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디씨인사이드에 올렸던 글 그냥 고쳐서 올려 봅니다.



제목 거창하게 붙여 놨지만, 그냥 잠깐 애드립으로 막 쓰는 글입니다.

하루키가 문학을 시작한 모티브는 뭘까요?
난 그게 그냥 개인적인 절망감이라고 봅니다.
이 친구는 젊은 시절 자기가 감당하기에는 큰 상처를 입습니다.
애인, 혹은 여친의 자살과 전공투의 패배, 물론  하루키는 전공투에서도 개인적 이질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이질감을 당시 일본 사회에 느꼈죠. 그래서 내심 전공투의 이념에 동조했는데, 그들 역시 전체주의적 망령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군상이라는 생각에 이질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디킨스가 프랑스구체제의 부패에 질겁하면서도 혁명의 광기와 집단주의에 경기한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이 두 상처가 하루키 허무주의와 문학의 본질같습니다. 그리고 이 본질적인 규정이 그의 문학의 한계를 만드는 것 같아요.

하루키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두명이 피츠제랄드와 레이몬드 카버죠.
피츠제랄드가 1인칭 시점을 어떻게 활용하죠? 내면의 독백을 이어가면서도 타인의 상황묘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객관적이잖아요. 이 사실주의적묘사가 미국사실주의의 전통이기도 하고요.
레이몬드 커버는 어떤가요?? 1인칭을 사용하건 않건 쇼윙을 철저하게 활용하고 모든 상징은 묘사로만 처리할 뿐이잖아요?
그런데 하루키는 왜 이 두명의 문체처럼 사실적이고 드라이한 문체를 사용하지 않을까요?
문학의 모티브 자체가 이들과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의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내적인 고백이고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그 몸부림이 가장 강하게 나온 작품이 <1973년의 핀볼>이죠.
그런데 이 작품을 잘 보세요. 고독과 사회부적응에 대해 주절주절 하면서도 끝내 자신이 가진 상처의 정체를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않죠. 그 모든 상처는 핀볼게임이라는 메타포로 나타납니다. 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성취같아요.그리고 배전반, 쥐, 쌍둥이 여자,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의 성격, 소통에 대한 욕구로서 귀 페티시즘의 메타포 등등도 나쁘지는 않잖아요?

말하자면 하루키의 문체는 개인적 상처와 개인주의적 감상적인 색채를 강하게 띄게 되는데 그 반면에 사용되는 메타포, 소설적 장치는 상당히 상징적이고 이어지는 일본사회, 특히 고도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 등등은 그의 감상적 문체와 상반되게 서술되면서 소설적 긴장감을 주고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독자들, 특히 386의 독자들은 하루키의 허무주의-특히 후일담적인 허무주의에 끌리는 거겠죠. 젊은 독자들은 주로 애잔한 문체와 까끌까끌한 허무의 질감에 매료되는 것일테고요. 이들은 하루키의 문학적 장치나 상징에 대해서는 다소 무관심할 거 같아요. 하지만 하루키작품이 결코 감상적인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죠.

<댄스, 댄스, 댄스>를 예를 들어 보자구요. '나'는 자신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를 죽인 사실을 상당히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그 친구는 하루키가 한눈을 판 사이에 뛰어나가 다시 자살을 하죠. 그러나 그 사실 역시 '나'는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물론 충격을 받긴 하지만 다소 거리를 두고 자신의 내적인 독백을 이어갑니다. 마치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는 듯이. 이런 부분은 감상적인 부분은 아니죠. 

