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란 무엇인가?

 

2020.12.28.

 

사법부에 의해 윤석열 검찰총장의 직무배제와 징계에 대한 가처분이 연속으로 인용되고, 정경심 1심에서 징역 4년에 벌금 5, 추징금 14천만원이 선고되자 민주당과 청와대, 그리고 대깨문들이 패닉에 빠져 광분하고 있다.

김어준 같은 구라쟁이들의 난동은 익히 예상한 바였고, 김용민, 김남국, 이수진 등 민주당의 법조인 출신 의원들도 사법고시나 변호사 시험에 어떻게 패스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의 사람들이었으니 또 그러려니 하지만, 명색이 국립대 교수라는 양반이 말도 되지도 않는 글로 국민들을 현혹하고 있다.

 

<한겨레신문 - [세상읽기] 이제 판사를 선거로 뽑아야 할까? / 최한수(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76071.html?_fr=mt5#csidx13b5060d809bc7ba0faca3dc1c1ce30

 

최 교수는 판사들이 승진의 열망 때문에 정치적 판결을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최 교수의 주장처럼 승진 때문에 정치적 판결을 하는 판사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윤석열의 가처분 신청을 인용한 판사들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친문재인의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는 가처분 신청을 기각하고 정경심을 무죄 선고하거나 가벼운 처벌을 했어야 승진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증거와 법리에 따라 소신껏 판결을 했을 뿐이다.

최 교수는 또 법원은 자정능력이 없으며, 국회의 탄핵 외에는 이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며 은근히 이번 판결을 한 판사들에 대해 탄핵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판사들을 법조귀족이라 부르며 자율성은 높은데 책임성이 부족하여 국민들의 법원에 대한 불신이 크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최 교수의 주장에는 어떤 근거도 논리도 없다. 최 교수는 이번 판결을 한 판사들이 무얼 잘못했길래 책임지지 않는다고 주장할까?

 

그 다음이 더 가관이다.

 

혹자는 자율성은 사법부의 민주적 정당성에 근거한 것이라 말하겠지만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법시험이나 변호사시험을 통해 임용된 법관에게 국민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 수준의 정당성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권자가 법원에 거는 최소한의 기대는 사법적 자제다. 행정부의 재량이 인정되는 사항에 대해 그 정당성을 존중하는 절제의 모습이 있을 때 법원의 자율성 역시 인정될 수 있다.”

 

최 교수는 판사는 국민 투표로 선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민주적 정당성이 없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판사(사법부)는 국민의 동의를 받은 헌법에 의해 국민의 주권을 위임받았으며, 헌법(105)에는 법관의 임기를 규정하고 평가에 따라 연임여부가 결정되게 되어 있어 법관에 대한 통제를 헌법에서 하고 있다. 따라서 판사(사법부)에 대한 민주적 정당성을 보장받는 최후의 보루는 주권자로부터의 신뢰이다.

이번 판결들에 대한 국민들의 판단은 어떤가? 여론조사 결과 약 60%가 이번 판결이 잘 된 것이라며 이번 판결을 한 판사들에 대해 신뢰를 보였다. , 이번 판결들은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였다고 봐야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최 교수와 같이 선출된 권력’, ‘민주적 통제를 외치며 검사나 판사들은 선출되지 않았음으로 선출된 권력(대통령, 국회의원)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자들이 많다. 이런 주장들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선출된 권력민주주의가 절대 선이라 착각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자유와 인권을 실현하기 위한 실용적인 '수단'에 불과하며 민주주의란 수단 자체도 항상 권력의 철저한 분립과 법치주의에 의해 견제되지 않으면 괴물로 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민주주의란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다수의 의견에 따른 방식을 사회가 시행에 볼 기회를 갖는 수단이지, 선거에 이긴 세력이나 그 세력이 내세운 공약이나 정책이 선하거나 정의롭다는 것을 인증해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민주당이나 좌파 진영 사람들은 선거에 승리하면 정의가 이긴 것처럼 착각을 한다. 선거란 다수의 선택이 어디에 있느냐를 알아보는 수단일 뿐, 그 선택의 선악이나 정의여부를 가려주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이렇다 보니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고 타도할 대상으로 보고, 선거에서 지면 정의가 패배했다며 울분을 토하게 된다.

하이에크는 민주주의를 목표가 아닌 '수단'으로 보았고 민주주의 정부는 다른 모든 정부 형태보다 그나마 최소한의 사악함을 지닌 정부로 보았다. 또한 권력의 분립(입헌주의)에 의하여 제한받지 않는 무제한적인 민주주의 정부는 다른 어떤 독재 정부보다도 더 전제주의적이고 개인의 자유를 침탈할 수 있다고 보았다.

독재와 민주는 권력의 원천이 어디에서 비롯되느냐에 대한 용어이고, 전체주의와 다원주의는 시민 개개인에 대한 권력의 행사가 어떠하느냐(시민 개개인의 다양한 삶의 형태와 의견을 허용하느냐)’에 대한 용어이다.

그러므로 전체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시민의 자유로운 생활 습관과 의사 개진에 대해 일일이 간섭하는 민주 정부가 존재할 수 있고, 비교적 다원주의적이며 자유로운 독재국가가 존재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다수가 결정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민주주의는 선동정치로 타락하게 된다.

자유주의는 법이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에 대한 방법론이고 민주주의는 법을 어떻게 제정하느냐에 대한 방법론이다. 자유주의는 다수가 받아들인 것이 법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에는 동의하나다수가 받아들였다고 하여 그 법이 좋은 법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자유주의의 목표는 사실 다수가 특정한 규칙을 지키도록 설득하는데 있다.

자유주의는 다수의 지배를 결정을 위한 방법론으로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선택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느냐에 대한 권위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비현실적인(덜 된, 사이비) 민주주의자에게는 다수가 그것을 원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선하다는 것에 대한 충분한 토대가 된다. 비현실적 민주주의자에게는 다수의 의지는 무엇이 법이냐 뿐 아니라 무엇이 좋은 법이냐까지도 결정해주는 원천인 것이다.

민주주의 그 자체가 결코 오류에 빠지지 않거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민주체제 아래에서보다도 독재적 지배 아래에서 문화적 자유와 정신적 자유가 더 컸던 적도 자주 있었다는 사실이다. 매우 동질적이면서도 교조주의적인 다수의 지배를 받는 민주정부가 오히려 최악의 독재만큼이나 압제적일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상 번역된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에서 인용)

 

자유민주주의자인 필자의 입장에서는 현 문재인 정권은 전체주의적이고 권위적인 민주 정권일 뿐, 자유민주주의 정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대깨문들과 민주당 인사들, 똥팔육들은 사이비 민주주의자이지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최근 일련의 사법부 판결에 대해 청와대, 민주당, 좌파 인사들, 그리고 대깨문들이 저렇게 광분하는 것도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저런 칼럼을 쓴 최 교수 역시 예외가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