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을 맞아 지난 2016년에 썼던 글을 다시 올립니다.

윤석열이 5.18 기념식에서 임의 행진곡을 제창하게 한 것, 자신 임의대로 5.18에 대한 역사적 규정을 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강요하다시피 한 것, 5.18 정신을 헌법에 넣겠다고 한 것, 그리고 권성동이 국힘당 의원들을 반강제하다시피 동원했던 일 등 5.18 관련 윤석열과 국힘당이 한 일들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별도로 쓰려다 6년 전에 썼던 아래의 글로 대신하려 합니다.

 

* 국힘당에서 민주당 박지현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때 A4 용지에 쓰인 걸 보고 따라 부르는 것을 비판하더군요. 참 어이가 없습니다. 박지현은 1996년생, 27세로 5.18이 일어났던 1980년보다 16년 뒤에 태어났습니다. 박지현이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를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가사를 모두 외워 불러야 할 이유도 없구요. 5.18은 이제 박지현과 같은 MZ세대에게는 5.18은 전세대에 일어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일 뿐입니다. 우리 세대가 독립군의 군가를 모르듯이 MZ세대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모르는 건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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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곡 - 증오와 분노에서 용서와 화해로

 

2016.06.08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위의 임을 위한 행진곡80년대 대학시절 시위 현장에서, 뒷동네 막걸리 집에서, 기념 행사장에서 수 천 번을 불렀던 노래였다. 내 젊은 시절의 추억을,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내 청춘이 다 녹아 있는 노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 이 노래를 더 이상 부르지 않으며, 주변에서 불러도 따라 부르지 않는다. 이젠 내 청춘을 불러내는 감흥을 이 노래는 내게 더 이상 주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나는 알지만, 그것을 남에게 설명하기는 무척 힘들다. 미묘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하고.... 특히 오해를 할까봐 설명하기가 저어된다.

 

1. 제창이냐 합창이냐

36주년 5.18을 맞아 거대 야당이 된 더민주당과 국민의 당, 그리고 진보진영측은 이 노래를 기념곡으로 지정해서 齊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부(보훈처)는 기념곡으로 지정할 수 없으며 현행대로 合唱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보여 사회적 갈등을 보였었다.

나는 어느 한 쪽 입장을 정한 바는 없지만, 굳이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아직은 합창을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혹자들은 5.18 유족이나 야당이 요구하니 그냥 들어주면 될 일을 왜 정부가 그걸 수용 못하느냐고 말하지만 이 문제는 단순하게 보아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보다 이성적으로 심사숙고해서 판단해야 한다고 본다.

보수진영에서는 이 노래가 북한이 만든 님을 위한 교향시의 주제곡이고, 여기에서 은 김일성을 말하는 것이며, 이석기의 경기동부연합은 이 노래를 애국가 대신 부른 것이라 기념곡으로 지정하고 제창하게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반발한다. 나는 이런 보수진영의 표면적 이유도 일리가 없다고 보지 않지만, 보다 심층적인 이유에서 제창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2. 획일적 해석의 강제는 범죄다

국민의 당의 박지원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기념곡 지정과 제창을 법제화하고, 5.18 민주화운동을 비방, 왜곡, 날조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을 발의했고, 이에 38명의 국민의 당 의원이 공동 발의자로 참여했으며, 조선대, 전남대 교수들도 동조하고 나섰다.

<박지원의 5.19 민주화운동 특별법 개정안>

. 정부는 매년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행사(5·18기념식)5·18민주유공자와 그 가족 및 유족 등과 협의하여 개최하도록 함(안 제5조 제2).

. 정부는 임을 위한 행진곡5·18민주화운동 기념곡으로 지정하고 5·18기념식에서 제창하도록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사항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함(안 제5조 제3).

. 신문, 방송이나 각종 출판물 또는 정보통신망을 이용하여 5·18민주화운동을 비방·왜곡하거나 사실을 날조하는 행위를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함(안 제8).

나는 이런 법안 발의와 동조 움직임은 비민주적 전체주의적 발상이며,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고, 다면적 역사 해석을 봉쇄하고 획일적 규정을 강제하는 것이라고 보아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나는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보지만, 그렇다고 이런 나의 해석을 절대화하거나 남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5.18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많고, 심지어 폭동으로 보는 견해마저 있다.

