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곳에 최초로 썼던 댓글이 "주체의 과학"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이었는데, 돌고 돌아 다시 그 처음으로 돌아가게 되었네요. 사실, 이곳을 접하면서 위의 주제로 쓰려고 했었는데, 혹은 이런 저런 댓글의 와중에 그 글을 쓰려고 했었는데, 저러한 주제로 마침내 글을 쓰게 된 결정적 계기는 아이추판다님과의 댓글들을 통해서입니다. 물론, minue622님과 오마담님이 알려주신 <라캉의 심리학에 대한 오용(Lacan's Misuse of Psychology)"이 이 글을 쓰는데 도움을 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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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추판다님과의 댓글 토론 와중에 그 님이 제시하신 <거울 단계> 논문에서 나타나는 라캉의 쾰러에 대한 오용에 대해, 제가 아이추판다님에게 라캉의 쾰러에 대한 오용을 주장하게 된 과정을 물어볼까 생각했습니다. 즉, 라캉을 직접 읽은 것인지, 혹은 그것을 주장하는 어떤 글을 읽은 것인지 말이죠. 하지만,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기에, 즉 제가 <거울 단계>  논문에서 읽은 라캉의 쾰러에 대한 "간접인용"이 실제로 쾰러의 "비교 심리학" 혹은 동물행동학(ethology)에서의 실험과 비교해서 정확한 것인지 아이추판다님에게 제가 직접 물으면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따라서, 아이추판다님이 어떻게 쾰러에 대한 라캉의 오용을 알게되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결론은? 이미 댓글 토론을 통해 라캉의 오용이 확인되었습니다. 즉, 라캉이 침팬지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에 흥미를 잃는 다는 라캉의 주장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쾰러는 확실하게 침팬지는 흥미를 잃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라캉의 쾰러에 대한 오용으로부터 이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라캉의 쾰러에 대한 오용이 의도적이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수는 없죠. 즉, 라캉이 프랑스어로 번역된 침팬지에 대한 실험을 담은 쾰러의 책을 어느 정도까지 읽었는지, 그래서 침팬지는 거울 속 자신의 이미지에 흥미를 잃지 않는다는 부분을 읽었는지 그렇지 않은 지는 알 수 없죠. 읽었다고 해도, 그것을 이해못했을 수도 있고, 혹은 인상깊게 읽지 않았다면, 그러한 "사실"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라캉에게 그러한 "사실"은 하등의 중요성도 갖지 않는다고 말하겠습니다. 즉, 라캉에게는 침팬지가 거울 속에 있는 어떤 것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자기 동료를 꼭 닯은 그것은 무엇인지, 그리하여 그것이 자신의 이미지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self-recognition 자기-인식)으로까지 발전하는지의 문제는 라캉에게는 어떠한 중요성도 갖지 않는 다는 것이죠. 혹은, 침팬지가 인간의 아기와 같은 그런 단계로까지 발전해 있다는 "사실"은 라캉이 억압해야되는 진실이었을지도 모르죠.

따라서 그에게는 오로지 "인간의 아기"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고, 또한 통일된 모습(Gestalt)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게슈탈트 심리학에 대한 라캉의 오해도 있지만, 이는 접어두기로 합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자기-인식은 "나라는 자아"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되죠. 물론, 이러한 자기-인식은 오인(misrecognition)에 기반해 있는 것이고, 인간은 그 탄생에서부터 본질적으로 분열되어 있다고 주장을 하게되는 것이죠. (<거울 단계> 논문은 이러한 시각적 "자아"와 더불어서, 짧막하게 나마 언어적 "자아" 혹은 주체의 탄생까지를 다룹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탄생, 주체의 탄생과 더불어서 탄생하는 우울증, 신경증, 정신병, 망상증, 도착증 등 인간에게 고유한 마음의 병을 다루는 것이 정신분석학이죠. (물론 정신분석학만이 그러한 마음의 병을 다루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심리학, 정신의학(psychiatry) 등등).

