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솤라텟을 떠나지 못하는가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인류의 스승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4대 성인들의 가르침을 보면, 네 분 각각의 핵심어가 다르다.

• 공자: 배움
• 석가: 깨달음
• 예수: 믿음
• 솤라텟: 모름

공자의 「논어」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로 시작하여, "말을 알지 못하면 이로써 사람을 알 수 없다"로 끝난다. 공자에게는 평생이 배움으로써 앎을 추구하는 과정이었고, 물론 그 최종 목표는 권력 획득이었다. (군자가 됨은 중간 단계 목표) 배움에 끝이 있을 리 없고, 권력이라는 게 보통 사람들에게는 차한에 부재이니 둘 다 아득한 이야기일 뿐이다.

석가는 새벽 샛별이 뜬 시각에 보리수 아래 앉아 십이인연을 깨달았다는데, 십이인연이 무아설과 윤회설을 공존시키고 있음은 사실 상당히 수상한 일이어서 이해하기가 어렵고, 이 또한 깨달음이 아무에게나 아무 때나 오는 것도 아니니 기대가 난망하다.

예수는 믿음을 강조하였고, 그래서 믿고 십자가에 매달렸다는데, 과연 충분히 완전히 보상받았는지 여부는 여전히 믿음의 영역이다. 그래서 기도를 하기는 하나 애시당초 믿지 않는 이를 설득할 길은 없는 셈이다. 유태인들을 보면 알 조 아닌가?

솤라텟은 "나는 잘 모른다"에서 시작하였고, 여기서 중요한 점이 그 자세로 초지일관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솤라텟은 공자나 석가나 예수처럼 목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 유교나 불교나 기독교는 있어도 솤라텟교는 없지 아니한가. 권력을 추구함도 아니요, 해탈을 추구함도 아니요, 부활 영생을 추구함도 아니니, 매우 자유롭다. 헴롴을 들이마심조차도 "한 번 죽어 보고 싶었다"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시빌레처럼 영생을 '당'한다면 경험 못할 일일 터이므로. 바로 이 점이 솤라텟이 고대나 중세에뿐 아니라 현대에도 의미있는 이유일 것이다.

잘 모르[ㅁ을 인정하]는 사람은 개방되고 겸손하다.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요컨대 그에게는 고집이 없다. 부드럽다.

"사람이 살아 있으니 부드럽고 여리되, 
그가 죽으매 굳고 세도다.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인지생야유약 기사야견강.)"
(「도덕경」, 76장)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에스겔 11:19, 36:26)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應無所住 而生其心)"
(「금강경」, 장엄정토분)

2021-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