5.18과 관련한 사실이 국민들에게 잘못 알려진 것도 많아, 한 일방의 일방적인 규정이 법적으로 강제되는 것은 자칫 사실관계가 왜곡되고 과장된 상태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굳어질 우려도 있어 국민들이 5.18을 제대로 평가하는 데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본다. 5.18의 실체적 사실 규명이나 재해석의 연구마저 원천 봉쇄할 수 있는 이런 법은 반민주적이며 양심과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5.18을 성역화, 절대화하거나 다른 시각의 해석을 원천 봉쇄하려는 법제화 움직임 자체가 5.18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박지원이나 5.18을 절대화 하려는 세력들은 모르는 것 같다.

5.18에 대한 국민들의 컨센선스(consensus)나 대한민국 국가 차원에서의 평가와 규정은 사실관계가 정확하게 알려지고, 이해당사자들이 돌아가신 후에 객관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졌으면 한다. 그 전에 섣부르게 한 일방의 평가와 규정을 절대화할 수 있는 법제화는 반대하며, 또한 임을 위한 행진곡이 기념곡으로 지정되고 제창되는 것도 시기상조라고 본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기념곡으로 지정되고 제창이 법제화되면 초중고 음악시간에 이 노래를 배우야 하고 학생들은 5.18 기념식에서 모두 불러야 한다. 과연 위의 가사들을 어린 학생들이 굳이 배워 부르는 것이 교육적일까? 어린 학생들이 이 노래를 배우고 부르면 이들이 갖게 되는 5.18의 평가는 한 일방의 것으로 주입될 것인데 이게 바람직할까?

 

3. 진보진영이나 야당의 제창에 대한 이중성

진보진영은 공식행사에서 애국가를 제창하기는커녕 합창도 하지 않으며,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대신하는 경우도 많다. 애국가 제창이 국가주의를 주입시킨다는 이유를 대며 제창을 거부하는 야당 의원도 있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의 가치관과 철학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가치관과 철학으로서는 존중한다. 그러나 이런 가치관이나 철학을 일관되게 적용하지 않을 때는 그 사람들의 철학과 가치관을 존중해 줄 수 없다.

애국가에 대해서는 이런 태도를 보였던 사람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5.18 기념곡 지정과 합창 아닌 제창을 강제하겠다고 나선다는 것이 우습지 않은가? 합창이 좋은지, 제창이 옳은지를 떠나 이런 비일관적 태도가 여러분들은 용납이 되는가?

 

4. 이번 논쟁의 배경에는 역사관의 차이가 있다

혹자들은 제창이나 기념곡 지정을 요구하면 그냥 들어주면 될 것 아니냐고 말하면서 이 문제를 놓고 쌍방이 치열하게 공방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제창과 기념곡 지정을 주장하는 측은 야당이나 자칭 진보진영이고, 이들은 대체적으로 역사를, 특히 우리 근현대사를 운동사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한다. ‘식민지 봉건론’, ‘내재적 발전론’, ‘자본주의 맹아론’, ‘민족적 저항주의들이 저항 운동사 관점 선상에 있는 것으로 이들은 일제시대의 독립운동(특히 무장 독립운동), 해방 후의 민주화 운동을 높이 평가하지만 다른 사건들이나 외부의 영향에 의한 발전에 대해서는 인색하거나 대부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동학농민운동-의병-3.1운동-항일무장투쟁-6.25 사변(이들은 내전으로 본다)-4.19의거(혁명)-5.18민주화운동-6.10항쟁으로 이어지는 운동사적 관점에서 이해하며, 민중들의 저항이 사회변화를 추동하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우리 근현대사를 백년 전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운동사적 관점은 일면 역사 이해의 한 방편으로 도움을 주기도 하고, 또 틀렸다고 말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저항 운동사적 관점에서만 이해하고 서술하여서는 세계 역사상 최단기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낸 현재의 대한민국을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우리의 근현대사를 적합하게 해석한 것은 안병직이나 이영훈이 주장하는 캐치 업(catch up)이론이라고 본다. 일제 시대의 근대화,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도입, 박정희의 수출 주도 경제와 산업화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선진국의 앞선 기술을 따라 잡으려 노력한 결과이고, 이것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저항적 민족주의적 운동사로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설명하기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운동사적 관점으로는 우리 근현대사를 설명하기 부족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오늘의 북한이다. 사실 저항적 민족주의 운동사로 가장 잘 설명이 잘 되는 나라가 북한이고, 북한과는 180도 다른 나라가 남한이라는 것은 운동사적 관점으로는 우리 근현대사를 설명할 수 없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내가 왜 뜬금없이 진보/보수 진영의 우리 근현대사 역사관을 들먹였는지 의아할 것이다. 내가 역사관의 차이를 설명한 이유는 5.18임을 위한 행진곡문제에 있어 진보진영이 왜 저렇게 무리하게 자신들의 역사 해석을 획일화하여 단정하고, 심지어 법제화하려고 하는 배경을 설명하고자 함이다. 진보진영의 역사관, 그들이 보는 우리 근현대사의 백년은 저항적 운동사이기 때문에 저렇게 5.18이나 임을 위한 행진곡에 집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고를 이들이 4.16이라고 명명하며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도 이런 저항 운동사적 역사인식이 기저에 깔려 있다.

