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포이 신전벽에는 실로 심오한 경구가 새겨져 있다.

"너 자신을 알라. (ΓΝΩΘΙ ΣΕΑΥΤΟΝ.)"

탈레스의 말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경구에 대하여 정치 신학의 창시자 위르겐 몰트만은 「희망의 혁명」에서 이 말을 "신이 임재하고 있는 이 거룩한 처소에서 네가 신이 아님을, 죽어야만 하는 인간에 불과함을 알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몰트만의 해석대로라면 이 종잡기 어려운 말은 좀 더 평이하고 명백하게 고쳐 쓰여질 수 있을 것이다.

"너는 그들중의 하나이다. (ΕΙ ΕΙΣ ΑΠΟ ΑΥΤΟΥΣ.)"

(※ 헬라어 지시사 αυτος는 거리에 따른 구별이 없다. 영어의 this와 that 둘 다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들중의'가 될 수도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의 대성공, 1992년 순수 민간 정부의 등장, 1996년 OECD 가입으로 이어지는 동안, 미국 조야에서는 한국인(남한인)들을 깊이를 알 수 없는 저력을 가진 대단한 종족이라고 찬양하고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지막날 몬주익 경기장으로 남한의 황영조,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 독일의 슈테판 프라이강이  순서대로 뛰어 들어오자 관전하던 기자들이 "독종 3국이 1, 2, 3위네!"라고 탄성을 올렸다는 보도는 이런 사정의 반영이었다.  그런 한 편으로는, 길디 긴 역사에 비하여 도무지 내세울 만한 문화적 업적이라고는 없고 서세동점의 시기에 개혁 개방에도 실패한 채 근린국의 노리개 노릇이나 하다가 식민지로 전락한 쓰레기 종족이라는 폄하도 있었다.


전자는 주로 민주당 일각의 입장이었고, 남한이 제2의 일본으로 등극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의 한 발로가 국통금 사태 직전에 로버트 루빈이 일본의 미츠즈카 히로시 대장상에게 보낸 편지라고 볼 수 있다. 일본더러 남한을 돕지 말라는 경고의 편지는 곧, 남한을 국통금으로 보내 "양털 깎기"에 나설 예정이니, 다치기 싫으면 알짱대지 말고 비켜서라는 명령이었을 터이다. 


후자는 주로 동아시아사에 대하여 제대로 공부하여, 단순히 그 몇 년동안의 기적적 성취뿐 아니라 전 시대의 숱한 삽질들을 알고 기억하는 학자 그룹의 평가이었다.


이 상반된 평가가 둘 다 사실이지만, 둘 다 진실일 수는 없다. 진실은 그 사이 어디쯤이리라.


이에 대하여 본회원이 기억하는 한 칼럼이 있다. 정통 프로이디안이자 남한 행동과학의 도입자로 알려져 있는 당시 서울대 의대 정신과 조두영 교수의 글이다. 그 글에서 조두영 교수는 자신이 미국 정신과 전문의로서 다인종 국가 미국의 여러 인종들을 고루 진료하면서 겪었던 일들 및 자신이 학자적 호기심에서 미국내 각 인종들의 종특을 연구한 기억을 반추하면서, 자기 견해로는 남한인들이 1류의 종족도 아니요 3류의 종족도 아닌, 비교적 평범하다면 평범한 2류의 종족이라고 주장하였다.


요컨대 남한인들은 그냥 "그들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가르침대로, 과대망상도 죄업망상도 벗어나 바르게 자신을 보면, 이 별에서의 남한인들의 자리가 보일 거라는 자못 정신과 의사다운 고언이었다.


그런데 최근 인구에 회자되며 인기 절정을 구가하는 조국에게 그 자신과 그 아우와 그 딸만은 "이들중의 하나"가 아니었나 보다.  그러길래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대담하고 희한하고 절묘한 꼼수가 난무함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가 델포이 신전 벽에 새겨진 두번째 경구인들 기억할 리가 없을 것이다.

"아무 것도 지나치지 않게. (ΜΗΔΕΝ ΑΓΑΝ.)"