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로 인간이란 어떤 동물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어 왔다.

플라톤에게 어떤 사람이 인간이란 무엇인지 물었더니, "털이 없고 두 발로 걷는 동물"이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다음날 아테네를 방문중이던 디오게넷이 닭 한 마리 털을 몽땅 뽑은 후 아테네 성문앞에 세워 두고는 "이게 플라톤이 말하는 '인간'이오"라고 하며 망신을 주었다고 한다.

어떤 사물을 정의하려면 그 사물의 직상위 유개념 + 종차로써 정의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아릿토텔렛의 「논리학」의 등장까지 기다려야 하였다, 거기서 비로소 종개념(種槪念), 유개념(類槪念), 범주(範疇)와 같은 단어들이 나오므로.

아릿토텔렛은 인간을 사회적 동물, 폴릿(polis)의 동물이라고 생각하였다. 혼자서 살 수 없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라틴어로 Homo politicus라고 부르는데, 인간만이 사회적 동물인 바는 아니므로, Homo(인간)를 빼고도 성립하는 말은 아니다.

인간에게 학명을 부여한 린네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팟칼의 금언에 감명받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생각하고 슬기를 지님을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여겨 Homo sapiens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런데 인간만이 생각하는 동물인 것은 아니므로, 이 또한 Homo를 빼고도 성립하지는 않는다. 보더 콜리 견종이 매우 영리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으며, 종으로서 까마귀나 문어도 상당한 지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최근 연구에 의하여는 갑오징어가 지구인 어린이처럼 마쉬맬로우 시험을 통과함이 밝혀졌다. 갑오징어는 사료로서 게보다 새우를 더 선호하는데, 게 주면 안 먹고 새우 줄 때까지 배고픔을 참으며 기다리더라는 내용이다. 그럴진대 코끼리나 고래같이 큰 뇌를 가진 동물은 또한 어떻겠는가?

벩송은 인간이 연모를 만들어 씀을 중요한 특질이라고 보아 Homo faber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침팬지도 타제 석기를 사용하고 벌레잡이 막대기를 만듦이 밝혀졌다. 앞에서 언급한 까마귀가 초보적인 연모를 구해서 쓰거나, 심지어 자동차 지나감을 이용하여 견과를 까먹음을 보면 이 또한 Homo라는 단어를 제거하고는 성립하지 못하는 말이다.

프로잍은 인간의 본질을 욕망, 그중에서도 성욕으로 보았다. 욕망으로 가득 찬 이 동물을 그는 Homo libidinosus라고 불렀는데, 성욕이 어찌 인간에게만 있겠나? 유성 생식하는 모든 동물들이 다 지닌 것이므로, 이 또한 인간만의 고유 특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빝겐슈타인이 논리 실증주의 철학을 깊이 천착하다가 언어 사용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생각을 품게 되어 Homo loquens라는 개념을 만들었으나, 이것은 개나 고양이를 길러 본 사람이라면 담박에 무근거함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고양이의 "야옹" 소리가 사람으로 치자면 "엄마" 소리이므로. 고양이말 번역기 앺도 존재한다.

호이징하가 「Homo ludens」라는 책을 내었으되, 그의 주장이 유희 본능을 인간만의 고유 특성으로 보자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 개념은 앞의 Homo xxx들과는 약간 궤를 달리 한다, 책 내용이 인간을 포함하여 여러 종류의 동물들에게 유희라는것이 매우 중요한 활동임을 주장함일 뿐이므로.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창세기 2:25, 3:6-7)

이 별에서 [자발적으로] 옷을 입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다. 그러므로 옷 입는 사람(Homo induens)에서는 Homo를 빼고도 말이 성립한다. 앞에 열거된 여타 개념들과 차별되는 점이다.

실제로는 앞리카 대륙에서 쫓겨나 사계절이 있는 유라시아 대륙으로 이동한 지구인들이 추위를 견디려고 짐승 가죽을 뒤집어 쓴 데서 비롯되었을 테지만, 유대 신화는 이 옷이라는 것을 '선악을 아는 지혜 및 수치심'에서 기원하는 존재로 보았다. 애초에는 추위때문이었더라도, 일단 옷을 입기 시작한 이상 이제 알몸이 부끄러운 일이 되는 주객전도, 전후도착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무화과나무 잎사귀는 조각이다. 조각을 이어 띠를, 띠를 붙여 면을, 면을 구부려 입체를 만드는 과정에는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이미' 보는 변증법적 상상력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더하여 옷이란 아마도 지구인들이 최초로 의식하기 시작한 사유 재산이었을 것이고, 정교한 연모를 요구하였을 것이며, 나남을 나누는 경계와 신분을 구별하는 기표가 되었을 것이다. (예컨대 "백의 민족"등)

고대 지나인들이 의식주(衣食住)에서 보듯이 '옷'을 밥과 집보다 앞세웠음은 이런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반면 현대 지나나 북한에서는 식의주(食衣住)라고 쓴다 하니, 그들의 몰염치하고 비참하며 즉물적, 동물적인 존재 상황을 웅변함이라 하겠다.

그런데 문가는 어찌하여 옷은 그럴 듯하게 입으면서 부끄러움은 모르는가? 군 통수권자가 되어 가지고, 제복을 입혀 놓은 파병 부대원 90%(270명/301명)가 온역에 걸린 상황에서도 사죄는 아니하고 대(對)일본 자위만 하고 있음인지... Homo induens 맞나? 털깎인 강아지처럼 그저 곁에서 십상시가 옷만 입혀준 것일 뿐 아닌지 모르겠다.

2021-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