<댄스, 댄스, 댄스>나 태엽감는 새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모두 '나'가 다른 대상과 동일시 하는 여자들입니다. 이들은 '나'의 상처를 치유해주거나 혹은 후펴파는데 사실은 모두 '나오코'의 다른 인격체들 같은 존재죠. 곳곳에서 나오코가 감지되고 실제로 '나'는 이들을 거의 같은 존재로 받아들입니다. 각기 다른 시간대의 나오코가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은 현상. 현대 소설기법으로서 잘못된 동일시(false identification)을 상당히 잘 활용하고 있지 않나요? 토니 모리슨처럼 세련되게, 혹은 미국 사실주의 기법처럼 활용하지는 못하지만. 하루키는 어디까지나 사실주의적 판타지로서 이를 활용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나빠 보이지는 않아요. 세간에서 말하듯이 단순한 대중주의작가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는 나름 자신만의 독특한 상상력을 펼치고 있어요. 이 세계와 이어진 또 다른 세계. 이 또다른 세계는 이미지의 세계지만 현실세계와 이어져 있죠. 물론 이 판타지는 현실의 삭막함을 받아들일 수 없는 하루키만의 도피처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하루키는 이 판타지에서 자신의 허무함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 노력이 언제나 허무주의를 극복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나름 그만의 세계에서 일정한 성취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루키가 최고의 대가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요. 하지만 적어도 대가중 일원이라고는 인정해 주어야 할 것 같아요.
그와 함께 그의 한계-지나친 감상과 허무주의, 사회와의 흐릿한 접점 같은 것-역시 지적되어 하겠지만.


P.S. 질문과 대답 -하루키가 사용한 소재들은 적절한 메타포를 가지고 있나? 배전반 같은 것들은 뭘 상징하는 건가?

하루키 작품의 뒤쪽 해설은 솔직히 안 읽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특히 문학과 사상의 자체 해설은 좀 황당한 것이 많죠. 그러나 그 각각의 부분들은 하루키가 의도한 부분입니다. 하루키가 3류 수필가가 아닌 다음에야 자신이 택한 소재는 모두 존재의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그 소재의 메타포가 성공적이냐, 아니냐의 판단은 독자와 비평가의 몫이고 각자의 취향의 몫입니다. 우선 배전반을 이야기할께요. 님은 하루키소설의 한계가 사회와의 접점을 잃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루키의 주인공은 스스로 그 접점을 포기합니다. 물론 그 포기의 원인은 개인적인 상처입니다.. 배전반이 뭐죠? 사회와 고립된 집을 이어주는 소통의 센터입니다. 그런데 그 배전반이 뜯어진 집에서 '나'는 살고 있어요.

그리고 그 쌍둥이들은 배전반의 '죽음'을 슬퍼하고 물에 수장시키자고 제안 합니다. 그 쌍둥이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존재라기 보다는 하루키의 외로움이 창조해낸 환상적인 존재라고 보아야 할 겁니다. 물론 그 판단은 독자의 몫입니다. 아무튼, 그 쌍둥이가 하나의 도피처로서의 환상이라면 그 환상은 마침내 자신이 잃어버린 사회와의 접점인 배전반을 수장하며 애도합니다. 그리고 '나'는 칸트의 철학의 의무를 외우며 그 배전반을 보냅니다. "철학의 의무는 오해로부터 생긴 환상을 제거 하는 것에 있다" 즉,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이 일종의 환상이며 그 환상에 안녕을 고하는 것이 인간 사고의 의무라고 보는 거죠. 그리고 정말로 쌍둥이는 떠나 갑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사회로부터의 접점을 회복하지 못합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고립을 선택한 인간입니다. 그 선택의 이유는 사회 자체가 자신이 접점을 가질 만큼 건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를 아는 여자들도 그를 떠나갑니다. 그는 따뜻하고 지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세상에 무관심한 사람이며, "여자"들은 이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이죠. 이 괴리감이 그의 여자들이 그를 버리는 이유가 됩니다. 마지막에 그가 다시 사랑을 회복하려고 하지만 그 회복이 결코 영원할 거 같지 않은 것은 '내'가 언제나 과거에 묶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새로운 소설을 쓸 때마다 그는 혼자가 되고 버림받죠. 아무튼... 그의 소설이 결코 그렇게 떨어지는 것들은 아닙니다. 다만... 한계가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