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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st the Tartar-Lovers (By Slavoj Zizek)

타타르족 찬미자들에 맞서 (슬라보예 지젝)


* 출전: Slavoj Zizek, Living in the End Times (2011, Verso), pp. 1-4.



What is ideology? In January 2010 Jean-Francois Cope, the parliamentary leader of the Union 

pour un Mouvement Populaire, the ruling French party, proposed the draft of a law which 

bans the full-body veil from French streets and all other public places. This announcement 

came after an anguished six-month debate on the burqa and its Arab equivalent, the niqab, 

which cover the woman's face, except for a small slit for the eyes. All main political parties 

expressed their rejection of the burqa: the main opposition party, the Parti Socialiste, said it is 

"totally opposed to the burqa" which amounted to a "prison for women." The disagreements

are of a purely tactical nature: although President Nicolas Sarkozy opposes an outright ban on 

the burqa as counrer-producrive, he called for a "debate on national identity" in October 2009, 

claiming that the burqa is "against French culture." The law imposes fines of up to 750 euros on

anyone appearing in public "with their face entirely masked"; exemptions permit the wearing of 

masks on "traditional, festive occasions," such as carnivals. Stiffer punishments are proposed for 

men who "force" their wives or daughters to wear full-body veils. The underlying idea is that the 

burqa or niqab are contrary to French traditions of freedom and laws on women's rights, or to 

quote Cope: "We can measure the modernity of a society by the way it treats and respects women." 

The new legislation is thus intended to protect the dignity and security of women -and what could be 

less problematic than such a struggle against an ideology (and a practice) which subjugates women to 

the most ruthless male domination?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20101월 프랑스 집권당인 대중운동연합의 총재 쟝-프랑소와 코페는 프랑스 거리와 

모든 다른 공공 공간들에서 전신 베일을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이 공표는 부르카와 그것과 동종인, 눈을 위한 

작은 틈새가 있을 뿐 여성들의 얼굴을 가리는 아랍의 니캅에 관한 6개월에 걸친 격렬한 논란을 뒤이은 것이었다

모든 주요 정당들은 명시적으로 부르카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주요 야당인 사회주의당은 여성들의 감옥

이나 다름없는 부르카에 전적으로 반대한다고 선언했다의견불일치들은 순전히 전술적인 것이었다: 비록 

대통령 니콜라스 사르코지는 부르카를 철저히 금지하는 것은 반생산적이라며 반대를 했지만, 그는 부르카가 

프랑스 문화에 반한다고 주장하면서 200910월 민족 정체성에 관한 논쟁을 초래했다. 그 법은 공공연히 

얼굴을 전부 가린복장을 한 누구에게든 최고 750 유로의 벌금을 부과한다; 예외 조항들은 카니발같은 전통적 

축제 행사들에서는 얼굴을 가리는 복장을 하는 것을 허용한다. 부인들이나 딸들에게 전신 베일을 하도록 강제하는’ 

남자들은 엄한 처벌을 받도록 되어있다. 근저에 있는 생각은 부르카나 니캅은 프랑스에서의 여성들의 권리에 관한 

법들과 자유의 전통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코페의 말을 인용하면: “우리는 한 사회가 근대화된 정도를 그것이 

여성들을 취급하고 존중하는 방식에 의해 측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새 입법은 여성들의 존엄과 안전을 보호한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 그렇다면 무엇이 더 여성들을 가차 없는 남성 지배에 복속시키는 이데올로기(와 관행)

맞서는 그러한 투쟁보다 덜 문제적일 수 있을까?


Problems, however, begin with Sarkozy's statement that veils are "not welcome" because, in a secular 

country like France, they intimidate and alienate non-Muslims... one cannot but note how the allegedly 

universalist attack on the burqa on behalf of human rights and women's dignity ends up as a defense 

of the particular French way of life. It is, however, not enough to submit this law to pragmatic criticism, 

such as the claim that, if implemented, it will only increase the oppression of Muslim women, since they 

will simply not be allowed to leave home and thus be even more cut off from society, exposed to harsh 

treatment within forced marriages, etc. (Furthermore, the fine will exacerbate the problems of poverty and 

joblessness: it will punish the very women who are least likely to have control over their own money.) The 

problem is a more fundamental one-what makes the whole debate symptomatic is, first, the marginal status 

of the problem: the whole nation talks about it, while the total number of women wearing both types of full-body 

veil in France is Mound 2,000. out of a roral French population of adult Muslim women of about 1,500,000. 

