 오락거리일 뿐이다. 아울러 제발그 때는 틀림없이 쓰지 않았을 용어들도 좀 자제하시라. 어느 연재 소설에 '무공이 아니라 예술이다'라는 구절이 나오던데, 그런 구절은 우리 현대인이나 쓸 법한 것이다. '예술'은 19세기 중반 이후나 그런 구절에 등장할 만의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 미리해두는 말이지만 '낭만'이니 '자유'니 하는 낱말들도 자제하는게 좋다. 너무 민감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글쓴이의 경우는 '음식점'이니 '도시'니 하는 것에도 걸려넘어진다.    


<마야>를 읽다가 세 권째에서 내팽개치고 쓴 글, 처음 감상란에 썼던 글을 삭제당하고 약간 순화시켜 쓴 글이다. 




4. 무림은 얼마나 큰가


2007-09-05 03:35:27 

통치세력에 속하지 않는 무력집단이 대규모로 존재한 적이 있었다는 주장은 별로 도움이 안됩니다. 그 대규모 무력집단이 통치세력에 대규모로 도전한 경우 이 도전은 소규모 전투가 아니라 '전쟁'을 낳겠지요. <마야>에서처럼 장갑병과 철기를 운용하고 장강에 포를 장비한 전선을 수십척 띄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 이 전쟁을 서사한 소설이 무협소설일 수 있습니까? 저는 무협소설이 아니라 열국지거나 가상의 반란을 서사하는 대안 역사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삼국지나 수호지가 무협소설입니까? 관군이 아니고 나라 무너뜨리거나 세우는데 관심있는, 그래서 관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야 하는 대규모 무력집단도 무림 세력이라는 아이디어가 통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무림세력은, 아무리 호전적이고 강대해 보았자, 무림의 패자가 되는 것 이상을 추구해서는 안되는 세력, 관에 불만이 있다고 해보았자 탐관오리를 암살하는 수준 이상으로 관을 상대해서는 안되는 세력, 그 분파화된 성격과 '통치의 권력'이 아니라 '무의 권력'을 추구하는 성격 때문에 결코 한 나라의 공식적인 무력에 준하는 단합력과 조직력을 갖춘 것으로 묘사되어서는 안되는 세력이어야만 하지 않을까요? 어떤 무력 집단이 통치권력을 목표로 할 경우에만 말이 되는 수준의 조직과 힘을 갖추고 있다면 그 무력집단은 정의상 무림 세력이 아니어야만 하지 않을까요? 무림이 생활세계 전체와 일치한다면, 무로 추구되는 협의 장이 생활세계 전체가 된다면 왜 굳이 무림이라는 용어가따로 필요합니까? 무림은 큰 세계 속에서, 그 세계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으로 자기나름의 질서와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조그만 세계로 존재하는 것 아니던가요? 그런 독자적인 소생활세계로서의 무림이 무협이라는 장르의 가장 기본적인 컨벤션 아니던가요? 그래서 협사들은 출도를 할 수도 금분세수를 할 수도 있고 자신들의 개인적 협행 -그렇습니다. 무협은 '개인' 영웅의 이야기입니다. 개인 영웅'들'조차도 아닙니다. 아무리 조연들이 빛나도 무협의 서사는 '한 개인'에 대한 서사입니다. 반면 전쟁을 다루는 소설, 열국지같은 소설은 그럴 수가 없고 그래서도 안되지요- 으로 나라를 세우고 사회를 바꿀 수는 없다는 한계 앞에서 좌절도 할 수 있고 순수하게 - 혹은 좀 삐딱하게 - '무를 위한 무'의 미학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것 아니던가요? 무림인들의 활동무대를 생활세계 전체와 일치시키고 무림세력에 통치집단과 흡사한 무력을 부여하면 그때의 무력으로 추구될 수 있는 것은 무슨 미명으로 포장되어 있던 객관적으로 통치권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세력에 도전하는 개인 영웅(들)의 바로 그 도전의 객관적 성격도 그들 스스로는 그 도전에 어떤 명분을 부여하든 협의가 될 수 없습니다. 전쟁을 수행할 만한 무력과 싸우는 것은 그 자체로 전쟁이고 정의로운 전쟁조차 있기 힘들거늘 협의로운 전쟁은 말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무협 장르의 본령이 협의를 추구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있다면, 무림의 인플레이션은 그렇게 협의의 수행가능조건을 소멸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소멸되었는데 작가가 협의의 수행을 그려낸다면 그것은 사기입니다. 큰 책임도 없고 심지어는 무고한 이들이 수백명씩 죽어나가는 이야기에서 협의는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무림이라는 경계설정은 우리가 무협 소설을 적당히 즐기기 위해서도, 소설에서의 원망충족 경험을 '나쁘게' 현실생활에 가져오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무림이 한정되어 있으면 우리가 무협에서 느끼는 즐거움도 우리가'현실세계 전체'로부터 느끼는 욕구불만의 일부만을 해결 - 물론 가상적으로! - 해주게 됩니다. 무협소설을 즐기면서 우리는 여전히 현실에 머무를 수 있고 현실 전체를 다시 직시할 수 있을만한 정도의 '가벼운 휴식'만을 취한채 현실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한정된 세계에서 한정된 소재로 한정된 서사만을 한다는 '모든' 장르물들의 특징은, 우리가 그 장르물들에서 현실 전체에 대한 허구적 대체 이미지를 발견하고 향수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거기 그렇게 있는 것입니다. 물론 순수하게 장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순문학적인 총체적 서사를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우혁님이 그 한계를 잘 지적해주신 대중 장르 소설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제 이런 주장과 관련해 볼때, 자칭 및 타칭 '무협소설'로서의 <마야>의 서사적 부조리함 혹은 저열함은 단순히 <마야>에 등장하는 무력집단들이 안정된 중국왕조가 거느린 관군들만큼 강대하고 잘 조직되어있다는 데만, <마야>에서 무림의 영역이 무협 장르의 정체성을 와해시킬 정도로 팽창되어 있다는데만 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그 팽창된 상태를 정당화하는 아무런 배경서사가 없다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더 나아가 관부가 아예 등장을 하지 않으면서 그 무력집단들 자신이, '한 가지만 빼면' 관부처럼 행세한다는 것 또한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한 가지는 '통치권력으로서의 행세'입니다. 관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아무리 유명무실화되었다 하더라도 수백명씩 죽어나가가고 포까지 장비한 배들이 장강을 휘젓는데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관부라니 참으로 대단한 설정입니다), 그 양대 세력이 중국 천지를 양분해 집어삼킨게 분명하고, 그렇다면 서사에 열국지 필(feel)이 느껴져야 하는데, 폼이나 무드는 여전히 무협적이라는 것입니다. 추정되는 무대는 열국 무대인데 전쟁이 아니라 '규모만 큰싸움'을 하고 있으니 제 기준으로는 무협소설도 아니고 열국지도 아닌 이상한 '혼종'입니다. 감상란의 어떤 분이 지적하셨듯이 (다시 찾을 수 없는 것을 보니 삭제당한 모양입니다) 마초이면서 마초가 아닌 척하는 이들이 좋아하는 종류의 철저하게 남성중심주의적인 여성 설정과 묘사가 돋보이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