 

5. 객관적 사실대로 인식해야

나는 언제가 이 노래가 제창되어도 좋을 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전제가 있다. 5.18이 객관적 사실 그대로 국민들에게 알려지고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진 뒤여야 한다.

나는 과거에 알고 있던 5.18 내용과 수사기록이나 유네스코에 등재된 기록물을 통해 본 5.18의 실체와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고 그 이후엔 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따라 부르지 않게 되었다.

대학 2학년 어느 날, 강의가 시작하기 전에 나는 5.18 당시 녹음된 시민들의 동참을 요구하는 가두방송 육성 테이프를 강의실에 틀고 당시 내가 알고 있던 5.18의 잔학성을 폭로하면서 강의를 들으러 온 학생들을 향해 격분을 쏟아낸 적이 있다. 교수님이 강의하려 들어와 있는 것도 무시한 채 약 10분을 전두환과 당시 진압군을 성토했던 것 같다. 교수님이나 강의를 들으러 온 학생들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이 나의 행동이 정의를 위한 외침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당시 내가 쏟아냈던 말들의 대부분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안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이었고, 나는 이를 알고 심한 충격과 더불어 당시의 내 행동에 대해 알 수 없는 회의에 휩싸이게 되었다.

나는 당시 5.18에서 수 천 명의 희생자(사망자)가 발생했고, 진압군이 선제적이고 조직적으로 발포해 광주시민들을 학살했다고 친구들(학생들)에게 말했다. 계엄군들에게 마약과 술을 먹여 진압에 투입했고, 경상도 출신 진압군을 투입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했다거나 임산부의 배를 총검으로 가르고 아기를 꺼냈고, 여학생의 유방을 도려내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들이 실체와 동떨어진 유언비어였다는 것을 2002년경 공개된 검찰 수사 보고서와 유네스코에 등록된 자료를 통해 알게 되었다. 김영삼 정권 시절에 작성된 1995년 검찰 조사보고서, 노무현 정권 시절의 과거사 진상 규명시의 조사 보고서와 1980(전두환 집권 시절) 당시 검찰이 조사한 내용과 별반 다른 것이 없다는 것에도 놀랐고, 이런 자료들을 이미 입수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사실을 알리지 않고 유언비어 내용이 사실인 것처럼 방치하는 것에는 약간의 분노도 동반되기도 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5.18 내용과 아래에 링크하는 글과 비교해 보기 바란다. 과연 어느 쪽이 5.18에 대한 실체를 객관적으로 전한다고 보이는가?

http://www.mediapen.com/news/view/154236

http://www.mediapen.com/news/view/154700

http://www.mediapen.com/news/view/156463

아마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5.18 내용은 대부분 황석영이 썼다고 알려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 나오는 내용과 5.18을 다룬 <화려한 휴가><26> 영화에 나오는 장면일 것이다. 위에 내가 링크한 글을 다 읽어 본 분이라면 알겠지만, 황석영이 얼마나 사실을 왜곡하고 구라를 쳤는지 알 것이다. 황석영이 괜히 황구라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홈피에도 사망자는 154명으로 나오는데 야당 국회의원이 실시간 중계 방송되는 국회 공식석상에서 5.18 희생자가 2천명이라고 과장해서 국민들을 기만하고 증오를 증폭시키는 망동을 해도 누구도 바로 잡는 사람들이 없었다.