(And, incidentally, most of those women who wear full-length veils are below the age of thirty, with a substantial 

proportion of them being French women who have converted.) The next curious feature is the ambiguity of the 

critique of the burqa: it moves at two levels. First, it is presented as a defense of the djgnity and freedom of 

oppressed Muslim WOmen- it is unacceptable that, in a secular France, any woman has to live a hidden life 

secluded from public space, subordinated to brutal patriarchal authority. and so on. Secondly, however, as 

a rule the argument then shifts towards the anxieties of non-Muslim French people: faces covered by the burqa 

do not fit with the coordinates of French culture and identity, they "intimidate and alienate non-Muslims" ...

Some French women have even suggested that they perceive the wearing of a burqa as their own humiliation, 

as being brutally excluded, rejected from a social link.


그러나 베일들은 프랑스 같은 세속 나라에서는 비()무슬림들을 위협하고 소외시키기 때문에 환영받을

수 없다는 사르코지의 진술과 더불어 문제들이 시작된다. 우리는 인권과 여성들의 존엄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서 행해진 부르카에 대한 그 자칭 보편주의적 공격이 프랑스의 생활양식이라는 특수한 것에 대한

방어로 끝나는 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발효된다면, 무슬림 여성들은 아예 외출을 허용 받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사회로부터 훨씬 더 단절되고 강제된 결혼생활을 하면서 모진 취급을 당하는 등등의

사태가 벌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 법은 무슬림 여성들의 억압을 증대시킬 뿐이라는 주장 같은 실용주의적

비판에 이 법을 회부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더욱이, 벌금은 빈곤 및 실업 문제들을 악화시킬 것이다:

그것은 십중팔구 그들 자신의 돈에 대한 통제권을 별로 가지고 있지 않을 바로 그 여성들을 처벌하는 것이다.)

문제는 더 근본적이다 - 전체 논란을 징후적이 되게 하는 것은, 첫째, 문제의 주변적 지위이다: 프랑스인들

전체가 그 문제에 관해 얘기하는 반면 프랑스에서 그 양 유형들의 전신 베일 복장을 하는 여성들의 총수는

1,500,000 명인 프랑스의 총 성인 무슬림 여성들 중 2,000 명 남짓이다. (그리고, 우연치 않게도, 전신 베일

복장을 하는 여성들 대다수는 30세 이하로, 그들 중 상당수가 개종한 프랑스 여성들이다.) 호기심을 자아내는

다음 번 특징은 부르카 비판의 애매성이다: 그것은 두 수준들을 오간다. 첫째, 그것은 억압받는 무슬림 여성들의

존엄과 자유의 방어로서 제시된다 - 세속 프랑스에서는 어떤 여성이든 공적 공간으로부터 격리된 채로 잔혹한

가부장 권위에 복속된 비밀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등등. 둘째, 그렇지만, 대개 그 논변은

비무슬림 프랑스인들의 불안을 향해 방향을 바꾼다: 부르카로 가려진 얼굴들은 프랑스 문화 및 정체성의

좌표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비무슬림들을 위협하고 소외시킨다.” 일부 프랑스 여성들은 심지어는

그들이 부르카 복장을 그들 자신을 모욕하는 것으로, 하나의 사회적 연결고리로부터 잔인하게 배제당하고

거부당하는 것으로 느낀다고 주장한 바 있다.


This brings us to the true enigma here: why does the encounter with it face covered by a burqa trigger 

such anxiety? Is it that" f"ee so covered is no longer the Levinasian face: that Otherness from which the 

unconditional ethical call emanates? But what if the opposite is the case? From a Freudian perspective, 

the face is the ultimate mask that conceals the horror of the Neighbor-Thing: the face is what makes the 

Neighbor le semblable, a fellow-man with whom we can idenrify and empathize, (Not to mention the fact 

that, today, many faces are surgically modified and thus deprived of the last vestiges of natural authenticity.) 

This, then, is why the covered face causes such anxiety: because it confronts us directly with the abyss of

the Other-Thing, with the Neighbor in its uncanny dimension. The very covering-up of the face obliterates 

a protective shield, so that the Other-Thing stares at us directly (recall that the burqa has a narrow slit for 

the eyes; we don't see the eyes, but we know there is a gaze there). Alphonse Allais presented his own version 

of Salome's dance of seven veils: when Salome is completely naked, Herod shouts "Go on! On!", expecting her

to take off also the veil of her skin. We should imagine something similar with the burqa: the opposite of a 

woman removing her burqa to reveal her face. What if we go a step further and imagine a woman "taking off" 

the skin of her face itself, so that what we see beneath is precisely an anonymous dark smooth burqa-like 

surface, with a narrow slit for the gaze? "Love thy neighbor!" means, at its most radical, precisely the impossible =

real love for this de-subjectivized subject, for this monstrous dark blot cut with a slit/gaze ... This is why, in 

psychoanalytic treatment, the patient does not sit face to face with the analyst: they both stare at a third point,

since it is only this suspension of the face which opens up the space for the proper dimension of the Neighbor. 

