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生)이라는 글자는 상형 문자이다. 글자 생김새를 보면 마치 소 우(牛) 아래 한 일(一)이 있는 회의 문자 아닌가 싶지만, 갑골문이나 금문에서 보이는 이 글자는 영락없이 돋아나는 새싹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일(一)은 여기서 지면을 뜻한다.

그래서 대표 훈 및 음이 날 생이다, 두번째가 살 생, 세번째가 낳을 생이고.

나다: 거듭나고 끝장나고 나타나고 냄새나고 달아나고 돋아나고 드러나고 떠나고 뛰어나고 만나고 불나고 빛나고 빼어나고 생겨나고 태어나고...

여러가지 남이 있지만, 대표적인 남은 물론 태어남이다. 그냥 "나다"라고 쓰면 태어남을 의미한다.

태어남은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사자성어에서 보듯이,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다. 병아리가 안에서, 어미새가 밖에서 껍질을 깨기 위하여 함께 쪼듯이; 태아가 태어나기 위하여 호르몬을 유도하고 발버둥을 칠 때 산모도 옼시토신을 만들고 배에 힘을 주고 좀 부끄러운 자세를 취함으로써 출산의 노고를 함께 이루어낸다. 그 고통이 살이 찢어지고 뼈가 벌어지는 형용할 수 없는 것이기때문에 지나 속담에  "수비동 수심동(誰屄疼 誰心疼)"이라는 말도 있을 터이다.

그후 이어지는 이 생(生) 한 글자를 전개하면 바로 "생존경쟁 번식경쟁" 여덟 자가 된다 하겠다. "삶"은 생존경쟁이고, "낳음"은 번식경쟁이다. 

동물에게서의 생존경쟁이란 주로 먹이경쟁이다. 반면 자기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식물에서의 생존경쟁이란 곧 공간경쟁이다. 햇볕을 받을 수 있는 허공의 공간.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사유 재산을 갖고 있고, 그중 적지 않은 것이 세간들이기때문에 이를 둘 공간경쟁이 식물처럼 필요하다는 점에서 좀 유닠한 동물이다.

 그 공간중 가장 작은 공간이 바로 이어폰/헫폰과 고막 사이 공간이다. 그보다 좀 더 갖추어진 공간은 살갗과 옷 사이의 공간일 것이다. 그보다 아주 약간 더 큰 공간의 보기로는 유태인들이 기도할 때 걸치는 탈맅(tallit)을 들 수 있다. 실제로 유태인들은 탈맅을 머리와 상반신에 두르고는 그 탈맅으로 인하여 만들어지는 작디 작은 공간에 신이 임재하며 그 안에서 신과 자신만의 오롯한 밀실 독대 대화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시나곡에서 곁에 서 있는 다른 유태인과는 분리된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탈맅을 걸치는 의의가 그와 얼핏 비슷하게 보이는 천주교의 미사포와는 매우 다르다. 

그런데 이런 작은 공간만으로 인간이 만족은 고사하고 견딜 수 있나? 소림사 장문(掌門) 방장(方丈)조차도 사방 열 자, 곧 일장(一丈)의 제곱 공간은 필요하다. 그래서 방(네모)+장(10 척)인 것이다.

자원이 적으면 생명/유전자는 개체의 영속을 찾고,
자원이 많으면 생명/유전자는 종족의 번식을 찾는다.

생존경쟁이 어느 정도  끝나야 그 다음 순서가 번식 경쟁이다.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이듯이 아생연후생타(我生然後生他)이다.

지금 남한과 남한인들은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는가? 생존경쟁이 치열하다. 특히 아팥값 앙등으로 인한 공간경쟁이 격심하다. 생존이 담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번식경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2020년 합계출산율 0.84에 이어, 올해는 0.7x, 내년에는 0.6x을 보일 거라는 전망은 당연한 것이다. 포자화(胞子化) 현상이라고 명명할 수 있겠다.

설령 개체가 포자화되더라도, 그 포자 안에서도 생(生)의 신성(神性)은 여여(如如)할 것이므로, 그가 생(生)의 신성(神聖)을 깨닫는다면 그것으로 족할지도 모른다, 쉽지 않은 일일 테지만.

그런즉 문가는 친애하는 남한 동포들을 철학자로, 명상가로, 신비주의자로, 도인(道人)으로, 걸사(乞士)로 만들 작정인가 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그리 되기는 싫은지 널찍한 새 집 짓는 중이라고 한다. 처음부터, 문가가 지장보살일 리는 만에 하나도 없을 거라고 보았다.

2021-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