만일 침팬지도 인간의 아이처럼 자신의 이미지를 즐긴다는 것을 (쾰러의 동물행동학의 실험에서 얻은 "사실"을 통해서라면, 인간의 아이도 침팬지처럼 자신의 이미지를 즐긴다고 말해야 겠지만) 라캉이 알았다면, 그리하여, 그러한 사실로부터 동물보다는 인간에 더 가까운 침팬지도 인간과 동일한 사회, 문화, 역사는 아니지만, 침팬지 만의 사회, 문화(삶의 방식), 역사(인류의 역사와 같은 역사는 아닐지라도, 한 마리의 침팬지가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서 지닐 수 있는 기억의 총체)가 있을 수 있다는 가정으로 나아갔다면, 침팬지도 인간의 웃음을 웃는 다는 것을 알았다면, 인간의 키스(즉, 인간의 성(sexuality))와는 다르지만, 그것들만의 키스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인간의 장례(땅에 묻음, 라캉이 인간의 최초의 상징이라고 부른 것, 즉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기준)의 형태와 같지 않지만, 침팬지도 자식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하나의 가정이지만, 만일 그랬다면, 지금과는 다른 라캉이 되었겠다는 상상도 해봅니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에 대한 글을 썼는데, 누군가의 죽음, 즉 대상의 잃어버림에 대한 우울증이 침팬지에게도 있는지 궁굼해지네요. 침팬지가 인간과 같은 망상증, 정신병은 없을 듯하지만 말이죠. 이 마음의 병들은 언어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라캉에 있어, 쾰러(볼드윈, 뵐러를 포함해)의 발견, 즉 인간의 아기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에 매료된다는 발견은 이와 같이 인간의 탄생, 주체의 탄생, 즉 본질적으로 분열된 주체의 탄생을 논하는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다지는데 아주 중요한 주춧돌이 되는 것이죠. 이를 이전에 썼던 저의 칸트에 대한 글에서, "니체가 기억을 지니지 않아 과거와 역사를 갖지 않는 동물과 기억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과거와 역사를 지니는 인간 중에서 누가 더 행복한가라고 물을 때, 그렇게 자연과 분리되면서 인간이 탄생하고, 그 인간의 탄생과 더불어서 역사와 문화가 탄생하는 것이죠."라고 썼던 것을 라캉과 관련해서 상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아기는 최초에 동물로 태어납니다. 그 아기는 인간의 사회, 역사, 문화, 언어 안에 놓이면서,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으면서 비로서 인간으로 탄생을 하는 것이죠. 만일 그 아기가 인간이 아닌 동물의 군집사회 안에 놓이게 된다면, 그는 인간으로 자라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정글북>>은 완벽한 허구죠. <<로빈슨 크루소>>가 완벽한 허구인 것처럼 말이죠. 그렇게 인간 사회 바깥에서 태어난 아이가 성체(?)가 된 체로 발견된 사례들이 있을 겁니다. 결국 인간 사회로 편입시키려는 노력들은 실패로 끝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무모한 가정이긴 하지만, 그 아이가 동물이 아닌 침팬지 사회에서 태어난다면? 침팬지의 지능을 4세 아동으로까지 끌어올린 실험들이 있을 텐데, 과연 그 아이에게 4세 이상의 지능으로, 그래서 4세의 지능에 해당하는 좀더 복잡한 인간의 언어를 가르칠 수 있는지 등등등).

이와 같이 인간이라는 사회(대타자) 속에서의 주체의 탄생, 분열된 주체의 탄생, 무의식의 주체의 탄생을 다루는 것이 정신분석학입니다. 인간의 아기(성인인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가 타자를 보면서, 그리고 타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리고 (거울 뉴론(mirror neurons)을 통해) 타자의 이미지를 흉내내고, 타자의 목소리를 흉내내면서, 그때서야 비로서 탄생하는 인간, 주체를 다루는 것이 정신분석학입니다. (거울 뉴론은 <심리학에 대한 라캉의 오용>에서 인상깊게 읽은 개념입니다. 거울 뉴론은 "사람상과"에만 있다고 하고, 그래서, 그것이 있기 때문에 침팬지와 인간이 타자를 보면서 흉내낼 수 있다고 합니다, 마치 거울을 보듯이, 타자를 흉내낸다는 것이죠). 지각과 인식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극 속에서, 기억의 간극 속에서, 어떤 기억들은 보존하고, 어떤 기억들은 억압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탄생을 하는 것이죠. 그렇게 보존되거나 억압되는 기억들의 총체인 인류의 역사 속에서 탄생을 하는 것이죠. 이 탄생의 순간은 최초의 빅뱅의 순간 탄생한 우주처럼, 수소가스 덩어리에 가해지는 전기작용을 통해 탄생한 원시 생명체처럼,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통해 우리의 뇌에 가해지는 전기작용을 통해 탄생하는 기억의 단백질 덩어리처럼, 인간의 탄생도 그렇게 위대합니다. 그러나 이 탄생은 위대하지만 비극적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탄생은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인간의 시신을 끌어모아 만든 괴물에 가하는 전기작용을 통해 탄생하는 괴물과 더 가깝습니다. 그렇게 괴물을 안고 태어나는 우리는, 신경증, 망상증, 도착증, 우울증 등등을 안고 태어나는 우리는, 서로를 보듬는 것 외엔, 그 상처들을 어루만져주는 것 외엔, 그 괴물을 달래면서 사는 방법외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이 소박하게나마 제가 정신분석학으로부터 배운 윤리이기도 합니다.

덧글 1: 쓰고 보니 라캉에 대한 글이라기 보다는, 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글이 되어버렸네요. 따라서, 이 글은 정신분석학을 대표하는 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리고 주체의 과학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라캉의 <거울 단계>를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밝힙니다. 물론, 간략하게나마, 더 넓은 이슈들을 다루긴 했지만요.

덧글 2: 라캉에 있어서의 쾰러 이외의 인용, 오용의 문제를 다루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쾰러에 대한 오용만을 다뤘을 뿐입니다. 라캉이 다른 학자의 생각을 빌려오는데 있어서, 제 입장은 라캉은 고약한 학자라는 겁니다. 악질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신분석학 이론 전체, 라캉 이론 전체가 오류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이는 저 같은 사람이 져야하는 천형과 같은 것이어서, 그저 앞으로 더 꼼꼼하게 라캉을 읽어야 겠죠. 그래서 인용 상의 오류를 판명을 해야되겠죠.

덧글 3: 윗글에서, 침팬지에 대한 예들은 <심리학에 대한 라캉의 오용>에서 읽은 것도 읽고, 제가 대중매체를 통해 접한 것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부정확한 기억에 의존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밝히고, 오류가 있다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침팬지 외에 다른 오류들도 마찬가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