And therein also resides the limit of the well-known critico-ideological topic of the society of total control, in which 

we are constantly tracked and recorded-what eludes the eye of the camera is not some intimate secret but the 

gaze itself, the object-gaze as the crack/stain in the Other.


이로써 우리는 여기서 진짜 수수께끼를 마주하게 된다: 부르카에 의해 가려진 얼굴과의 대면이 왜 그러한 불안을

촉발하는가? 그렇게 가려진 얼굴은 더 이상 레비나스적 얼굴 - 그로부터 무조건적 윤리적 호출이 퍼져 나오는

타자성 - 이 아닌가? 그러나 그 반대가 사실이라면? 프로이트적 시각에서 볼 때, 얼굴은 이웃이라는 것의

소름끼침을 은폐하는 궁극적 가면이다. 얼굴은 이웃을 우리가 동일시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동료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얼굴들이 외과적으로 수정되고 따라서 자연적 진정성의 마지막 흔적들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다음이 가려진 얼굴들이 그러한 불안을 야기하는 이유이다: 그것이

우리를 직접적으로 타자라는 것의 심연과, 그 불쾌한 차원 속에 있는 이웃과 대면시키기 때문. 얼굴의 바로 그

덮어 가림은 하나의 보호막을 삭제하며 따라서 타자인 것은 우리를 직접적으로 응시한다. (부르카에 눈을 위한

작은 구멍이 뚫려있다는 것을 떠올려 보라. 우리는 그 눈을 보지 못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하나의 시선이 있다는

것을 안다.) 알폰세 알라이스는 살로메의 일곱 베일들 춤에 대한 그 자신의 해석을 제시했다: 살로메가 완전히

벌거벗었을 때, 헤롯은 계속, 계속이라고 소리친다. 그녀가 피부의 베일 또한 벗기를 기대하면서. 우리는

부르카와 유사한 무엇인가를 상상해야 한다: 얼굴을 드러내기 위해 부르카를 벗는 여성의 정 반대인 것. 한 걸음

더 나가 한 여성이 그녀의 얼굴 자체의 피부를 벗는 것을 상상하면, 그래서 우리가 그 아래서 보게 되는 것이

정확히 시선을 위한 작은 틈새가 있는 하나의 익명적인 부르카같은 표면이라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 가장

급진적이게도, 정확히 불가능한 것 = 이 탈주체화된 주체에 대한, 하나의 틈새/시선을 지닌 이 괴물스러운 캄캄한

얼룩 조각에 대한 진짜 사랑을 의미한다. 이것이 정신분석학적 치료에서 환자가 분석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앉지

않는 이유이다: 그들 양자는 세 번째 지점을 응시하는데, 왜냐하면 얼굴의 이 중단만이 이웃의 고유한 차원을 위한

공간을 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 또한 우리가 항상 추적되고 기록되는 총체적 통제 사회라는 잘 알려진

비판적-이데올로기적 논제의 한계가 놓여있다 - 카메라의 눈을 피하는 것은 어떤 은밀한 비밀이 아니라 시선

그 자체, 대타자 속의 균열/얼룩으로서의 대상-시선이다.


This brings us to the proper base (almost in the military sense of the term) of ideology. When we read 

an abstract "ideological" proclamation we are well aware that "real people" do not experience it abstractly: 

in order to pass from abstract propositions to people's "real lives," it is necessary to add the unfathomable. 

density of a lifeworld context. Ideology is not constituted by abstract propositions in themselves, rather, 

ideology is itself this very texture of the lifeworld which "schematizes" the propositions, rendering them 

"livable." Take military ideology for instance: it becomes "livable" only against the background of the obscene 

unwritten rules and rituals (marching chants, fragging, sexual innuendo ... ) in which it is embedded. Which 

is why, if there is an ideological experience at its purest, at its zero-level, then it occurs the moment we adopt

an attitude of ironic distance, laughing at the follies in which we are ready to believe-it is at this moment of 

liberating laughter, when we look down on the absurdity of our faith, that we become pure subjects of ideology, 

that ideology exerts its strongest hold over us.' This is also why, if one wants to observe contemporary ideology 

at work, all one need do is watch a few of Michael Palin's travel programs on the BBC: their underlying attitude 

of adopting a benevolent ironic distance towards different customs, taking pleasure in observing local peculiarities 

while filtering out the really traumatic data, amounts to postmodern racism "tits most essential. When we arc 

shown scenes of starving children in Africa, with a call for us to do something to help them, the underlying 

ideological message is something like: "Don't think, don't politicize, forget about the true causes of their poverty, 

just act, contribute money, so that you will not have to think!" Rousseau already understood perfectly the falsity 

of multiculturalist admirers of foreign cultures when, in Emile, he warned of the "philosopher who loves Tartars 

in order to be dispensed from loving his neighbors."