혹자는 154명이 희생되었던, 2천명이 사망했던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으며, 위의 내용들이 사실이 아니고 유언비어라고 할지라도 계엄군이 과도하게 진압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5.18에 희생된 광주의 영령들을 추모하고 기리는 것이 왜 문제냐고 반문할 것이다. 맞다. 희생자가 얼마이든, 유언비어였던 아니었던 5.18은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에 변함은 없고 5.18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기려야 한다는 것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실체적 사실을 제대로 아는 것과 유언비어를 사실로 알고 희생자 수가 2천명이라고 알고 있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5.18 관련한 화합과 용서의 단계에서 역시 많은 차이를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에 대해 이해를 돕기 위해 최근의 사건을 예를 들어 조금 더 쉽게 설명하고자 한다.

지난 5/22 신안 흑산도에서 발생한 여교사 성폭행 사건으로 인해 흑산도, 신안을 넘어 전라도 지역에 대한 악성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이 유언비어 때문에 전라도에 대한 인식이 사실과 다르게 나빠지고 호남인들이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피의자들이 술에 수면제를 타 범행을 했고, 신안 경찰서가 사건을 덮으려 해 목포 경찰서에 신고를 했으며, 현지 경찰이 뭘 이런 것으로 신고하느냐고 묵살했고, 신안군의 남교사 실종이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으며, 신안군 해변에 무연고 시신이 급증했다는 유언비어가 인터넷에 난무했다. 하지만 이 모든 유언비어는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유언비어가 사실처럼 유포되고 실제 그렇게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이런 유언비어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흑산도 여교사 성폭행은 천인공노할 일이고, 그 가해자들을 엄벌에 처해져야 한다. 하지만 유언비어가 아니라는 것은 바로 잡아져야 하고, 그 유언비어로 인해 그 지역민들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흑산도 여교사 성폭행 사건은 사건의 실체에 따라 처벌되고 또 그에 대한 대책이 강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흑산도 여교사 성폭행 사건과 관련 유언비어 사례와 마찬가지로 5.18 역시 그 실체가 정확히 규명되어 국민들에게 알려져 국민들이 그 실체를 기반으로 5.18을 평가하고 진압군으로 투입된 계엄군에 대한 인식도 이에 기반해야 하며, 또 그 실체에 따른 역사적 평가도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화려한 휴가>에서 표현된 대로 계엄군이 일렬 도열하여 비무장의 광주시민을 향해 M16을 조직적으로 조준 사격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과 장갑차의 뚜껑을 열고 그 안으로 불붙은 짚단을 넣으려는 청년을 향해 자위적 차원에서 대퇴부에 총상을 입히고(이 사람은 대퇴부 부상을 입었으나 사망하지 않았지만, 사망했다는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5.18 관련 기념 사이트에서도 사망한 것으로 적어 놓았다가 최근에 수정했음), 시민군에 의한 차량 돌진으로 계엄군 1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수 명이 부상을 입는 생사를 다투는 절박한 상황에서 어떤 발포 명령이 없는데도 자위적 차원에서 사격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은 진압군의 당시 행동에 대한 인식에 많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가장 사망자가 많았던 521, 총 사망자 61명 중에 M16(계엄군) 총상으로 인한 도청 앞 사망자는 4명뿐이고, 계엄군이 단 1명도 없는 지역에서 사망한 사람이 14, 어디에서 사망했는지 장소를 알 수 없는 사람이 34명이라고 한다. (M16이 아니라 칼빈에 의한 사망자는 시민군의 오인 사격이나 오발 사고에 의한 사망자라고 보아야 한다. 5.18 당시 계엄군은 M16을 휴대했고 시민군은 캘빈 소총으로 무장했다)

<화려한 휴가>에 나오는 것처럼 계엄군이 도청 앞에서 시민들을 향해 일제 사격했다면 M16으로 인한 사망자가 4명만 나왔겠는가? 계엄군은 시민들을 학살한 것이 아니라 자위적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총기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여러분들은 5.18하면 떠오르는 사진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품에 들고 있는 어린 아이의 모습 말이다. 나는 저 사진을 볼 때보다 5.18 당시의 슬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 같아 울컥 했었다. 오월의 꼬마 상주의 이름은 조천호이고, 영정의 주인공은 19805.21에 사망한 조사천이다. 이 사진은 전세계의 언론을 탔었고, 5.18의 비극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어 있다.

5.18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 <26>에서도 조사천의 죽음이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밀린 임금을 받으러 금남로로 아들과 함께 나왔다가 계엄군의 총격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영화에서 그려진 것이 객관적 사실일까?

