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승려에게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물었다.

"장작 패고 물 길었다오." 

깨닫고 난 후의 삶은 어떻게 변했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장작 패고 물 길었다오."

「코칭의 핵심」(토마스 크레인 지음, 김환영·홍석기·김태흥 옮김, 예토)은 이처럼 무엇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행하느냐가 코칭의 화두라고 지적한다.


위 글에서는 어느 중인지 자세하지 않으나, 이야기의 분위기로 보아  불생선(不生禅)을 제창한 일본 임제종의 고승 반케이 요오타쿠(盤珪永琢, 1622~1693) 선사의 선문답으로 보인다.

위 선문답을 읽고 나면 당연히 떠오를 의문이 있다. 

"그렇다면 왜 깨달아야 하는가?"

사실 반케이 요오타쿠의 시대에는 깨닫지 않더라도/못 하더라도 크게 상관없었을 터이다. 고작해야 냉병기뿐이었으므로.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요 하바드대학 교수인 에드워드 O. 윌슨은 이렇게 말하였다.

"현재 인류는 구석기시대의 정서와 중세시대의 기관과 신(神)과 같은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런 엄청난 괴리(乖離)의 결과물이 무엇이겠는가? 세살박이 어린이가 장전된 권총을 갖고 놀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깨달음이 필요할 까닭이다.

그런데 "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이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전라도[출신]에 특히 많다. 남한[인들]의 미래가 어둡다, 지구인들의 미래보다 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