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지토-피노키오 논쟁(이하 '코피논쟁')은 호남의 민주당 지지투표의 성격 및 규정을 둘러싸고 코지토님과 피노키오님 간에 벌어진 일련의 논쟁(및 언쟁)을 말합니다. 이 논쟁에 관해 하고 싶은 이야기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제법 많습니다. 아마 앞으로 1년 이상 소가 되새김질 하듯 이 코피논쟁을 우려먹을지도 몰라요.


 문제의 논쟁에서 쟁점으로 부각된 주된 사안은 크게 나누어 두 개로 나눠집니다. 첫째가 호남의 민주당 지지가 지역주의 투표였는지 여부, 둘째로 피노키오님의 주장처럼 호남의 민주당 지지가 계급투표였는지 여부. 그런데 그 두번째 쟁점을 둘러싼 논쟁은 결국은 양자 간의 감정 및 자존심 싸움으로 전락해 버렸죠. (사실 이 점이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납니다. 이건 인터넷 게시판 상의 정치관련 논쟁이 어떤 과정을 거쳐 알맹이 없는 감정싸움, 진흙탕 개싸움으로 타락해버리는지를 드러내주는 전형적인 사례라는 거죠. 코피논쟁이 만지작거리면서 가지고 놀기 재밌는 사례인 이유 중의 하납니다. 그러나 이 타락과정의 분석 및 감상은 다음 기회로 미룹니다.)


 그 두번째 쟁점에서 양자 간의 쫀심 싸움은 어느 쪽이 맑스주의에서 통용되는 계급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가의 문제, 또는 맑스가 규정하는 계급은 무엇이며 이를 올바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며, 이를 엉터리로 파악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해서 누가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이란 과목을 제대로 공부한 우등생이며, 또한 야매로 배운 열등생은 누구인가의 문제로 귀결되었습니다. 물론 코지토, 피노키오 양자는 서로 상대방이 무식한데다 멍청하고, 자신이 유식하면서 똑똑하다는 입장을 강고하게 견지하며 코피 터지게 상호비방전을 벌였죠. 이건 그 논쟁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 그러나 다들 아시다시피 이런 건 오직 논쟁을 벌인 양 당사자에게만 중요한 문제일 따름입니다. 그 밖의 사람들에겐 그런 따위야 아무래도 좋은 문제지요. 그래서 이 자리에서 어느 쪽이 더 똑똑하고 유식했는가를 판정하는 일에 관여하진 않겠습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히려 이런 것보다는 왜 하필 그 논쟁의 구도가 '맑스'의 계급규정에 준거를 두는 방식으로 틀짜였졌는가라는 겁니다.


 호남의 민주당 지지가 계급투표였는지를 논의할 때 맑스의 계급개념을 누가 더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를 둘러싸고 둘 간에 '쫀심' 싸움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양자 모두에게 맑스가 무슨 말을 하고 생각을 했는지가 일종의 '권위'(지적권위)로 자리잡고 있었다는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물론 이 외에 다른 추측도 가능합니다만, 상식적으로 이 해석이 가장 개연성 높아 보입니다). 그리고 이 양자는 모두 좌빨(또는 자칭 좌빨, 또는 좌빨경력을 가진 사람)들이죠. 이상의 사실 및 추측을 종합하면, 비단 이 둘 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좌빨들 상당수에게 맑스는 지금까지도 만만찮은 지적권위, 무게감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라는 보다 일반화된 추측도 해봄직하죠. 그리고 최근 우연히 마주친 진보신당 게시판의 어느 글타래는 이런 제 추측을 지지해줍니다. (마르크스주의가 낡았다는 말이 새로운 동네군요 - 진중권) 글타래에 달린 댓글들을 따라 읽어보시면 확인할 수 있듯이, 맑스주의는 이제 낡았다는 진중권의 단언에 진보신당 좌빨 당원들의 반발이 제법 거세죠. 아래 일부를 인용한 셈 수호르라는 당원의 반응이 딱 그렇습니다.