19805.21 광주 금남로로 돌아가 보자.

 

<1980521 오후, 광주 금남로를 따라 금남로 3가에서 2가 방향으로 장갑차 한 대가 달리고 있었다. 장갑차의 열려진 헤치로는 웃통을 벗은 남자가 머리에 흰 머리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장갑차가 동구청 앞에 잠시 머물렀을 때 한 발의 총성이 울리며 이 남자의 머리가 푹 고꾸라졌다. 장갑차 위에서 꼬꾸라진 남자는 조사천으로 오월의 꼬마 상주가 들고 있는 영정의 주인공이었다. 이 남자의 사망 원인은 총상으로 시민군의 캘빈 소총에 의한 것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 영정의 주인공 조사천이 계엄군의 M16 소총 총격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억할 것이다. 5.18 관련 어느 단체도 이런 사실을 제대로 기술하지 않고 있어 계엄군이 조사천을 사살했다는 누명을 여전히 쓰고 있다.

 

진압군도 학살자가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었으며 형제였고 아들이었다. 그들도 얄궂은 시대적 상황과 군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본의와 무관하게 5.18 현장에 투입된 죄 밖에 없지 않은가? 그들 역시 시대의 희생자이니 학살자의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은 억울하지 않겠는가?

 

* 5.18 진압에 투입된 공수부대 대대장(박종규)의 당시 회고록 일부를 첨부한다.

나는 양동교에서 팀단위 철수를 지시했다. 집결하여 이동하는 것보다 그저 지나가는 행인처럼 7-8명씩 열 지어 무표정하고 아무 일 없는 듯하되 발걸음은 빠르게 하여 광주역으로 모여 들었다. 11, 12, 13대대가 광주역에 무사히 도착하는데는 엄청난 위험들이 있었다.

 

대대가 시위 군중에 완전히 포위되어 돌과 몽둥이의 공격을 받아 대대가 해체 직전의 위험까지 갔다고 한다. 가스분출기로 겨우 통로를 열어 쫓기듯 돌아 왔다고 한다.  21시가 되면서 어느 정도 대형을 갖춘 상태에서 광주역에 집결이 완료 되었다.

 

나는 그때서야 심한 공복감을 느꼈다. 힘이 없어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면서 문득 내 병사들이 생각났다. 중령인 대대장인 내가 이렇게 배가 고프다면 말단의 병사들은 얼마나 배가 고플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지역의 방어에도 자신을 잃기 시작하였다.

 

나는 방어지역의 제일 선두에 있기로 했다. 광주사태의 시작은 지금부터다.

 

내가 부여 받은 3개 방어지역 중 제일 위험한 통로인 광주고속과 광주역을 잇는 도로상을 방어하고 있는데 깜깜한 밤에 느닷없이 도청 쪽 12대대 담당지역에서 버스 한 대가 터덜 터덜 굴러 와서 광주역 앞 분수대를 들이 받고 넘어졌다.

 

광주의 시위는 공수단의 엄청난 착각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얼룩 무늬복에 배레모만 쓰고 차렷 자세로 투입되기만 하면 시위가 끝나는 것으로 통념화 되어 있던 시위진압이 광주에서는 공수단의 패퇴, 공수단에 대한 공격, 부대의 와해, 사단장 차량의 피탈, 공수단의 무등산으로의 도주 등 실로 6.25전사의 3군단 패배에 못지 않는 치욕의 전사가 기록되고 말았다.

 

'무인 돌진차량'(액셀러레이타와 운전대를 일정 속도와 방향에 묶어 놓고 기어를 1단에 넣은 후 클러치를 떼면서 사람이 뛰어 내리고 돌진하게 하는 차량) 공격이 시작되면서 우리대대를 향해서도 5 대 가량의 무인 돌진 차량이 간헐적 으로 돌진했다. 공격자를 찾아서 공격을 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지쳐 있었고 허기져 있었다.

 

방향과 속도가 일정하니까 무인 돌진 차량을 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배치된 대형에서 차량의 통로만큼만 열어주면 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것도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느 방향에서 올지 모르는 불안 때문에 늘 주의와 신경을 곤두세워 피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이때부터 차 온다는 고함소리가 우리를 놀라게 했다. 광주사태가 끝나고 귀대하여 몇 달이 지나도록

우리 3공수여단 장병에게 차 온다는 고함소리는 잠을 못 이루게 하는 악몽의 함성으로 자명되었다.