이것은 우리를 이데올로기의 고유한 (거의 그 용어의 군사적 의미에서의) 기지로 데려간다. 하나의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적선언을 읽을 때 우리는 현실의 사람들은 그것을 추상적으로 경험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추상적 명제들로부터 사람들의 실제 삶들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생활세계 맥락의 측량할 수 없는 밀도를 덧붙이는 

것이 필연적이다. 이데올로기는 추상적 명제들 자체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 그 

명제들을 살 수있게 하면서 그 명제들을 도식화하는 생활세계의 바로 이 텍스쳐이다. 군사 이데올로기를 예로 

들어보자: 그것은 자신 속에 각인되어 있는 외설적인 성문화되지 않은 규칙들과 의례들 ([쌍스러운 - 역자] 행진구호들

프래깅 [병사가 살해하려는 의도로 장교를 공격하는 행위 - 역자], ()적 비꼼 등등) 을 배경으로 해서만 살 수있게 

된다. 그것이, 가장 순수한 영도 수준의 이데올로기적 경험이 있다면, 그 경험이 우리가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시사풍자극을 보고 웃으며 아이러닉한 거리의 태도를 채택하는 순간 일어나는 이유이다 - 우리가 이데올로기의 

순수주체들이 되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가장 강하게 장악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믿음의 부조리를 내려다보면서 

해방적 웃음을 터트리는 이 순간이다. 이것이 또한 동시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것을 관찰하기 원한다면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 BBC에서 방영되는 마이클 팔린의 여행 프로그램들 몇 개를 시청하는 것인 이유이다. 진짜 외상(外傷)적인 

자료를 걸러 내는 한편에서 지역적 독특성들을 관찰하는데서 쾌락을 얻으면서 다른 관습들에 대해 자애로운 아이러닉한

거리를 채택하는 그것들 근저의 태도는 포스트모던 인종주의의 진수에 상당한다.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 

장면들이, 그 아이들을 돕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라는 호출과 더불어 우리에게 보여 질 때근저의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어떤 것이다: “생각하지 마라, 정치화하지 마라, 그들의 빈곤의 진짜 원인들에 관해서는 잊어라, 그저 행동하라

돈을 기부하라, 생각하지 않아도 되도록!” 루소는 이미 <에밀>에서 외국 문화들에 대한 다문화주의적 찬탄자들의 허위성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는 그의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을 면제받기 위해 타타르족을 찬미하는 철학자들에 대해 경고했다.


So, when we talk about "objective spirit" (the substance of mores) as the complex web of unwritten rules which 

determine what we can say/see/do, we should complicate further Foucault's description of a discursive

epistme: "objective spirit" also and above all determines that which we know but about which we have to talk 

and act as if we do not know, and that which we do not know but about which we have to talk and act as if we 

do know. It determines, in short, what we have to know but have to pretend we do not know. The rise of 

so-called ethnic and religious fundamentalism is a rebellion against this thick network of mores which anchors 

our freedoms in a liberal society. What is feared is not the uncertainties of freedom and permissiveness, but, 

on the contrary, the oppressive web of new regulations.


따라서, 우리가 보고 말하고 행할 수 있는 것을 규정하는 성문화되지 않은 규칙들의 복잡한 거미줄로서의

객관적 정신” (습속의 실체)에 관해 얘기할 때, 우리는 담론적 에피스테메에 대한 푸코의 기술을 더욱

복잡하게 해야 한다: “객관적 정신은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알지만 마치 알지 못하는 양 얘기하고

행위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아는 양 얘기하고 행위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한다. 그것은, 줄여 말해, 우리가 알아야만 하지만 알지 못하는 채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한다. 소위

인종적 및 종교적 근본주의의 발흥은 우리의 자유를 리버럴한 사회에 고정시키는 두터운 이 습속 네트워크에 대한

반란이다. 두려움의 대상은 자유와 방임이라는 것이 본래 갖는 불확실성이 아니라 반대로 새로운 규제들의 억압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