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들의 삶속에서 긴 것과 짧은 것의 몇 가지 대조를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장자」 양생주에 나오는 대조가 있다.
"吾生也有涯(오생야유애) 而知也无涯(이지야무애)" 
(나의 삶에는 끝이 있으되, 앎에는 끝이 없도다.)

장자의 이 진술은 그보다 조금 전 시기 헬라에서 활동하였던 의성 히퐄라텟 만년의 탄식과 궤를 같이 한다.

"Ars longa, vita brevis."
(인생은 짧고, 기술은 길다.)

길고 짧은 대조가 분명한 것들은 이외에도 있다.

"Dolor longus, voluptas brevis."
(쾌락은 짧고, 고통은 길다.)

룻소는 「에밀」에서 "십대는 과자에 의하여, 이십대는 이성(異性)에 의하여, 삼십대는 쾌락에 의하여, 사십대는 야망에 의하여, 오십대는 탐욕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만일 육십대라면 아마도 보약에 의하여 지배될 듯 싶다. 몸에 좋다고만 하면 바퀴 벌레라도 집어 먹을 테니까.) 이십대와 삼십대를 겪은 지구인들이라면 쾌락의 달콤함과 함께 길게 남는 쓰디씀의 뒷맛을 기억할 것이다.

"Caritas longa, ira brevis."
(진노는 짧고, 자비는 길다.)

잠시 지나가는 현세의 인간대신 신적 사랑(agape)에 헌신하기로 작성한 사람들은 다르게 느낄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꽃」은 "주님께서 회개의 삶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라는 감사와 찬미로 시작한다. 아마 그에게는 진노와 은혜로운 자비의 대조가 무엇보다도 생생하고 세게 다가왔을 법 하다.

"Fas longa, vis brevis."
(권력은 짧고, 정의는 길다.)

10월 부마 항쟁을 경험한 경상도 사람들이라면 10.26 사건을 보면서, 5.18 광주 사태를 목격한 전라도 사람들이라면 전두환과 노태우 구속을 보면서 위와 같은 감상을 당연히 가졌으리라 여겨진다. 노자가 말한 "하늘 그물은 크고 넓어서, 성긴 듯 하나 새지 않는다"는 가르침의 실증인 셈이다.

"Ignorantia longa, scientia brevis."
(지식은 짧고, 무지는 길다.)

이것은 솤라텟이 언필칭 한 소리이다. 이 대조는 앞의 장자나 히퐄라텟의 탄식과 유사하기는 하나, 한 층 더 강렬하고 통절하다. 지식에 끝이 없는 줄이야 알고 있었으되, 증가하는 지식보다 무지는 더 빠른 속력으로, 지수적으로 증가한다. 무한에도 가부번 무한과 비가부번 무한이 있다더니, 바로 그 짝이다.

이 마지막 대조 앞에서는 할 말을 잃음이 필연적 귀결일 듯 싶다.
이 나라와 이 별이 어찌 될지, 지식은 짧고 무지는 너무나도 기니 말이다.

2021-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