 

간헐적인 무인차량의 공격과 더불어 각 방향에서 폭도의 몽둥이 공격, 투석공격이 파상적으로 계속되었다. 시위대는 우리를 제압하기 위해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고 우리는 최후의 보루를 지키기 위해 필사의 대항을 지속했다.

 

10시가 훨씬 지났다. 그런 적막도 잠시였다. 저 멀리 양동교 방향에서 함성과 노래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점점 함성이 가까워 지면서 갑자기 차 온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12대대 쪽에서 굉장한 속도로 라이트를 켠 화물차가 질주하여 분수대를 들이박고 달아났다. 엄청난 속도였다.

 

얼마 있다가 16대대 운전병이 돌진차량을 피하지 못해 몸이 갈기갈기 찍힌 체 죽었다는 최초의 피해보고가 구전되어 왔다. 그는 내가 16대대에 있을 때 운전병으로 선발된 병사였는데 제대를 몇일 앞두고 광주에 출동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서울에 복귀한 후에도 광주에서의 희생자가 많아서 군인의 죽음 정도는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아 지금도 나는 자세한 상황을 모른다. 다만 16대대가 광주역 좌측 방향에서 반대방향으로 포진하고 있을 사이에 돌진차량이 시속 100키로로 달려들어 하늘이 돕지 않았다면 30명 정도 죽었을 사고였으나 대대장 운전병만 피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들었다.

 

이에 무인 돌진차량이 유인돌진차량으로 바뀌었다. 속도도 엄청났지만 방향이 일정치 않고, 우리 대형을 찾아서 돌진하는 공격이기 때문에 위험성은 훨씬 높았다.

 

드디어 우리 대대 앞으로 그런 유인돌진 차량이 공격을 감행했다. ‘차 온다는 고함소리에 눈을 돌리니 화물자동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직진하고 있었다. 유인 돌격 차량에 대해서는 가스탄도 곤봉도 무용지물이었다. 소총 앞에 탱크가 출현한 미아리 전투와도 같은 것이었다.

 

최선의 공격이라고 떠오른 대대장의 전략(?)이라는게 차량의 바퀴를 펑크 내는 일이었다. 우리 대대원은 실탄을 휴대하지 않았다. 포승줄과 최루탄도 과잉장비라고 투덜대던 우리가 실탄이 소요되는 상황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총은 군인과 떨어질 수 없는 분신의 개념으로 휴대한 것이었지 쏘려고 휴대한 것은 정말로 아니었다. 공수대가 출동명령만 받으면 반사적으로 들고 나오는 약간의 탄약은 전남대에 남겨 놓은 상태였다. 유일한 총기는 대대장인 나의 45구경 권총과 실탄 14발 뿐이었다.

 

순간 나의 병력을 뚫고 화물차가 돌진하고 있었다. 총을 꺼냈다. 탕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제발 명중하지 말아라하고 기도했다. 다행이 차에 명중되지 않고 차량은 분수대를 들이 박고 정지되어 12대대 병력에 체포 되었다.

 

수 차례의 폭도 공격이 있었고 시간은 밤 11시가 지난 듯 싶었다. 병력의 선두에 서 있는 내 앞 저 멀리 군중 속에 헤드라이트를 켠 2톤 트럭이 돌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부 병력이 차 온다고 예고하고 있었다.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가슴이 뛰고 있다.

 

방법은 없었다. 실탄을 제거하고 총을 집어넣었다. 차가 돌진을 시작했다. 아까와는 달리 직진이 아니고 병력이 피하는 방향으로 향하면서 요란한 경적소리와 함께 돌진해 오고 있었다. 100미터, 50미터, 30미터, 발이 아스팔트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차는 이미 맹렬한 속도로 3미터 앞에 달려오고 있었다.

 

그 짧은 동안 나는 부모님 생각이 났다. 집안 생각도 났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가장 끝까지 생각한 것은 배고파 지친 우리 대대 병력이 내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 난국을 정리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제 죽음은 나의 행동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운명에 달려 있었다.

 

오른쪽으로 뛰어 넘어져 버렸다. 차량은 휙 지나가면서 나를 에워쌌던 부하대원 4명 중 2명이 차의 뒷바퀴에 끌려가면서 다친 것으로 끝났다.