 
 맑스주의가 낡았다고 단정하려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해석하는데 더 이상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새 맑스주의가 다시 부활하고 있지요.  여기와 한국 사회에서는 과거 운동물 먹은 친구들이 수꼴보다 더 앞장 서서 맑스주의를 무덤 속에 파묻으려 하지만 세계는 안 그러거든요. 둘째 맑스주의보다 더 정확하게 현 자본주의를 해석할 수 있는 이론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 이론이 있을 때 맑스주의가 더 이상의 가치를 보존하지 못하고 역사의 퇴물로 규정받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누구도 맑스주의를 대체할 이론을 내세우지 못하고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 맑스의 계급규정을 누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로 옥신각신했던 그 문제의 논쟁으로 다시 되돌아가 생각해봅시다. 그 논쟁의 출발점은 20세기 및 21세기에 걸친 지난 30년 간 한국에서 벌어졌던 호남지역의 민주당 지지투표가 계급투표인가 여부를 따지는데 있었죠.  그게 두 번째 논쟁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호남유권자의 민주당 지지를 계급투표라고 주장하거나 (코지토님과 같이) 이 주장에 반대하는 것은, 계급투표가 호남유권자의 투표성향이란 '현상'을 분석하고 이해하는데 진정 유용한 개념적 도구인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각도를 이렇게 놓고보면, 그 문제의 논쟁에서 맑스가 계급을 어떻게 규정했는지, 또 그 계급규정이 피노키오님의 계급규정과 정말 일치하고 있는지 여부는 하등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피노키오님의 계급규정이 호남유권자의 투표성향을 이해하고 분석하며 향후 예측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가 쟁점이 되었어야죠. 다시 말하지만 맑스의 계급규정이 피노키오님의 그것과 일치하는지 여부는, 사실 아무래도 좋은 부차적인 문젭니다. 왜냐하면, 맑스 또는 맑스주의는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일 뿐이니까요.
그런데도 코지토-피노키오 양자는 어느 쪽의 계급규정이 맑스의 그것과 일치하는지를 두고 죽자사자 코피터지게 싸웠단 말이죠. 어찌보면, 상당히 해괴한 일이죠.


 왜 이런 일이 벌어진걸까? 앞서 했던 말의 반복이지만 한국 좌빨들이 맑스주의에 아직도 너무나 짓눌려 있는게 그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바꿔 말하면, 한국 좌빨들의 지적, 분석적 도구의 원천이 주로 맑스주의에 국한되어 있다는 거죠. 맑스주의가 낡았으며 어디까지나 수많은 참고대상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중권의 주장에 진보신당 좌빨들이 저토록 거세게 반발하는 이유도 아마 거기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여기까지 말해놓고 보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수년 전 엘리너 오스트롬이란 정치경제학자가 노벨상을 수상한 사건입니다. (조선일보 관련기사) 이 오스트롬은 재산권의 절대불가침을 신봉하는 신자유주의 진영이 염불마냥 되뇌이는 이른바 '공공재의 비극'을 사유재산권의 도입이 아닌 공동체적 제도의 도입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넓은 의미에서) 좌파진영학자, 적어도 시장만능주의와는 대립하는 진영에 속한 학자죠. 조선일보 기사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연구는 현실에서 성공적을 정책에 반영해 성과를 거둔 연구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상을 줬겠죠.) 그런데 그런 오스트롬의 주저인 '집합행동과 자치제도 (Governing the Commons)'를 한국에 처음 번역해서 소개한 곳이 다른 곳도 아니라 바로 '자유기업센터'였어요. 이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비약이라면 비약이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좌빨들이 우파에 대해 지적헤게모니 싸움에서 주도권을 되찾기란 난망합니다.
좌빨들에게 정치경제학은 절대적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도권 좌빨들이라면) 그 정치경제학의 지적 스펙트럼을 넓혀야 해요. 적어도 제도정치권에서 정치권력을 획득해 좌파적 아젠다를 '정책'의 집행을 통해 실천/실현하겠다는 생각을 품는 좌빨들이라면, 맑스주의에 대한 과도한 지적권위부여, 또는 주된 지적원천으로서 맑스주의에 얽매이는 일은 이제 무덤으로 보낼 때입니다.


 덧붙여, 누가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우등생인가를 다투는 식의 논쟁에서도 다소 거리를 둘 필요가 있지 않나, 라고 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