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기사. 


http://m.jpnews.kr/a.html?uid=4598&sc=sc1&fbclid=IwAR16saTumjoM52IxSQhGZXoI_MHQMFBk8qndIxR31KGyit7rBS5r0tELOms



[- 정리하자면 위안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요금소에 돈을 내고 방 번호표를 받아 위안소를 이용한다는 거니까, 위안부들이 돈을 직접 받았는지 아닌지는 모른다는 것이죠?
"네. 어떻게 배분했는지 그런 건 저희들은 모릅니다."]

[- 합해서 120명의 위안부가 있었습니다. 군인들 수는 몇 명 이었습니까?
"그건 유동적이었습니다. 나쓰시마는 함대기지니까 바다에서 죽지 않는 이상 이쪽에 모이게 됩니다. 함대가 집결할 때는 군인 수가 늘어나고 다시 바다에 나가면 줄어들고 그랬으니까... 평균 잡아서 3, 4만명 정도였다고 봅니다." ]

[- 위안부 여성들을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은 어땠나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마 접점 자체가 없으니까 위안부라는 존재자체를 몰랐었을 가능성도 있지요. 군인과 군속들만 (위안부와) 접촉했으니까요. 또 일반인들은 위안소를 사용할 수 없었고 성욕을 해결하려면 환락가에서 따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 아까 말씀하신 공창 같은 곳을 의미하는 건가요?
"그렇죠. 거기가 사실 중요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위안소는 공창하고 전혀 다릅니다. 위안소는 완전히 따로 격리된 곳입니다. 매일 일해야 하고 한 달에 한 번만 외출이 가능합니다. 외출도 성병검진을 위한 거니까 그냥 병원과 위안소를 왕복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위안소로 다시 돌아오면 바로 일을 해야 하니까 쉰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고 봐야지요."]

[- 솔직한 마음을 듣고 싶습니다. 당시 군인이나 군무원들, 그러니까 위안소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위안소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나요. 위안부들이 불쌍하다는 인식같은 건 있었나요?
"전혀 없었습니다. 저만 해도 그랬던 것이 당시 일본에는 공창제도가 있었거든요. 때문에 군 위안소도 공창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아무런 저항감이 없었어요. 그 땐 지금과 달라서 보통 직장에서도 회식하고 단체로 공창에 가고 그랬거든요. 그런 문화가 사회적으로 인정됐던 것이죠. 쇼와 31년(1956년)에 공창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다들 그런 감각이었어요. 지방에 출장갔다 돌아오는 길에 역 주변에 있는 공창촌에 들러 여행의 때를 벗긴다는 게 당연한 시대였으니까요. 저는 위안소를 이용하면 숙박을 자주했기 때문에 아침에 귀대를 했습니다. 그러면 '야노'라는 해군 중좌(중령)가 저를 불러서 '너 말이지, 너무 그런 곳 가는 게 아니다'라고 꾸중하기도 했어요. 사고방식 자체가 그랬으니까 그 때는 위안소에 간다는 것이 부끄럽거나 그랬던 건 없었습니다."

- 그 상사는 어떤 의미에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아, 그건 단순히 제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런 곳에 자주 가기 보다 군무에 힘을 써라, 그런 의미에서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 이건 언제 지으셨나요?
"그 옆에 날짜가 나오는데, 2005년 1월에 만들었네요. 그때 nhk가 종군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적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뭐랄까, 위안부의 비참한 삶을 제대로 보도하기는커녕 방송내내 역사를 왜곡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화가 많이 났습니다. 보도기관이 역사를 왜곡한다면 그걸 까발리는 것을 제 나름대로 해야 겠다고 생각해서 이 노랫말을 지은 겁니다."]



"Somewhere unwritten poems wait, like lonely lakes not seen by any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