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 시뮬라크르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프롤로그 -
그대들, 시뮬라크르가 보이지 않는가?


이러한 복잡성이 그들 작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훌륭하게 맺어질 때
, 이 모든 것의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 쟝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아바타를 보면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누구도
-내가 아는 한-이 영화의 신기한 스토리구조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거다. 이 영화는 영화외적으로, 그리고 영화 내적으로 모두 가짜가 진짜를 대체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아바타는 촬영된 영화가 아니다. 실사 영화는 소수이고 영화의 주된 스토리는 모두 컴퓨터가 그려낸 것들이다. 배우들은 컴퓨터에 캡처 당하고 그 캡처당한 실물들은 컴퓨터에서 가상의 생물로 재구성되어 우리에게 투영된다.



<루돌프 아른하임>


루돌프 아른하임이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한 내용을 생각하면 이건 진짜 재미있다
. 루돌프 아른하임은 영화는 현실을 기계적으로 재생할 뿐이기 때문에 예술이 될 수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엄숙한 얼굴로 깊이의 감소와 평면 위에 입체 투영 등등을 예로 들면서 영화가 현실을 기계적으로 재상한 것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루돌프 아른하임, 영화와 현실, 1932). 그런데 아바타는 아예 컴퓨터로 그려진 작품이다. 현실과 다른 정도가 아니라 만들어진 현실인 동시에 제기한 입체감의 부족을 3D 필터로 메꾼 영화다. 루돌프 아른하임은 이 작품에 대해서 뭐라고 할까? 이것이야 말로 예술이다?

영화 내부로 들어가 보자. 제이크 설리는 현실에서 하반신을 쓸 수 없다. 그러나 아바타가 되면 나비족의 전사가 되어 육신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그 나비족의 육신은 연구실에서 만들어진 인공생명체다. 제이크는 공각기동대처럼, 혹은 매트릭스처럼 자신의 의식을 전송해서 그 나비족의 전사가 된다. 그 뿐인가? 그는 제이크는 자신의 진짜몸을 버리고 아바타로서 자신의 몸을 받아들인다. 이 영화의 가장 특이점은 이 부분이다. 이 영화는 가짜가 진짜가 되는 이야기이며,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 임을 주장하는 특이한 영화다.


1. 파란 알약을 택하는 네오
?


만약 그렇다고 대답했다면(기계속에서 만들어진 행복을 평생 즐기기로 선택했다면, 즉 파란 알약을 선택했다면) 당신은 소수에 속하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선택문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런 생각 자체에 몸서리를 친다. 사람들에게 문제되는 것은 그 기계 안에서 '진짜'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 줄리언 바지니, 빅 퀘스천



모피스어가 내미는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
, 우리는 어떤 알약을 선택할까?

줄리언 바지니(Jullian Bggini)는 대부분의 우리는 빨간 알약을 선택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로버트 노직이 제안한 경험기계를 상상해보자. 우리는 이 기계 안에 들어가서 매트릭스와 같이 우리가 선택하는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혹은 <멋진 신세계>에서와 같이 소마를 먹으면 모든 불행을 잊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때 우리는 현재의 우리 삶을 버리고 그런 삶을 택할 것인가? 이 역시 노라고 답할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이 바지니의 예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복이라는 가치보다는 진실성 authenticity”에 가중치를 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우리 각자의 삶에서 주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만이 진짜이고 인위적인 각본에 의해 짜여진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나 말미에서 바지니는 약간 불안해 한다. 자신이 실제 만난 누군가는 <멋진 신세계>의 소마를 보고 황홀해 하더라는 것이다. 그 책이 쓰여 질 당시에는 자명했던 진실, 소마를 먹고 인위적인 행복을 느끼는 것이 디스토피아를 묘사하기 위한 풍자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100년 후의 세계에서는 그리 드물지 않다라는 것. 그래, 지금은 시뮤라크르의 시대가 된 것이다.

불과 13년전에 만들어진 영화 <매트릭스>에서 우리는 우리 중 그 누구도 사이퍼가 되길 원하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시뮬라크르의 시대가 도래했다
. 파란 알약을 선택하는 것이 더 진짜가 되는 시대. 그대는 아바타가 되어야 한
.


2.
두 번의 비틀림, 가상에의 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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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실재에 대한 열망의 문제점은 그것이 실재에 대한 열망이라는 점이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 거짓 열정이었다는 점, 이 거짓 열정은 가상 뒤에서 실재를 찾으려고 무자비하게 추구했지만 이는 실재와의 대면을 피하려는 궁극적 전략이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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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바타는 만들어진 영화다. 현실의 기계적 재생이 아니라 현실의 기계적 창조로 만들어진 영화. 기계복제의 시대의 예술품인 사진, 영화가 이제는 기계 창조의 시대로 진입했다는 것을 전 지구적 이벤트로 알린 영하가 바로 아바타다. 이전에 제작된 몇 번의 조악한 시도를 기반으로 하여 아바타는 캡처링된 가상의 배우를 만들어 가상의 무대에서 가상의 액션을 펼치게 된다. 그 배우-나비족 전사-는 배우를 닮았지만 배우, 샘 워싱턴을 기반으로 창조된 배우다. 그런데 아바타는 여기서 한번 더 이야기를 비튼다. 그 나비족 전사는 그 허구의 세계에서도 생체공학적으로 만들어진 창조물이다. 기계의 창조물 속에서 만들어진 기계의 창조물. 아바타는 이렇게 두 번 비틀어진 허구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 영화는 그전에 우리에게 제시된 그 어떤 영화와도 다르다
. <공각기동대>의 인형사/쿠사나기는 고스트가 되어 다른 육체로 전이된다. 그러나 그들은 미래의 디스토피아가 만들어낸 우울한 생명체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진짜가 되고 싶어 하는 가짜임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우울함은 은막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존재론적 물음을 던지는 고스트. 그들의 세계는 비가 내리고 그 철학적 울림은 우리를 짓누른다.