 

차가 분수대에 부딪쳐 멈추자 우르르 몰려간 우리 병력에게 운전자가 잡혀 내려왔다. 감정에 복바친 우리 병력은 진압봉으로 그를 두들겨 패기 시작하였다. ‘때리지 마그러나 그것은 전장에서 사격을 중지시키는 것만큼 들리지 않는 대대장의 명령이었다. ‘때리지 마내가 마지막 고함을 지르자 모두들 자기 위치로 갔다.

 

병력을 정리하고 있는 사이 운전자가 툭툭 털고 일어나 뛰어 도망갔다. 20세 전후의 젊은이였다.

 

24시가 되어 시위가 뜸해지기 시작했다. 16대대가 전남대 입구를 엄호하는 사이 우리는 전남대로 철수를 시작했다. 별이 많이 떠 있는 초여름 밤이었다. 전남대학교 숙직실에서 처음 라면을 끓여 먹었다. 숙직실 1평방에 여럿이 다리를 포개고 잠이 들었다. 광주사태의 첫날밤은 그렇게 지냈다. “

 

6. 용서와 화해를 향해 - 풀은 역사 위에 어떻게 자라는가

5.18도 올해로 36년이 되었다. 희생자들과 유족들은 여전히 한으로 남고 뼈에 사무치는 기억일 테지만, 용서와 화해, 그리고 우리의 아픔을 함께 치유하기 위해 이젠 역사의 바다로 흘려보내는 것이 어떨까?

말초적 증오와 분노에서 벗어나 용서를 위한 준비를 하고, 5.18의 역사적 의미를 국민들 모두 새길 수 있도록 차분히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함이 어떨까 생각한다.

1 달 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산 최영미의 <시대의 우울>이라는 책에 소개된 카스트너의 미술 작품을 보고 우리도 5.18카스트너의 방식으로 기억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나찌당의 본거지였던 뮌휀의 쾨히니 광장 자리에는 지금 미술가 카스트너<풀은 역사 위에 어떻게 자라는가>라는 작품이 있다. 1933년 나찌가 퇴폐적이라고 낙인 찍은 작가들의 책들을 불살랐던 광장에 카스트너가 그 자리를 불 살라 재로 만든 후 어떻게 풀이 자라는지를 관찰하도록 하는 작품이다.

과거를 상기하고 잊지 않도록 하되, 미래 세대가 그 의미를 찬찬히, 그리고 되씹게 하는 것으로 세련되기도 하여 한참을 그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그 작품을 바라보았다.

이 작품을 보고 나는 5.18의 실체를 제대로 알았을 때 반사적으로 일어났던 5.18에 대한 다소 부정적 생각들(본질적인 것이 아닌 부차적인 것이지만 그 반사적 강도가 강해 본질마저 의심하게 만들었던 것)에서 벗어나 다시 차분히 5.18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

 

PS : 최영미의 <시대의 우울>은 유럽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보면서 본 미술 작품들을 소개하고 자기 생각을 덧붙이는 여행기이면서 미술 작품 해설서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이 내용과는 전혀 매칭이 되지 않는 <시대의 우울>이라고 명명되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그런데 책 중반부에 책명을 <시대의 우울>로 한 의도를 읽을 만한 부분이 나온다. 최영미는 좀 뜬금없게도 책 중반부에 그림이 아니라 보들레르의 <빠리의 우울>이라는 글을 소개한다.

 

나의 신이여, 내가 형편없는 인간이 아니며 내가 경멸하는 자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증명해 줄 아름다운 시 몇 편을 쓰도록 은총을 내려주소서.”

 

최영미는 이 보들레르의 <빠리의 우울>을 패러디 해서 책 제목을 <시대의 우울>로 정하고 당시에 자신이 말하고 싶고,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보들레르의 이 글로 대신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최영미는 이 책을 발간하기 4년 전(1993)에는 80년대 학생운동권을 과감히 비판하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 이 시의 연장선상에서 보들레르의 <빠리의 우울>로 당시의 심정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 아닐까? 물론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고 최영미의 의도는 확인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최근 최영미가 생활보호대상자라 마포세무서로부터 근로장려금을 신청하라는 통보를 받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는데 <시대의 우울>을 신간이 아니라 중고로 샀다는 것이 괜히 미안해진다.

최영미 시인! 건강하시고 좋은 작품 내 주시라. 내가 넷상에서 응원한다고 얼마나 도움이 될까마는 시대를, 역사를 보는 시선이 비슷한 것 같아 이렇게라도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