아바타는 철학적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 캐릭터들은 갈등과 고민을 하지 않는다. 혹은 그런 모습을 진지하게 전달하지 않는다. 기꺼이 그들은 진짜를 버리고 가짜를 향한다. 그에게는 가짜가 더 진짜이기 때문이다. 진짜 세계의 네트워크는 가짜가 되기 위한 통로일 뿐이다. 그러나 판도라의 모든 진짜 동식물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그는 그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가짜가 됨으로써 진짜로 변신한다.


스토리라인은 통속적이다
. 몇 번 나온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재탕할 뿐이다. 그러나 결론은 지금까지의 내터티브와는 완전히 다르다. 철학적 물음 없이, 실재에 대한 열망도 없이 이 영화는 속삭인다. 가짜가 더 진짜야! 진짜는 죽어야 해! 너는 가짜가 됨으로써 행복할 수 있어! 진짜를 버리는 순간 판도라 네트워크의 일원이 되는 거야!


제이크는 죽고 토루크 막토가 눈을 뜬다
.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쿠사나기의 마지막 대사는 네토와 고다이(네트워크는 광대하다) 였다. 제이크의 마지막 대사는 다음과 같다.


제이크 설리
, 기록 종료. This is Jake Sully signing off.


3.
시뮬라크르의 사막으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시뮬라시옹의 지옥
, 이건 더 이상 고문의 지옥이 아니고 의미의 교묘하고 저주스러우며 포착할 수 없는 뒤틀림이다.

-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다시 줄리언 바지니로 돌아가 보자
. 줄리언 바지니는 안톤 체홉의 희곡 <갈매기>의 등장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행복과 성공에 대해 묻는다. 국무위원인 표트르는 성공한 인물이지만 자신의 성공에 대하여 시니컬하다. “그 자리를 얻기 위해 내가 애쓴 건 없소. 저절로 그리 된 거지.” 자신의 성공을 지적하며 위로하는 사람에게 그가 하는 말이다.

반면에 성공하지 못한 배우 니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는 알아요. 마침내 이해하게 되었어요, 콘스탄틴. 우리에게는 말이에요. 글을 쓰든, 연기를 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내가 꿈꾸었던 명예와 영광이 아니에요. 중요한 건 견뎌내는 힘이에요.”


니나는 성공하지 못한 배우다
. 하지만 자신이 자신이 되고자하는 것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노력하는 배우가 되는 것에 성공했다. 만일 그 과정에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그녀가 성공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한 순간의 시간만이 의미 있다면 그녀의 나머지 인생은 무엇이 되는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 체호프와 바지니는 모두 빅터 프랭클의 주장을 다른 각도에서 주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능력을 잃어버린다면, 우리 자신의 삶은 다 무엇이고, 우리의 성공이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외부의 박수와 갈채, 외적인 성공만을 위하는 인생이라면 그 인생의 의미는 얼마나 싸구려에 불과한가?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그래서 우리 대부분은 빨간약을 택한다. 진실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바타는 다르게 말한다
. 니가 받은 육체, 니가 가진 지구에서의 정체성, 그건 의미가 없는 것. 여기 판도라에서 만들어진 육체, 새로 받은 육신으로 돌아가자. 그럼 넌 진정한 니가 될 수 있다. 진정한 너, 넌 제이크 설리가 아니라 토루크 막토다. 토루크 막토야 말로 진정한 제이크다.


그리고
21세기의 우리는 별다른 저항감 없이 아바타의 스토리를 받아들인다. 우리가 우리의 조상, 혹은 우리의 고향에서 받은 육체는 불편하고 그 보다 빠르고 그 보다 강한, 만들어진 육체를 받아서 새로운 네트워크의 일원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다.

그래, 어찌보면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시대,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인식일지도 모른다. 어떤 과정,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부를 축적하게 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충분한 부가 있느냐 혹은 그렇지 못하냐 하는 것이다. 대타자가 우리에게 부여한 의미가 중요하지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의미가 뭐가 중요할까?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가지고
, 더 편하게 살지만 더 불행하다. 그리고 더 불행할수록 더 많은 것을 갈망한다. 그리고 다시 그 더많은 갈망은 더 많은 불행감을 우리에게 안긴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뮬라크르의 시대다.


그래
, 어쩌면 판도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고루한 실체를 버린다면, 자신의 삶의 진정성을 찾고, “자신의 성취가 자신의 진정한 노력과 능력의 결과임을 바라는 일따위가 우리의 본성임를 잊어버린다면, 어쩌면 우리는 판도라로 날아가 새로운 네트워크의 일원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토루크 막토가 되어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자유는 시뮬라크르의 자유일 것이다. 아무런들 어떨까. 더 이상 진짜와 시뮬라크르의 차이가 없는데. 그 누구도 그 차이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데.


영화
<아바타>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더 이상 실재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뮬라크르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